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 승인 2012.07.05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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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海洋文學 순례 ②



 1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1941년 6월 어느 날, 쿠바의 하바나 항 가까운 어느 한적한 어촌(漁村). 그곳 한 선술집에서 미국인 헤밍웨이(E. Hemingway)가 한 잔 호프를 마시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올해로 마흔 둘인 그는 청년 시절 이미 투우(鬪牛)를 매개로 한 남녀 간의 사랑과 도피행각을 다룬 <해는 또 다시 떠오른다>와 1차 세계대전 당시 자신의 이탈리아 종군(從軍) 체험을 바탕으로 한 <무기야 잘 있거라>를 잇따라 발표하여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데다, 지난해에도 에스파냐 내란을 배경으로 미국인 대학강사(로버트 조단)와 집시 처녀(마리아) 간의 사랑을 다룬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출간하여 수십 만 부나 팔리고 거기에 영화까지 만들어지는 행운이 겹쳐 작가로서는 실로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새 작품의 소재(素材)를 찾아 고국인 미국을 떠나 멕시코 만 건너의 하바나 항 인근에 있는 호화롭고 광대한 저택을 사서는 그곳에서 한결 여유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당시 작가가 살던 저택은 지금 그의 이름을 딴 ‘헤밍웨이 박물관’으로 되어 있고, 호프를 마시던 선술집 역시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명소가 되어 있다).
고깃배들이 정박하는 부둣가에 자리 잡은 그 선술집에서는 멕시코 만으로 열린 바다가 보였고, 그래서 멀리 혹은 가까이로 고기잡이를 마치고 귀항하는 고만고만한 조각배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또 그 선술집 앞은 어획물을 양륙하는 물양장(物揚場)이기도 하여 부둣가에는 어획물을 하바나 어시장으로 싣고 갈 냉동 탑차도 보였고, 어부들이 잡아 온 상어 지느러미를 잘라내고 살코기를 토막 내는 광경도 볼 수 있었다. 그 같은 풍경은 나중 헤밍웨이가 쓸 <노인과 바다> 도입부에 그대로 묘사되고 있다.
마침 해가 뉘엿뉘엿한 저녁때여서 어획물 양륙작업도 끝나고, 어부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간 상태였으므로 물양장은 매우 한가해 있었다.
바로 그 때 땀으로 흠뻑 젖은 한 노인이 선술집으로 들어섰다. 야위고 초췌한 노인의 목덜미에는 깊은 주름살이, 그리고 뺨에는 바다가 반사하는 태양열로 생겨난 피부암을 연상케 하는 갈색 기미가 잔뜩 끼어 있었으며, 양 손바닥에도 몇 개 깊은 상처 자국이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그 노인은 평생을 고기잡이에 종사한 어부이며, 또 어획이 좋았는지 나빴는지는 모르지만 방금 어장에서 돌아오는 길임을 알 수 있었다.
“여기 맥주 한 잔!”
의자에 앉자마자 노인이 곧 맥주를 주문하였는데, 그 목소리에는 울분과 함께 지독한 짜증이 섞여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듣고 헤밍웨이는 그 노인에게 틀림없이 안 좋은 일이 있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게 궁금해진 헤밍웨이는 노인을 가까운 테이블로 오도록 하여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그러면서 자기가 한 잔 사겠다고 말했다. 노인은 처음에는 귀찮다는 표정이었으나, 한 잔 산다는 말에 태도가 공손해졌다.
“말도 마시오. 사람이 아주 미쳐버리겠단 말입니다.”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켜며 노인이 한 말이었다. “재수가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를 깬다고, 세상에 이런 망할 놈의 일이 있소? 1천 파운드도 더 나가는 다 잡은 고기를 놓쳐버렸으니 말이요!”
1천 파운드라면 500킬로그램 가까운 큰 물고기다.
“1천 파운드라니요? 세상에 그렇게 큰 물고기가 있소?”
“있다마다요. 내가 방금 놓친 고기가 그랬다지 않소? 하긴 나도 생전 처음 보는 놈이었지만.”
