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미래비전과 한반도의 운명
해양미래비전과 한반도의 운명
  • 주강현 국립해양박물관장
  • 승인 2018.11.08 09: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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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중심사관에서 해양중심사관으로의 전환
▲ 주강현 국립해양박물관장
▲ 주강현 국립해양박물관장

[현대해양] 해양사는 있어도 ‘육지사’란 말은 없다. 인류사는 어차피 육지중심이므로 구태여 ‘육지사’란 말이 필요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지중심사관을 조금만 뒤집어보면 역사는 전혀 달리 보인다. 지구의 7할 이상이 바다라는 수치를 들이밀 것도 없다. 고대 그리스의 에게문명은 두말할 것 없이 바다의 역사이다. 15, 16세기
대항해시대에 펼쳐진 거대한 드라마는 인류사를 송두리째 바꾸었다. 600년전 정화의 남해대원정은 중국사를 전혀 다르게 서술할 수 있게 한다.

한국사는? 물론 육지 중심이다.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은 ‘자본주의와 물질문명’에서, 세계를 다루면서 세계가 어쩌면 이토록 기존의 도식적인 구분법만으로 이루어지지않았음을 알고 스스로 놀랬다. 그의 ‘필립2세시대의 지중해와 지중해세계‘에 비견되는 역사서술이 삼면이 바다인 한반도에서는 아직 출현할 기미가 보이지않고 있다.


변방 바다의 중요성

2018년은 메이지유산 150주년되는 역사적인 해다. 1870년대, 일본 큐수 최남단의 변방 중의 변방인 가고시마의 사쓰마번(薩摩藩)이나 시모노세키 주변 죠슈번(長州藩) 사람들은 누구나 한반도를 정벌하러 가야한다고 믿고들 있었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주역으로 중앙정부에 진출하였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미련없이 낙향하자 가뜩이나 불평불만에 그득차있던 사무라이(士族)들이 그의 주위를 에워쌌다. 막부시절에는 나름대로 군주에게만 충성하면 밥 먹는데는 지장이 없었던 하급무사들에게 남은 것은 잘 나가는 칼자루 하나 뿐이었다. 마침내 불꽃이 타올랐다. 일본 근세사의 마지막 내전인 그 반란을 세인들은 세이난전쟁(西南戰爭)이라 불렀다. 1877년의 전쟁으로부터 한 120여년 쯤 뒤에 조금은 생뚱맞게 할리우드영화로 만들어졌으니 ‘라스트 사무라이’가 그것이다.

가고시마는 분명히 변방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한판 붙고서도 죽지 않고 버텼던 ‘고슴도치’ 같은, 작지만 강력한 사쓰마는 일찍이 독립왕국 류큐를 병합하고 해양제국건설에 몰두하였다. 사쓰마 군주들은 누구보다 재빨리 문명개화에 나섰으니 이미 19세기에 바쿠후도 모르게 영국유학생을 파견한다. 변방에서 최고의 선진적인 동력이 가동되고 있었다.

역사는 말해준다. 변방을 주목하라! 제국과 식민이 교차하는 변방의 바닷가로 가장 선진적인 사상·종교·과학기술, 심지어 전염병까지 들어왔으니 함부로 중앙과 변방을 차별 할일이 못된다. 베이징에서 해금정책으로 강력하게 바다를 통제하는 동안, 광쩌우 근역의 중국남부 바닷가에서는 해적들이 번성하여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었다. 포루투갈과 네덜란드 배들이 밀어닥친 곳도 두말할 것없이 바닷가였다.

홍콩과 마카오, 심지어 한반도의 부산 왜관과 진해, 인천 같은 곳은 외국의 문물과 제국의 침략이 들어오는 최전선이기도 했다. 변방은 문명과 문명이 교차하는 열려진 광장이었고 바닷길은 당대의 ‘하이웨이’였다.

 

‘안에서 바깥보기’와 ‘밖에서 들여다보기’

지난 19, 20세기에 한반도에 치명타를 먹인 열강들은 모두 해양세력들이었다. 미국과 일본이 대표격이며, 프랑스·영국·포루투갈 등 여러 나라들이 직간접적으로 계류되어있다. 세상의 모든 사태관측에는 안팎의 논리가 있는 법이다.

그동안 우리는 지나칠 정도로 안에서 바깥을 바라보는 시각에만 익숙해져있다. 그러나 아예 시각을 바깥으로 돌려서 바다 건너 타자들을 주체로 인식하고 반대편에서 바라본다면 한반도 역사의 물마루도 훨씬 명료하게 보이지 않을까.

