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현의 양망일기 ⑧〉음식의 추억
〈하동현의 양망일기 ⑧〉음식의 추억
  • 하동현 작가
  • 승인 2018.10.03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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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해양] 추석이란다. 차례상을 준비하다 불현듯 뱃놈 시절을 함께했던 먹거리에 대한 기억들을 들춰내 본다.

‘전기밥솥 속에서 밥이 익어가는 그 평화롭고 비린 향기에나는 한 평생 목이 메었다. ……. 밥에는 대책이 없다. 한 두끼를 먹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죽는 날 까지 때가되면 반드시 먹어야한다. 이것이 밥이다. 이것이 진저리나는 밥이라는 것이다.’ -김훈의‘라면을 끓이며’ 중에서

‘그 음식들’을 먹거나 볼 때는 ‘그 시절들’과 ‘그때의 심상(心想)들’이 떠오른다. 바다와 배, 낯선 곳에 떨어뜨려진 그멜랑꼴리(Melancholy)들이.

다친 선원을 헬기로 후송하거나, 사망한 선원을 나무로 짠관에 염을 해 누이고도 억장이 무너지듯 슬퍼했다가 결국 살아남은 자들은 먹어야했다. 아프고 시린 순간에도 짐승과 다를 바 없이 먹고 배설해야 한다는 명제가 나는 슬펐다. 그리고 반드시 뒤 따르던 몇 잔 술과 담배연기, 커피 같은 것들.


커피와 라면

80년대 초, 첫 승선 때에는 시골 무지렁이 출신들이 태반인 선원들이 대부분 커피를 무서워(?)했다. ‘담배꽁초 삶은 물’ 같다는 강력한 거부의 표현부터, 마시면 배가 아프고 ‘대가리(기억력)’가 나빠진다는 출처불명의 속설까지 붙어 다녔다. 야식 때 딸기 잼을 바른 식빵과 커피가 나오면 나이 든 선원들은 혀를 끌끌 차며 생선 국물에 적신 식은 밥한 덩이가 백번 낫다는 건의를 했다.

뱃놈 노릇 몇 년이 흐르자 커피가 없으면 뭔가 허전할 정도가 되었다. 그물을 투하한 후 어군탐지기에 눈길을 붙들어 매고 줄담배에 커피를 한 대접씩 마셔댔다.

십 년 정도 지나서는 야간 조업 때 커피가 없으면 선원들이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커피광고사에 길이 남을 배우 안성기의 폼 나는 장면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하늘색 플라스틱 ‘다라이’에 커피 반 설탕 반의반에다 ‘프림’를 퍼부어 주걱으로 저어댄, 막걸리같이 걸쭉한 커피를 국자로 퍼 마셨다.

피로가 풀리고 졸음을 쫓으며 힘이 날 것 같은, 이상한 자기 암시를 담은 마약 같은 음료가 되어버린 것이다.

커피를 병째로 신문지에 쏟아 부어 한약 첩을 접듯 고무밴드로 묶은 종이봉지와 말린 오징어는 가난한 선원들의 훌륭한 귀국 선물이었다.

라면은 소울(soul)푸드에 가깝다. 식사 때 남은 채소나 소시지 같은 것들을 다 때려 넣고, 100봉지를 투하해 끓여낸 부대찌개 사촌 쯤 되는 솥단지 라면은 야식 때 40여명이 먹기에 모자랐다.

야간작업에 제외된 취침조 선원들까지 그라면 한 대접을 기어코 먹고 잠들기 위해 식당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졸면서 조리장의 ‘됐다. 건져 먹어 봐라’ 라는 외침을 기다렸다.

배를 방문한 현지인들에게 선물하면 다음날 어김없이 그들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삶아 건져낸 면발위에 스프를 조금씩 뿌려먹으니 ‘베리 굿’ 이었다는 칭찬성 품평이 대부분이었다.

회식비를 절감하는 비급 하나를 나중에 터득했다. 남미어장에서 반 년 넘게 조업하고 입항했을 때다. 장기 조업에 지친 선원들을 위로한답시고 스테이크 레스토랑에서 한 잔 낸다며 불러 모았다. 굶주린 이리떼 같은 왕성한 식욕들이 어디로 갔는지 모두 칼질이 건성이라 예상금액을 훨씬 못 미치는 금액으로 내 돈이 굳어버렸다. 이 인간들이 왜 이러지, 의아해하는 나에게 항해사가 들려준 말이다.

“모두 씻고 외출하려는데 배에 남을 당직조들이 라면을 끓이는 거라예. 한 사람 두 사람 한 젓가락씩만 거든다는 게에라 모르겠다, 두 박스 끓여서 한 그릇 씩 무뿌맀다 아입니꺼…….”