“무슨 고긴데요?”
“마알린!”
마알린이라면 새치다. 성질이 급한 편인 새치는 윗턱이 딴딴한 주둥이뿔로 변형되어 바다의 무법자인 상어도 무서워하는 아주 공격적인 물고기다.
헤밍웨이는 부쩍 구미가 당겼다. 그래서 거푸 맥주를 권하며 노인이 하는 한 마디 한 마디를 놓치지 않았다.
다행인 것은 노어부 이야기를 듣는 헤밍웨이가 어릴 적부터 의사인 아버지를 따라 낚시와 사냥을 즐겼다는 것, 그리고 쿠바로 이주해 온 다음에도 틈만 나면 요트를 빌어 트롤링(Trolling)이라는 끄심발이 낚시를 여러 번 해보았다는 것, 그래서 노인이 말하는 고기 종류며, 낚시에 걸린 물고기가 어떤 반응을 보이며, 그럴 때는 또 낚싯줄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며, 마지막으로 물고기를 갑판에 끌어올리는 순간까지의 모든 수단과 요령 등을 얼마만큼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노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야말로 사실 취재에 능한 기자 출신인데다 그 체험을 바탕으로 몇 권의 책도 출간한 소설가였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 것인가.
그렇게 하여 헤밍웨이는 그 노인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편의 소설을 쓰기에 이르렀으니, 그게 곧 ‘퓰리처 상’에 이어 문학가 최고의 영예로 꼽히는 ‘노벨문학상’까지 차지한 <노인과 바다>인 것이었다.


 2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헤밍웨이는 곧 집필에 착수하지 않았다. 아니 쉽게 집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야 한다. 우선 어느 출판사 요청으로 자신의 종군일지(從軍日誌)를 묶은 <싸우는 사람들>을 편찬하던 중이었고, 그 일을 마치자마자 특파원 자격으로 아직도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유럽으로 건너가 1년 넘어 잡다한 취재 활동에 종사한 때문이었다.
유럽 종군에서 돌아온 그는 또 세 번째 이혼을 당했다. 전의 두 아내도 마찬가지지만, 걸핏하면 출장이니 취재니 하며 집을 비우는 날이 잦아서였다. 이혼하자마자 그는 파리에서 만난 ‘타임지’ 특파원(메리 웰시)과 네 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는 사이에 그의 나이 마흔 일곱이 되어 있었는데, 그러니까 하바나 항 인근 어촌에서 큰 고기를 놓쳤다고 분통해 한 노인을 만난 때로부터 무려 5년이나 지나 있었다.
그 동안에도 헤밍웨이는 노인의 불운(不運)이 한시도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제는 전쟁이니 사랑이니 하는 주제에도 신물이 났고, 더 이상 쓸 소재도 없었다. 그렇다면 난생 처음 한가한 어촌을 무대로 한 고기잡이 이야기는 어떨까.
전체적인 작품 구성도 이미 끝난 상황이었다.
- 어느 운 나쁜 노어부가 하나 있었다. 노인은 며칠 동안 고기 한 마리 잡지 못 했다. 그러다가 한 번은 1천 파운드가 넘는 큰 고기를 만났다. 그 어부는 몇 시간이나 사투를 벌였으나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 낚싯줄이 끊어지면서 그만 놓쳐버리고 말았다. 그 순간의 울분과 아쉬움이라니!
노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 그대로였다.
하지만 막상 집필에 들어가려니 이야기가 전혀 풀리지 않았다. 도대체 노인이 겪은 이야기로는 겨우 단편(短篇)이나 하나 써낼까, 도무지 가지를 치고 살을 붙일 건더기가 없었다. 그의 장기인 남녀 간의 흔하디흔한 사랑 이야기도 덧붙일 계제가 아니었다. 사랑 이야기라면 주인공인 남자가 조금은 젊어야 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늙은 어부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이야기로 원고지를 메울 수 있단 말인가. 그가 집필을 시작하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헤밍웨이는 이미 소설의 첫 문장은 잡아놓고 있었다.