초등학생도 다 아는 하멜표류기를 읽는 올바른 독해법은 ‘암스테르담발(發)’이 아니라 ‘나가사키 데지마(出島)발’이어야한다. 암스테르담에서 출발하였음은 분명하지만, 목적지는 동인도회사의 바타이유와 나가사키 데지마상관이었다. 수많은 배들이 당시 네덜란드가 건설한 포모사(타이완)을 거쳐서 나가사키로 나다녔으니 표류는 확률상 필연적이었다. 한반도를 탈출한 하멜이 찾아간 곳도 데지마였으며, 거기서 고국으로 돌아간다.

일찍이 사비에르(Francisco Javiar)신부가 가고시마 해변에 도착한 이래로 천주교 포교가 이루어진다. 임진왜란 와중에 세스뻬데스신부가 웅천(진해)왜성에 나타난다. 그는 1년여를 머물면서 ‘조선에서 보낸 편지’를 남긴다. 기독교 포교가 문제가 되자 포루투갈 대신에 네덜란드가 에도 바쿠후(江戶幕府)에 의해 선택되고 드디어 나가사키에 데지마가 열린다. 서구로 열린 창을 통하여 난학(蘭學)이 번성하고 일본은 근대를 준비하는 기회를 얻는다. 그의 한반도 표착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와같이 표착지점인 제주도가 아니라 데지마로부터 하멜을 다시 바라보는 독해법, 즉 밖에서 안으로 들여다보는 전술이 당대를 이해하는 올바른 길이 될 수있다.

돌이켜보면, 15-16세기 대항해시대의 파장이 한반도에까지 강력하게 미치고 있었다. 히라도(平戶)에 처음 나타난 남만인(南蠻人), 다네가시마(種子島)에 전해진 총,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출병에 동원된 철포대(鐵砲隊), 임진왜란 초기에 조총에 녹아나던 조선병사들.......이처럼 서양에서 밀려온 대항해의 파장이 한반도까지 엄습하였다. 다만 안타깝게도 우리만 그 실체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였다.

안에서는 보이질 않는 세계사의 파장이 세계사란 총체적 안목에서는 너무도 쉽게 들여다보인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사를 새롭게 읽는 법, 이는 바다를 제대로 읽어야지만 이해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일본과 미국, 그밖의 해양세력

19세기에 미국서부로 몰려온 값싼 중국인 쿠리(苦力)들이 투입되어 수도없이 태평양으로 떨어져 죽으면서 만든 샌프란시스코 금문교에 전망대가 있다. 따블백을 옆에 세워두고 한시라도 출진태세를 갖춘 채 태평양을 향하여 서있는 미해군병사의 자태가 예사롭지않다.

지난 19-20세기에 태평양을 무대로 펼쳐진 가장 괄목할 만한 세계사적 정황은 해양세력 미국의 진출이다. 태평양제도에 가면 미·일의 힘겨루기가 겹쳐서 나타난다. 태평양전쟁도 아시아로 진출하던 해양세력 미국과 태평양으로 진출하던 일본의 필연적 충돌에 지나지않는다. ‘고래들의 전쟁’에 떠밀려 조선인들은 징병, 징용, 정신대 등의 이름으로 남양군도 하늘 아래에서 이름도 없이 죽어갔다. 미·일의 태평양 패권은 스페인·포루투갈·영국·화란 등을 젖힌 승리의 결과물이었다. 오늘날 한반도에 미국이 가장 큰 영향력을 행세하고,역으로 많은 아시아 이민자들이 미국 태평양가로 진출하였음은 해양사적으로 의미심장하다.

독도 문제가 풀리지않는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이 일본의 독도지배를 ‘마음속으로나마’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동경 맥아더사령부의 시볼트(William J.Sebald)란 자는 독도를 일본에게 붙이려고 갖은 애를 썼다. 독도문제는 한·일문제가 아니라 한·미·일문제임이 쉽게 드러난다.

육지사 중심의 한국인 사고에서 해양사 중심으로 바꾸어나가는 일은 쉽지않을뿐더러 일조일석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해양의식 제고는 단기간에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해양문화가 중요하다. 해양문화를 통하여 해양의식을 제고할수 있기 때문이다. 국립해양박물관의 존재 의의와 미래적 전망도 이와같은 해양문화를 통한 해양력 배가에 있을 것이다. 바다중심의 세계관을 통하여 미래를 새롭게 설계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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