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⑨ 고흥 소록도, 숨겨진 어업유산의 보고
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⑨ 고흥 소록도, 숨겨진 어업유산의 보고
  • 김준 박사
  • 승인 2018.11.08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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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고흥군 도양읍 소록리 소록도

 

[현대해양] 사회와 격리된 공간을 ‘섬’이라고 한다. 섬은 그 자체로 바닷물이나 강물로 둘러싸인 땅을 말한다. 고립이나 분리를 상징한다. 조선시대에 지배 권력에 저항한 역적이나 큰 죄를 지은 사람을 제주도, 흑산도, 울릉도 등 먼 섬으로 유배를 보냈다. 뿐만 아니라 사회와 격리시켜야 할 것을 섬으로 보내기도 했다. 대표적인 섬이 소록도다. 일제강점기에 나환자를 치료와 격리를 목적으로 소록도에 가두었다.

소록도는 녹동 앞에 있는 작은 섬이다. 녹도라고 불렸다. 녹도는 조선시대에는 중죄인의 유배지였다. 섬은 아니지만 섬이나 다름없이 중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갯벌과 바다로 둘러싸인 곳이다. 그곳은 수산자원의 보고인 득량만과 여자만 사이에 위치한 ‘고흥반도’이다. 그 끝자락에 소록도가 있다.


스스로 쌓은 성, 문화재가 되다

소록도가 나환자들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16년 소록도자혜원이 설립되면서였다. 그 후 1935년 ‘조선나예방령’이 공포되면서 유량, 걸식하는 나환자를 잡아들였다. 지금은 수십만 명의 여행객이 찾는 여행지로 바뀌었다. 물론 환자들이 있는 마을은 여전히 여행자들이 들어갈 수 없다.
일제강점기 민관기금과 환자 노동력을 강제동원해 감옥, 2세를 갖지 못하게 하는 단종시설 그리고 죽어서 가는 납골당도 지었다. 이런 건물 외에 작은 섬에 자혜의원을 비롯해 식량창고, 등대, 검시실 등 12개의 등록문화재가 있다.

아마도 섬은 물론 뭍에도 이렇게 많은 문화재가 집중되어 있는 곳은 없을 것이다. 모두 환자들이 벽돌을 찍고 가마에 구워 만든 붉은 벽돌로 지은 건물들이다. 검시실 안에 수호원장의 지시를 거역한 벌로 감금실에 갇혔다 풀려나면서 단종수술을 받은 환우의 시가 걸려 있다.

장래 손자를 보겠다던 어머니의 모습/내 수술대 위에서 가물거린다/정관을 차단하는 차가운 메스가 /내 국부에 닿을 때

여행객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중앙공원이다. 잘 정돈된 나무와 돌이 어우러진 아늑한 곳이다. 특히 이곳에 놓인 큰 돌들은 득량도나 완도 섬에서 배로 가져온 것들이다. 소록도 사람들은 그 돌을 ‘죽음의 돌’로 기억하고 있다. 너무 무거워 어깨에 맨 목도를 놓게 되면 채찍에 맞아 죽고, 놓지 않으면 깔려서 죽었기 때문이다.

‘죽음의 돌’에는 환자 시인 한하운이 쓴 시 ‘보리피리’가 새겨져 있다. 아이와 함께 온 여행객이 아들을 번쩍 안아 시비에 앉히고 사진을 찍는다. 바로 그 옆에는 일제강점기 원생을 강제노역과 죽음으로 내몰았던 수호원장의 동상이 세워졌던 곳이다. 일 년에 10만여 명이 찾는 섬은 이제 70만명이 다녀가는 관광지로 바뀌었다.

2016년 국립소록도병원 개원 100주년을 기념해 ‘한센병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한센인과 소록도 역사를 바로알고 질병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극복할 수 있는 박물관이다. 소록도의 사진과 자료, 환자들의 생활상과 강제노역의 실상을 확인할 수 있다. 손가락을 사용할 수 없어 만든 숟가락, 다리미, 단추끼우개 등 생활도구, 굴을 까는 조새, 김발 제작틀 등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만들었던 생업도구들이 있다. 그리고 소록도가 잃어버린 바다의 흔적들을 모아 ‘소록의 어장’이라는 기획전도 열고 있다.