- 그는 멕시코 만에서 조각배를 타고 혼자 고기잡이를 하는 노인이었다.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날이 84일 동안이나 계속됐다. 처음 40일은 한 소년이 같이 있었다. 그러나 고기 한 마리 잡지 못 하는 날이 길어지자 소년의 부모는 ‘노인은 이제 살라오를 만났다. 앞으로도 재수가 없을 것’이라며 다른 배를 타도록 했다. 살라오(Salao)란 스페인어로 최악의 불운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는 도입부 문장이 마음에 꼭 들었다. 이만하면 첫 페이지부터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 내용은 처음 노인에게서 들은 것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실제 헤밍웨이에게 체험을 들려준 노인은 살라오까지 가지 않았고, 새치와의 사투도 두어 시간에 그쳤었다. 그래서 헤밍웨이는 이야기를 다소 부풀리어 긴장감을 극대화시키기로 했던 것이다. 단순히 체험자(體驗者)의 증언에만 의존한다면 그건 르뽀기사일 뿐이지 소설이 아니지 않는가. 따라서 소설적인 긴장감과 재미를 배가시키려면 상황을 부풀리고 개선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도 더 이상 써지지 않았다. 그 허송세월이 실로 10년 가까이 이어졌다.


 3

여기서 우리는 <노인과 바다>를 읽기에 앞서 그 작품을 쓴 헤밍웨이의 작가적 삶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헤밍웨이는 열 살 때부터 산부인과 의사인 아버지를 따라 사냥과 낚시 등으로 소년기를 보냈고, 중학생 시절에는 엉뚱하게 권투선수가 되겠다며 도장을 찾았다가 연배인 미들급 선수에게서 왼쪽 눈을 맞아 평생을 시력장애에 시달렸다.
그렇게 다져진 외향적 성격이 나중 그를 기자가 되게 만들었고, 그러다 보니 생생한 뉴스를 찾아 1차 세계대전과 에스파냐 내전 및 중·일전쟁 등 허다한 세계의 전쟁터로 달려가게 만들었으며, 틈나는 대로 아프리카 수렵여행에 뛰어들거나 혹은 마드리드의 투우장을 찾는 등 그야말로 20세기 작가를 통틀어 가장 대표적 행동주의자(行動主義者)의 하나로 칭송되기에 이른 것이었다.
기자가 된 것은 고등학교(일리노이 주 오크파크고교)를 졸업하자마자,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7년이었다. 그리하여 원래부터 보헤미안 기질을 가진 헤밍웨이는 옳다구나 하고 ‘오직 집을 떠나고 싶은 마음에서’ 징모(徵募)에 응하였으나 시력이 문제가 되어 불합격되고 말았다. 낙심한 그에게 용기를 준 것은 숙부였다. 캔자스시티에 살던 숙부가 그곳 지방 신문인 ‘캔자스시티 스타’에 기자로 추천했던 것.
기자가 된 헤밍웨이는 비로소 새로운 세계에로 눈을 뜨기 시작했다. 캔자스시티 스타는 중서부 지역의 최대 신문이었으며, 특히 수습기자에 대한 훈련이 엄격하기로 정평 나 있었다. 따라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아버지 서가에 꽂혀 있던 소설을 읽은 게 전부인 그로서는 기자로 홀로서기가 역부족이었으나, 고맙게도 신문사는 혈기왕성한 그를 붙들고 단문(短文)에 어려운 용어를 배제한 기사작성의 기초요령을 호되게 가르쳤다. 그 혹독한 단련이 나중 소설가가 되는 기틀이 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만약 헤밍웨이가 하루하루 사회면 기사만 쓰는 지방지 기자로 만족하였더라면 그는 결코 미국문학, 아니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세계적 문호가 되지 못 했을 것이다.
그 계기도 신문사에서 얻어냈다.
아직도 전쟁이 한창이던 그 해(1917년) 11월 어느 날, 선배 기자 하나가 유럽으로부터 잠시 귀국했다. 그 기자는 지난 넉 달 동안 미군이 참전한 프랑스의 포연 자욱한 전쟁터를 누빈 베테랑 종군기자였다. 헤밍웨이는 그 선배로부터 전쟁의 참혹함과 그것을 취재하는 종군기자의 모험담을 듣고 혹했다. 선배는 재차 종군할 참이었다.
