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⑩ 바다와 섬, 공존 지혜가 필요하다
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⑩ 바다와 섬, 공존 지혜가 필요하다
  • 김준 작가
  • 승인 2018.12.10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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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시 가조도 창호리

 

[현대해양] 거제바다에 해가 뜨기 직전, 아침 그물을 보기 위한 배들이 가조도를 잇는 다리를 지나 정치망에 기대어 그물을 털고 성포로 향한다. 호수 같은 바다에 긴 사선을 남기며 거슬러 올라가는 모습을 보니 그물이 묵직했던 모양이다.

그 사이 거제도에서 붉은 기운이 치솟더니 바다를 붉게 물들인다. 어제 광이바다를 지나 고성으로 지던 노을이 다시 거제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옥녀봉을 감싼다.


큰 호수를 품은 섬

가조도는 경상남도 거제시 사등면에 있는 장고모양의 섬이다. 북쪽에는 옥녀봉이 남쪽에는 백석산이 좌정을 했다. 옥녀봉은 섣달그믐에 산제를 지냈고, 2월에는 바람신인 ‘할만네’를 모시는 영험한 산이었다.

거제도와 불과 600m 떨어져 있으며, 2009년 7월 거제도 성포리와 연결하는 다리가 개통되어 무시로 차들이 오간다. 거제도에 딸린 섬으로 칠천도 다음으로 큰 섬이다. ‘한국지명총람’를 보면 ‘창호리’로 소개되어 있다.

창호리에는 창외, 신전, 창촌, 실전, 유교마을이 있었고, 후에 군령포, 계도, 신교까지 더해 8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법정리는 창호리 외에 창촌리, 실전리가 있다. 큰 섬 거제도를 돕고 보좌하는 섬으로 해석하기도 하며, 주민들은 ‘가지미섬’, ‘가재미섬’이라 부른다. 기록에는 가좌도, 가조도가 혼재되어 나타나고 있다.

‘창호리’라는 지명은 곡식을 보관하거나 운송을 기다리는 것을 ‘창’에서, ‘호’는 가조도가 서북으로 길게 제방 역할을 하면서 만든 ‘안바다’ ‘호’에서 가져온 지명으로 풀이한다. 실제 가조도에서 동서 양쪽으로 보이는 바다는 모두 호수다.

다리가 놓인 가조도는 전과 비교하면 사뭇 다르다. 가장 많이 찾는 사람은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요, 다음은 바다를 보며 커피 한잔 즐기려는 연인들이다. 곳곳에 펜션과 커피숍 그리고 귀촌한 사람들이 지은 집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마을 중에 변화가 눈에 띄는 곳은 계도이다. 닭섬이라 부른다. 가조도 북서쪽에 자리를 잡은 마을이다. 마을 앞 작은 섬 ‘닭섬’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그 섬을 근거지로 유어장과 해상펜션 등이 운영외고 있다. 일찌감치 어촌체험마을로 인정을 받아 해상낚시는 물론 지금은 카누 보트 등 해양레저까지 곁들인 체험활동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이를 담당하는 직원이 체험마을 사무실이 상시근무하고 있다.

오래 전 계도마을을 방문했을 때와 비교하면 상전벽해가 되었다. 펜션과 카페가 들어서고 주차장에는 차로 가득하다. 당시 처음 만난 사무장은 생면부지 나그네에게 따뜻한 밥상을 마련해 주었다. 그 사무장은 지금은 화성 백미리 어촌체험마을에서 일하고 있다. 밥상의 인연은 이렇게 질기고 길다.

▲ 가조도에서 본 일몰
▲ 가조도에서 본 일몰

 

작은 섬에 러일전쟁의 흔적을 남기다

계도마을로 가는 해안에서 본 광이바다는 온통 하얀 부표가 떠있는 굴양식장이다. 그 사이로 흰 표지석이 세워진 작은 바위섬이 있다. 주민들이 ‘독수리섬’이라 부르는 취도다. 작은 바위섬에 하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1935년 8월 23일 일본의 진해해군사령부가 세운 ‘취도기념비’이다.