▲ 1960년대 고기잡이를 하고 기념촬영을 한 사진이다. 독살이나 개막이를 하고 사진을 찍은 것 같다. 한 주민은 당시 잡은 큰 고기들은 모두 ‘상납’을 했다고 말했다(한센인박물관 제공)
▲ 1960년대 고기잡이를 하고 기념촬영을 한 사진이다. 독살이나 개막이를 하고 사진을 찍은 것 같다. 한 주민은 당시 잡은 큰 고기들은 모두 ‘상납’을 했다고 말했다(한센인박물관 제공)

바다를 기억하는 섬

바다는 소록도 사람들에게는 먹을 것을 제공해 주는 곳이지만, 병원은 그들이 도망치는 것을 막고 가두는 수단이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나 한센병을 불치의 감염병으로 인식하던 시절에는 더욱 그랬다. 그래서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바다관리가 엄격했다. ‘구라호’라는 배를 가지고 외지인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고, 한센인들이 탈출하는 것도 감시했다. 그 덕에 외지인들이 들어와 낙지잡고, 조개를 캐는 것도 막았다.

소록도 옛 지명을 보면 도장금(구북리), 물막금(동생리), 대밤금(신생리), 따순금, 흰둘금, 여시금, 띄밭금 등 유난히 ‘금’이 접미사로 많이 붙는다. 금은 바닷가 곶이 길게 뻗고 그 사이 후미지게 휘어진 곳이다. 이런 곳은 장벌이나 짝돌, 갯벌 등이 발달했다.

옛날 배를 접안하기 좋고, 바지락밭이나 김 양식이나 굴밭이 일찍부터 발달한 곳이다. 조차가 커서 돌을 쌓아 물길을 가로막아 물고기를 잡는 독살어업을 하기 좋고 그물로 막아 고기를 잡는 ‘개막이’를 하기도 좋은 곳이다. 일찍부터 어업의존도가 높았고, 마을어장이 발달했을 것이다. 조선총독부 자료를 보면, 국립나요양소가 설립되기 전 섬에 150호에 900명이 거주했다.

이들 이전 보상비로 농산물 보상액은 2만 6,000엔인데 비해 수산물은 어선어구 보상비를 제외하고 3만2,000엔에 이른다. 그만큼 어업비중이 컸다는 반증이다. 일제강점기 니시키 원장이 기관지 ‘애생’에 기고한 글에도 해안에 ‘해태 양식장’을 만들고, 가축사료로 ‘해초’를 사용하여 식량난을 해소하자는 글을 실었다. 실제 쌀은 물론 보리가 자취를 감추고 배급한 옥수수와 콩깨묵과 수수가 바닥나자 호박, 고구마를 심고 해초와 나무와 풀뿌리로 연명했다.

▲ 소록도15 구복리 독살, 구복리 앞 갯벌에는 모두 5개의 독살이 있다. 소록도에는 확인된 것만 19개의 독살이 있다. 흔적도 잘 남아 있다.
▲ 소록도15 구복리 독살, 구복리 앞 갯벌에는 모두 5개의 독살이 있다. 소록도에는 확인된 것만 19개의 독살이 있다. 흔적도 잘 남아 있다.

소록도의 바다

일제강점기에는 전시체제로 환자들에게 지급되어야 할 약과 먹을거리가 많이 부족했다. 국가에서 지급되는 급식과 부식에 의지해야 했지만 그 양과 질이 턱없이 부족했다.

1930년대 후반에는 총독부는 전남지방에 활동사진반을 파견해 중일전쟁 영화를 보여주고 백미를 절약하여 헌금을 내도록 하기도 했다.