“선배님,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선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문사는 그러나 그에게 특파원 자격을 부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사직서를 내고 유럽으로 떠나는 선배기자를 따라 대서양을 건넜다. 그의 나이 열아홉이던 1918년 5월의 일이었다.
파리에 도착하는 대로 선배와 헤어진 헤밍웨이는 이탈리아군 소속 적십자 요원이 되어 여러 전장을 누볐다. 그러다가 두 달 후 쏟아지는 포탄 속을 달리던 적십자 차량이 전복되는 바람에 그는 큰 중상을 입고 곧 밀라노 육군병원으로 후송되어 3개월간의 치료를 받았다. 그 체험이 10년 후(1928년) 출간된 <무기여 잘 있거라> 소재가 되었고, 그것으로 그는 명성을 얻으면서 작가적 위치를 굳히는 계기를 얻었다.
이탈리아 전장을 누빈 헤밍웨이의 종군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종군 후에 반드시 작품이 나온다는 사실이었다.
1936년, 에스파냐에서 내란(內亂)이 발발하자 곧장 특파원으로 달려갔고, 이후 스페인 방문이 네 차례나 이어졌으며, 그 체험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로 승화되었다. 17세기 영국 성공회의 존 던(John Donne) 신부가 쓴 ‘그러므로 저 종은 누구를 위하여 울리냐고 묻지를 마라. 종은 그대를 위해 울리는 것이다’라는 싯귀를 인용한 것이었다. 그것은 타인의 죽음을 외면하지 말라는 경구이며, 죽은 이를 애도하는 조종(弔鐘)인 것이었다.


 4

이야기는 다시 헤밍웨이가 쿠바 하바나 인근의 선술집에서 맥주를 마시던 때로 되돌아간다.
허다한 전쟁터를 누볐고, 그 체험으로 소설을 써서 작가로서의 명성을 굳힌 그는 중·일전쟁이 터지자(1941년) 중국을 다녀온 이래 하바나 교외의 저택에서 한가로운 여생을 보내며 마지막으로 여태껏 숙제로 남겨두고 있던 노어부 이야기를 작품으로 완성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작품은 오래 전 몇 줄 서두를 잡아놓은 그대로였다. 그의 나이 이미 쉰 살을 넘어 있었고, 어영부영하다가는 진짜 매듭도 짓지 못 하고 미완(未完)으로 끝날 판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한 가지 착상(着想)을 얻었다. 곧 <노인과 바다>에서 노어부가 고기와 사투를 벌일 때 중얼거린 ‘사람은 죽지만 그러나 패배하지 않는다’라는 말이었다. 그 무렵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여서 극단적인 허무주의(虛無主義)가 세상에 팽배해 있을 때였다. 따라서 패배하지 않는다는 말은 세상 사람들에게 허무주의를 배격하고 심오한 인간성을 회복시키자는 적절한 경구(警句)이면서 더할 수 없는 교훈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헤밍웨이는 선술집에서 만난 노인의 증언에 큰 수정을 가했다. 곧 두어 시간 사투를 벌이다가 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고기를 놓친 것이 아니라, 그 고기가 사흘 동안 조각배를 끌고 멕시코 만을 돌아다니는 것으로 확대시킨 게 그것이었다. 그러자 이후 집필 작업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의 원고작성 방법은 매우 특이했다. 소설을 씀에 있어서 일반 작가는 사건의 배경을 비롯한 등장인물의 동작이나 표정, 심리나 말투 등을 묘사하는 지문(地文)과 함께 사이사이에 주고받는 대화 등을 순서대로 써나가는 게 원칙이지만, 헤밍웨이는 상황의 전개에 따른 지문을 먼저 서술한 다음 나중에 대화를 끼워 넣는 식이었는데, 그 속도가 매우 빨랐다고 한다.