선장이 한 턱 낸다는 외국 레스토랑의 산해진미(?)를 마다하고 라면 냄새의 유혹에 모두 주체를 못하고 무너진 결과였다.


고추장, 고춧가루 그리고 호빵

운반선이나 컨테이너로 보급품이 도착하면 조리장은 제일먼저 고추장과 고춧가루를 챙겼다. 방문하는 나라마다 아마 그 국민전체가 소비할 고춧가루를 우리는 하루에 먹어조졌을 것이다.

고추장 칠갑을 하고 맨손으로 빨래하듯 주물러 대는 비빔국수는 고향과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음식이었다. 몇 국자씩 고추장과 고춧가루를 퍼 넣고, 그날 잡은 어종으로 물회를 뜨는 날은 항상 소주를 한 박스씩 내려 보냈다.

오늘은술 한 잔으로 목을 축일 수 있겠구나하는, 들뜬 기다림을 선사하던 그 시뻘건 빛깔의 음식.

다섯 개 들이로 포장된 냉동호빵이 몇 상자인지 도착한다. 낱개로 쳐서 천개 정도였지 싶다. 하룻밤 야식에 내놓으니한 사람에게 몇 개씩을 줘야하나 계산에 문제가 생겼다. 두개 이상 먹으면 속이 달아 부대낄 것이고 양으로 치면 그것 먹고는 힘을 쓸 수 없다는 딜레마였다. 야식 메뉴에서 물러나 새참 거리용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호빵을 앞에 두고, 나이 든 선원 하나가 평생 ‘새끼들’에게 이런 걸 못 먹여 봤다며 얼려뒀다가 귀국 때 가져갔으면 좋겠다는 가슴 한구석이 아련한 농담을 했다.

유통기한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한국에서 실을 때야 넉넉한 유효기간이었겠지만 몇 달이 지나 배에 도착한 결과였다. ‘노 프로브럼’이다. 급속 냉동 시켜두면 2년 정도는 너끈히보관 가능 했으므로.

하지만 관리하기도 귀찮아 한 상자만 남겨두고 N분의 1로 나눠 줘버렸다. 냉동실에 이름을 써서 보관했다가 조리장에게 부탁해 밥 때마다 솥에 얹어 쪄먹든지 말든지 하라고. 후식삼아 한 두 개씩 꺼내먹더니 며칠도 못가 호빵은 거덜이 났다.

여분으로 남겨 뒀던 것은 화장실 청소나 그물 뒷정리 같이 궂은일을 떠맡은 젊은 선원들을 달래 줄 훌륭한 당근이었다. 그게 먹고 싶어 브릿지 청소를 자청해 올라와 내 눈치를 살피던 어린 선원이 생각난다.

김밥과 비빔밥

몽둥이 김밥. 입항해서 단체 야유회라도 있는 날이면 김밥을 만다. 계란 지단과 단무지에 우엉조림, 시금치, 어묵 등이 망라된 컬러풀한 ‘앙꼬’는 언감생심이다. 그냥 김치를 길게찢어 김 위에 펼친 밥에 늘어뜨리고 오로지 그것들로만 둘러싼 김밥이다. 주방요원들 만으로 시간이 많이 걸려 선원들이 둘러 앉아 반은 먹어 조지고 반은 준비하는 모양새다.

오랜만의 나들이에 닭다리 구이나 생선 살 튀김 같은 사이드 메뉴가 훌륭했지만, ‘밥심’과 김치로 산다는 한국 선원들이 곡기가 없으면 안 되겠기에 곁들여지는 주객이 전도된 메뉴다.

워낙 단단하게 마는 바람에 검은색 ‘다이너마이트’를 연상시키는 비주얼이다. 썰지도 않고 이빨로 끊어 먹어야 하는데 아차하면 김치줄기가 통째로 빠져나와 나머지는 맹탕이 된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우리는 그걸 ‘말 거시기(원발음은 표기하기가 좀 그렇다)김밥’이라 불렀다.

파도가 몰아쳐 국솥이 뒤집힐 지경이 되면 국물 있는 식사가 어려워 비빔밥을 차려낸다. 양동이에 잘게 썬 김치와 이리저리 남은 채소잔반들을 쓸어 담고 고추장을 투하한 뒤에 참기름으로 맛을 낸다. 이 또한 약점이 있었으니 고루 섞이지 않아 채소 따로 밥 따로가 되기 십상이다.

그럴 때면 조리장의 손을 빌리지 않고 모두 양동이에 다시 털어 넣고 재차 ‘삽질’을 해대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는 냉동실에 반쯤 얼려둔 물을 한 대접씩 들이킨다. 바닷물을 엔진으로 가열해 수증기를 모으는 조수기 원리로 생산한 물이다.

트림 한 번한 후에 담배를 피워 물고 다시 물바다인 갑판이나 고기를 담기위해 처리실로 달려 나간다.