당시 총사업비 200원 73전 동원인원 393명으로 50여 평의 공원을 조성하고 기념비를 세웠다. 그 내력은 이렇다. 광무 8년(1904) 2월 10일 러시아와 일본이 극동침략과 조선 지배를 둘러싸고 전쟁을 펼쳤다. 일본이 요동반도 여순을 점령하자 러시아가 발틱함대를 극동으로 이동시켰다.

이를 눈치챈 일본은 1905년 5월 27일 대한해협을 통과하는 발틱함대를 거제도 송진포에서 급습해 큰 타격을 주었다.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 동양함대가 아간사격의 표적지로 삼은 곳이 독수리섬이다. 함포의 표적지로 간신히 흔적만 남은 돌섬에 그 기념비가 오롯이 남아 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본격적으로 조선 진출을 시작했다. 수산자원의 수탈의 흔적은 가조도 바다에서 시작되었다.

 

왕실의 바다에서 제국의 바다로

거제도 북쪽 바다를 ‘괭이바다’, ‘광이바다’라고 한다. 거제, 고성, 진해로 둘러싸인 바다를 말한다. 진해만 안쪽에 있는 광이바다는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어기(어장)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많은 일본인 어민들이 광이바다에서 조업을 위해 들어왔다. 한일통어장정(1889) 조약에 의해 어업권의 조차, 건어 및 염장이 가공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가조도는 괭이바다 안쪽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를 잡아 좌우로 안정된 어장을 갖추고 있다. 견내량을 통해 바닷물 소통이 좋고 어의도, 수도, 지도 등 작은 섬들이 있어 주변에 어류들이 서식하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조선 왕실과 사직에 이곳에서 대구, 청어, 명태들이 올라갔다. 일제는 마산만, 진해만 등 고성과 거제와 통영에 일본인 어민들을 이주시켜 멸치를 잡아갔다. 일본에서는 화학비료가 개발되기 전에는 기름이 많은 멸치, 정어리, 청어 등은 ‘벼를 키우는 물고기’로 대접을 받았다. 해삼, 전복, 상어지느러미 등은 배위에서 가공해 가져갔다. 이를 위해 일제는 이곳에 많은 일본인 어민들을 이주시켰다.

1908년(융희2) 7월 광이바다를 중심으로 일본어민 두명이 발기하여 만든 ‘가좌어기조합’은 1909년 ‘거제한산가조어기조합’과 ‘거제한산모곽전조합’으로 발전하였다. 같은 해 4월에 시행된 ‘한국 어업법’에 의해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수산단체로 기록되어 있다. 수산업협동조합의 효시로 보고 있다.

두 조합은 1910년 통합되어 ‘거제한산가조어기모곽전조합’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한일합방 후 1912년 11월 조합원은 모두 302명에 어선 30척이며, 이 중히로시마현에서 어민 20가구가 입주하여 건착망 어장을 운영하였다. 조선 해역에서 멸치잡이를 처음 시작한 일본인은 히로시마현 어민들이다.

1885년 경 마산 부근에서 시작했다. 그 후 거제도, 마산만,진해만, 고성, 통영, 남해도, 사량도, 욕지도 등으로 확대되면서 멸치를 잡았다. 허가를 받은 어업이 아니라 무단어획이었다. 어업법이 발효된 이후 가조도도 멸치잡이 어민들이 정착을 해 광이바다를 중심으로 멸치잡이를 하며 수산단체를 조직한 것이다. 인근 주민들이 기억하는 어업조합은 진두(나루꼬지)에 있었다고 한다.