그럼에도 헤밍웨이가 200자 원고지로 500장 분량의 <노인과 바다>를 탈고한 것은 본격 집필을 시작하고 1년이 지난 1952년 8월의 일이었다.
탈고가 임박하자 그는 책을 홍보하는 방법으로 한 가지 아이디어를 창안했다. 원고를 무조건 출판사로 넘겨 곧장 단행본으로 만들 게 아니라, 1차적으로 명망 있는 잡지에 연재한 다음 뒤이어 출간하자는 게 그것이었다. 그가 서른 살이던 1929년, <무기여 잘 있거라>를 발표할 당시에도 그 원고 역시 <스크립너스>라는 잡지에 1년간 먼저 연재한 다음, 연재가 끝나는 때에 맞추어 출간함으로써 4개월 만에 10여만 부나 판매하는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것이다(그렇게 되면 작가는 잡지사로부터 원고료를 받으면서, 출판사로부터도 소정의 인세를 받는 2중의 수입을 얻게 된다).
그리하여 당시(1952년) 매주 500만 부씩 팔리던 보도사진(報道寫眞) 전문 주간지 <라이프> 지(誌)에 작품 전재(全載)를 제의하였는데, 잡지사 측은 원고를 검토할 것도 없이 그 제의를 수락했다. 그 결과 <노인과 바다>는 단숨에 수백만 명의 독자를 확보하면서 홍보 효과를 톡톡히 거두었다. 그다운 간결한 문체에, 전편을 통해 홀로 낚시질을 하는 노어부의 강인한 정신력은 허무주의에 빠진 독자들의 심금을 사로잡기에 충분하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대목에서 사력을 다하여 잡은 1,000파운드도 넘는 거대한 어획물이 상어 떼에게 약탈당하는 작가의 의도된 결말은 심성이 순박한 뭇 독자들에게 아쉬움과 한탄을 주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거기에 문학 비평가들까지 앞 다투어 호평과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니, 당시 여가선용의 방법으로 프로야구 관람이 유일하였던 미국인들이 전국 곳곳의 서점 앞에 장사진을 이룬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단행본은 주간지가 나오고 그 일주일 후인 1952년 9월 8일에 나왔다).
그 회오리(<노인과 바다>의 열풍)는 미국 언론계에도 휘몰아쳐 출간 이듬해인 1953년에는 언론인 공로상인 ‘퓰리처 상(賞)’을 받은 데 이어, 두 해 뒤인 1954년에는 드디어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함으로써 헤밍웨이는 지금껏 세계문학에서 영원불멸한 대 문호로 우뚝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 가지, 세기의 명작 <노인과 바다>를 저술한 헤밍웨이로서는 작품에 대한 문학계 및 독자들의 찬사와 호평에 너무 부담스러워 한 나머지 정신적 부담이 가중됨으로써 스스로 파멸(破滅)을 불러오는 비극(悲劇)에 처한다는 사실이다.
언론인에 대한 공로를 치하하는 퓰리처 상 수상을 앞두고(1953년 가을) 헤밍웨이는 네 번째 아내와 함께 스페인을 거쳐 아프리카로 수렵여행을 떠났다가 우간다의 마치슨 폭포 부근에서 비행기가 불시착하는 바람에 두개골이 파열되고 내장기관까지 다치는 중상을 입은 게 그 발단이었다. 부부는 즉시 나이로비 병원을 거쳐 다시 미국 병원으로 옮겨져 2년 동안이나 병실 신세를 졌다. 그 소식은 곧 전 세계에 알려졌고, 일부 언론에서는 ‘헤밍웨이, 아프리카에서 비행기사고로 사망하다’라는 뉴스가 보도되기도 하였고, 그것으로 헤밍웨이의 행동주의적 문학이 재평가되면서 이듬 해 노벨문학상 심사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되어 있다.
퇴원하고 잠시 쿠바로 돌아온 헤밍웨이는 그럼에도 다음 작품(투우를 소재로 한 소설)을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주위의 만류도 뿌리치고 다시 스페인으로 건너갔다. 아무리 강인한 정신력과 강건한 체력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그건 무리였다. 머리가 아프고 몸을 가누기 어려울 만큼 어지럼증이 병발하면서 사소한 일에도 신경이 곤두서는 노이로제 증세까지 겹쳤다.