▲ 소록도에 생긴 다리
▲ 소록도에 생긴 다리

국방헌금과 장병위문금을 헌납했다. 모두 갱생원에서 강제동원되어 일한 작업비로 마련한 것들이다. 소록도 사람들에게 배급되는 주식과 부식도 줄였다. 당시 ‘소록도갱생원’이 발행한 자료를 보면 젊은 2-30대 사망환자가 57%에 이른다. 과중한 노동과 부족한 영양 때문으로 해석된다.

그래서 소록도 사람들은 스스로 농사를 짓고 물고기도 잡았다. 텃밭도 일궈 채소도 가꾸고, 쌀농사를 짓기도 했다. 토끼와 닭과 돼지를 키워 돈을 마련하기도 했다. 가마니를 짜고 벽돌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해방 후 혼란한 상황에서 84인이 희생되는 안타까운 사건도 소록도 병원의 운영과 자치를 둘러싸고 발생했지만 폭발하는 계기는 부족한 식량이었다.

가을이 깊어가는 10월 소록도 갯벌에는 갯바위에서 통통하게 자란 고둥을 줍는 어머니, 소라를 줍는 아버지, 바다에서 통발을 건지는 어부의 손길까지. 겉으로 볼 때는 사슴섬의 바다와 갯벌은 여느 어촌과 다를 바 없다.

“독발이제라. 숭어는 고기 취급도 안했고. 농어, 방어, 문어, 감성돔이 들었으니까.”

“내가 아는 것만 해도 우리 섬에 독살이 열댓 개는 되었제.”

남재권 원생자치회장 이야기를 듣고 있던 소록도 최고의 어부 양상국은 ‘망둑어가 명태만 했어요’라며 한마디 거든다. 살이 오른 망둑어를 잡아 말려서 상에 올렸다. 남회장이 알려준 독살을 꼽아 보니 무려 19개에 이른다. 구북리 앞 갯벌에는 무려 5개의 독살이 있다. 나름 많은 섬을 다녔지만 한 섬에 이렇게 많은 독살이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잃어버린 소록도의 바다

지금 소록도 바다는 구북리든 서생리든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바다가 아니다. 어촌계가 없으니 면허나 허가를 낼 수 없다. 바다와 갯벌이 있고, 많은 독살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지만 섬에 사는 소록도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바다가 아니다. 그 사이 외지사람들이 야금야금 양식장을 설치하며 들어왔다.

▲ 소록도 갯벌
▲ 소록도 갯벌

다리가 놓이면서 무시로 들어와 갯벌에서 낙지도 파가고 바지락도 캐간다. 뿐만 아니라 양식시설을 보관하는 바지선도 섬 주변에 가득하다. 바람이나 파도가 칠 때면 해안으로 밀려와 방치되기도 한다. 가두리에서 버린 것인지 죽은 물고기들이 마을 앞으로 밀려와 악취가 나는 것도 부지기다.

소록도는 전체가 병원이며 한센인들의 생활공간이다. 바다가 있어야 섬이듯, 소록도는 섬만 아니라 바다까지 관리하고 보전되어야 한다. 보기 드문 해송숲과 빼어난 해안 경관을 지킨 것도 따지고 보면 그 섬에 사는 주민들 공덕이다. 소록도 섬에 있는 문화재들마다 아픈 사연을 갖고 있는 것들이다.

여기에 반드시 보태져야 할 것이 있다. 바지락을 캐고 해초를 뜯고 물고기를 잡았던 갯벌과 바다, 그 흔적이 잘 남아있는 독살이다. 특히 아직도 잘 남아 있는 독살은 다른 여느 어촌의 독살과 다른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어업유산으로 보전되고 지켜져야 한다. 더 나아가 야금야금 주인 없는 바다라며 잠식해 오는 양식장과 시설물들을 일정한 거리 밖으로 옮겨야 한다.

소록도는 전체가 병원이자 주민들의 생활공간이다. 이제는 섬 주민으로 그들의 삶의 터전을 존중해줘야 한다. 더 나아가 바다와 갯벌을 소록도와 함께 오롯이 지키고 보전하는 방안이 모색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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