▲ 계도 어촌체험마을에서 운영하는 해상펜션과 유어장
▲ 계도 어촌체험마을에서 운영하는 해상펜션과 유어장

 

공장과 어장은 공존이 가능할까

가조도 바다는 멸치와 대구로 시작했다. 조선시대에 대구어장으로,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 어민의 이주로 권현망이라는 멸치잡이 기술이 소개되어 해방 후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1960년대 70년대 광이바다를 중심으로 피조개 종패와 양식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인근 어의도 일대에서 가조도까지 이어지는 바다는 피조개 종패를 생산하는 인큐베이터였다. 거제 큰 섬이 부럽지 않았다. 천혜의 조개육묘장이자 대구, 방어, 멸치가 철철이 들었던 바다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진해만와 마산만에 공업단지기 조성되면서다.

이와 함께 인구밀집 도시가 형성되면서 생활폐수도바다로 쏟아졌다. 그나마 미더덕 양식, 홍합양식, 굴양식 등이 빈자리를 대체하면서 어업의 명맥이 유지하고 있다. 피조개 종패로 ‘노다지’를 캤다는 바다는 이제 굴양식장으로 바뀌어 하얀 부표로 가득하다.

실전마을 뒤 언덕에서 시작되는 옥녀봉으로 오르는 길은 가파르다. 대신에 등산하는 시간이 짧다. 정상에 오르면 거제바다와 광이바다 등 진해만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옥녀동에서 본 가조도 주변은 흰 부표로 포위되어 있다. 굴 양식장 시설들이다. 옛날과 달리 양식장에서 직접 채취해 세척한 후 뭍에서 굴을 까는 박신작업만 하고 있다. 이마저도 굴 까는 작업을 할 사람을 찾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다.

최근 ‘굴 정식’ 식당이 전국에 하나 둘 생기면서 알이 큰굴이 많이 소비되고 있다. 대부분 코스요리로 굴전, 굴무침, 굴튀김, 굴구이, 굴밥, 굴회, 굴국 등 큰 굴로 만들어 가격에 따라 가지 수를 더하고 뺀다. 최근에는 굴 김, 굴 스테이크, 굴 라면, 굴 스넥 등을 개발해 상품화하고 있다. 거제와 통영일대에서 양식한 굴이 많이 소비되고 있다.

▲ 10년 전 계도마을에서 사무장과 어촌계장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받았던 따뜻한 섬밥상
▲ 10년 전 계도마을에서 사무장과 어촌계장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받았던 따뜻한 섬밥상

 

이런 수요에 맞추려면 숙력 된 박신전문가들이 필요한데 모두 고령이다. 힘으로만 하는 일이 아니니 외국인을 불러다 대체하기도 어렵다. 해서 섬마을에 박신작업장은 문을 닫고 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쌓이는 굴 껍질 처리이다.

산업폐기물이 되어버린 굴 껍질은 가조도 맞은 편 통영시 용남면에는 마을 부근에 산처럼 쌓여 있다. 이제 증식이 아니라 나오는 껍질 처리를 고민해야 할 때다. 어디 굴뿐일까. 전복, 꼬막, 바지락 등 껍질이 발생하는 이매패류는 모두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이제 바다도 수산업도 재생과 재활용의 문제를 고민해야 할 때다. 멸치그물을 터는 어장 너머로 대형 조선소가 또렷하다.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는 곳이 거제바다다. 가조도에서 다리가 놓이면서 거제도 조선소나 공장과 기업을 다니는 젊은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적한 어촌생활을 즐기기 좋은 곳이라 들어왔다 카페를 운영하며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있다.

가조도와 광이바다는 왕실의 바다에서 제국의 바다로, 주민의 섬살이의 터전에서 또 다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연도교가 만들어지고, 거제와 부산을 있는 다리도 개통이 되면서 가조도는 이제 더 이상 섬 안의 섬이 아니다. 그럼에도 섬의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는 위치와 경관을 갖추고 있고, 옥녀봉이라는 산이 있어 낚시, 데이트, 등산 등을 할 수 있어 찾는 층이 다양하다.

외지인이 들어와 커피숍과 펜션을 시작하고 있다. 가조도는 이제 주민들의 섬이 아니다. 과거의 어촌공동체나 마을공동체는 큰 변화에 직면해 있다. 건강한 바다와 지속가능한 섬살이의 공존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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