 

쌀가루 케잌과 말고기 햄버거

당시 어로계약이 2년이었으니 전 선원 생일이 두 번 씩 돌아가면 100번 가까이 생일을 치러야했다. 안에는 밥덩이를 쌓고 바깥에는 쌀가루를 나무해머로 떡메삼아 두들겨 반죽상태로 그럴듯한 엉터리 케잌을 만든다. 떡케잌의 원조쯤 될 것이다. 데커레이션으로 대파 하나를 이리저리 다듬어 꽂아두고 ‘해피 버스테이’를 불러준다.

노래가 끝나고 식칼로 썰어 꿀에 찍어 먹으면 그런대로 생일잔치 흉내는 낸다. 사고방지를 위해 술에 엄격했던 배들도 있었지만, 술꾼 선장을 둔 우리 배 선원들은 누군가 생일이 닥치면 제 일처럼 기뻐했다.

생일잔치를 핑계 삼아 술 한 박스가 덤으로 따라내려가 간단한 회식으로 이어지기 마련이었으므로. 우연히 이탈리아 운반선을 만나 오징어와 잡어들을 몇 박스 건네줬더니 답례랍시고 냉동 말고기를 한 상자 보내줬다. 생소했다. 거무튀튀한 때깔에 거부감이 있을까봐 선원들에게 말하지 않고 조리장에게 알아서 처리 하라고 내려줬다.

고심하던 그는 함박스테이크처럼 다져 소스를 끼얹고 ‘거시기 빵’이라 부르는 단단하고 길쭉한 바케트에 끼워 햄버거 ‘비스무리’한 음식을 만들어냈다. 캔 콜라 하나씩을 보태 하역작업 때 돌리자 좀 질긴 것 같다는 짧은 멘트 외에 는 한 끼 새참으로 무리가 없었다.


스파게티

운반선 탈 때 스케줄이 꼬여 아르헨티나 시골 부두에서 발이 묶였다. 평생을 괴롭히는, 학교 때 축구시합에 부러뜨린이를 의치로 ‘땜방’ 처리하고 나선 육 개월 걸리는 뱃길이었다. 질긴 것을 씹기 어려운 차에 배에 오를 때까지 스파게티와 ‘뇨끼(치즈범벅 수제비 같은 음식)’만 먹고 지냈다.

그때 스파게티의 가지 수가 그리 다양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레스토랑 주방장에게 한국 담배를 쥐어주고 절대로 맛에 대해서는 불평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달았다. 내 요구대로 면의 굵기, 곁들이는 고명이나 소스의 종류에 따라 천차만별의 면요리가 탄생했다. 그는 좋은 시식상대를 만나 여러가지 실험을 해봤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고였다. 설명을 잘했던지 한국식 칼국수 5부 능선까지 가는 질척한 스파게티도 맛 볼 수 있었다.

기약도 없이 올라야 할 배를 기다리면서 혼자 와인을 곁들이며 포크로 면발을 건져 올리는 청승맞은 꼴이었다. “제기랄, 이탈리안 스파게티 같구먼.” 나중에 운반선에서 계기가 고장 나거나 일이 매끄럽게 진행이 안 될 때 욕설을 섞으며 그리스 선장과 내가 단 둘이 비밀스레 암호처럼 사용했던 말이다. 호텔식 정규요리가 아닌꿀꿀이 죽 같던 스파게티만 일주일 넘게 먹었던 나는 그 말에 공감하며 혼자 웃었다.

 

3 “모든 슬픔은 잊히는 법이고, 남은 것은 오로지 먹는 일뿐이다.”

‘돈키호테’의 문호 ‘세르반테스’가 남긴 말이다. 어릴 적 옆집 구멍가게 할머니도 말씀하셨다. 무슨 운동 시합에 졌던지 눈물을 글썽대며 귀가하는 내게 눈깔사탕 하나를 쥐어주셨다.

“야야. 와 그라노?골 싸매지 말거라. 뭔 일인지 몰라도 밥잘 챙기묵고 사탕하나 빨고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다 괜찮아 질 끼다.”

행복하든 불행하든 우리는 반드시 먹어야 하고, 모든 것은 지나가기 마련이라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내게 들려주신 것이다.

어머니의 장례식, 오체투지로 온몸을 던져 비통함을 표현하시던 우리 이모님들께서도 식사시간이면 어김없이 세수를 하고 엄숙하게 밥을 드셨다.

“장조카. 밥 먹어. 먹어야 또 힘내서 울 것 아녀…….”

그 때 우리 젊은 날, 여행도 아니었고 유학도 아니었다. 즐기기 위한 ‘음식’이 아니라 살기 위해 꾸역거렸던, 파도 속의 노동을 위해 삼켜야 했던 ‘그 먹거리’들을 생각하면 힘들고 고단했던 ‘그 시절들’이 함께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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