그는 곧 스페인 여행을 중단하고 쿠바로 돌아오자마자 저택을 처분한 다음 아이다호 주의 케참이라는 곳으로 다시 주거를 옮겼다. 그러나 차도가 없어 미네소타 주 병원(메이요)에 입원하였더니, 혈압도 높고 당뇨 증세도 악화되어 있음을 알았다. 그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것이었다.
병원에서는 노이로제 치료에만 집중하여 수십 차례나 전기치료를 적용했다. 1961년의 일로, 그 때부터 헤밍웨이는 집필은커녕 일상생활도 여의치 않은 하루하루 무기미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가 내내 중얼거리는 말은 ‘이제는 써지지 않는다. 도무지 써지지 않는다’였다고 한다.
그 무렵 헤밍웨이는 줄곧 엽총의 방아쇠를 당겨 스스로 목숨을 끊는 환각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가족들이 헤밍웨이가 실제 창가에서 엽총을 만지작이고 있는 모습을 보기도 여러 번이었고, 병원으로 가던 비행기 문을 열고 뛰어내리려고까지 하여 큰 소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두어 달 후 퇴원하여 귀가할 때 메이요 부인은 비행기를 타는 대신 친구 자동차를 이용했다. 지난 번 비행기에서 내린 다음 아직 돌고 있는 프로펠러를 향해 달려가는 것을 간신히 말린 일도 있은 때문이었다.
아이다호 케참 자택까지 닷새가 걸렸다. 차가 달리는 동안 헤밍웨이는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집에 도착한 다음 피곤했을 법한데도 무척 유쾌해 보였다.
그 날 저녁 헤밍웨이 부부는 자동차를 몰아 준 친구 부부와 함께 시내 레스토랑에서 함께 식사를 했다. 그 자리에서 헤밍웨이는 지금까지 끊고 있던 알코올을 입에 댔다. 맥주가 아닌 포도주였는데, 거푸 석 잔을 마시고도 멀쩡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투우를 소재로 한 소설을 쓸 거야.”
그러나 그 소망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친구 부부는 돌아갔고, 헤밍웨이는 잘 잤다.
아침 늦게까지 메이요 여사는 아직도 2층 침실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닷새 동안의 자동차 여행에 너무 피곤했던 것이다.
그 순간 느닷없는 총소리가 들렸다. 총소리는 아래층에서 들렸다. 놀란 메이요 부인이 잠옷 바람으로 뛰어 내려가니 남편은 엽총이 걸린 벽 아래 바닥에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었다. 1961년 7월 2일 아침 7시 번경의 일이었다.
세기의 작가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로 노벨문학상을 받으면서, 그 이상의 소설을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떨쳐내지 못해 거기에서 탈출하는 방법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었다. 그 증거의 하나로, <노인과 바다>에 이어 출간한 장편소설 <해류 속의 섬들>이 평론가들에 의해 엄청난 혹평(酷評)을 받은 정신적 충격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덧붙이고 싶은 한 마디.
지난 해(2011년)는 작가 헤밍웨이가 별세한 지 꼭 50주년이 되는 해로, 사후 50년이 경과되면 저작권(著作權) 소멸되면서 원작료(原作料)를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는 관련 법에 따라 국내 여러 출판사들이 헤밍웨이 작품을 앞 다투어 출간하는 전쟁 아닌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 같은 출판사의 경쟁적인 출간은 그만큼 구매력을 증가시키면서 독자로 하여금 독서열을 부추기게 하는 긍정적 효과도 얻는다. 하지만 작가의 한 사람으로 필자는, 국내 출판사들의 그 같은 기회주의적 행태가 꼭 반갑지만은 않다. 그렇게 되면 작가들은 도대체 무슨 보람으로 천형(天刑)의 글쓰기를 업(業)으로 삼는단 말인가.
(다음 호는 다니엘 디포 저 <로빈슨 크루소의 표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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