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 2012’ 축구와 경제
‘유로 2012’ 축구와 경제
  • 이준후/산업은행 압구정지점장
  • 승인 2012.07.03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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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3년 6월, 멕시코에서 세계청소년 축구대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한국 청소년축구대표팀은 전대미문의 기록에 도전하고 있었습니다. 준준결승전, 상대는 축구강국 우루과이였습니다. 사실 이 축구대회에 국내에서는 별로 관심과 기대가 없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예선에서 탈락했기 때문입니다. 아시아 동부지역예선에서 3위를 기록해 탈락했는데, 출전권을 확보한 북한이 심판 구타사건으로 2년간 국제대회 출전정지 처분을 받는 바람에 최종예선에 진출해 출전권을 겨우 확보했던 것입니다.

 우루과이와 일전에 들어간 한국은 후반 9분 신연호가 선제골을 넣어 기선을 제압합니다. 이윽고 동점골을 내줘 연장전, 연장전반 14분 신연호가 다시 천금의 결승골을 터뜨려 당당 4강에 입성합니다. 한국 축구역사상 세계대회 처음으로 4강에 든 것이죠. 중계 아나운서는 흥분했고 전국은 갑자기 열광했습니다. 외신들은 빨간 유니폼을 입고 벌떼처럼 공을 향해 덤벼드는 한국팀을 ‘붉은 악마’라 부르며 격찬했습니다.

 그해 6월의 햇살도 예년처럼 무척이나 뜨거웠습니다. 세계청소년축구 4강 소식은 무더위와 그에 따른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려버린 청량제였습니다. 최종 성적은 브라질 1위, 아르헨티나 2위, 폴란드 3위, 대한민국 4위였습니다.

 흥분이 가시면서 축구 4강에 경제이야기가 덧붙여 나돌았습니다. 당시 외채(外債) 순위 1∼4위가 브라질, 아르헨티나, 멕시코, 한국이었습니다. 주최국 멕시코가 가세한 ‘4강 빚잔치’로 표현되었습니다. 축구 잘하는 나라, 축구에 관심이 많은 나라는 외채가 많은 나라라는 비아냥이 떠돌았습니다. 이후 한국축구는 비약적인 발전을 합니다. 월드컵을 유치했고 외국인 감독을 모셔와 그예 2002년에는 월드컵 4강에 오르는 등 승승장구합니다. 2010년 6월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 진출, 조별리그 2승 1패의 성적을 기록하여 처음으로 원정 월드컵 16강에 진출합니다.

 예선을 통과한 한국은 본선에 진출하여 B조에서 그리스, 나이지리아, 아르헨티나와 만났습니다. 그런데 또 묘하게 B조 모두가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았거나 그 직전까지 이른 나라들이었습니다. 금년 2012년 6월, 전 세계 축구팬을 광란에 빠뜨리고 있는 ‘유로 2012’ 축구대회가 한창입니다. 유럽축구연맹 주관으로 4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유럽의 축구국가대항전입니다. 유럽에서는 월드컵보다 더 인기가 좋다고 합니다.

 최근 8강 진출국이 가려졌습니다. 그런데 신문 경제면에서 익숙해진 이름들이 보입니다. 1년 전 IMF 구제금융을 받은 포르투갈, 구제금융 재협상을 기다리는 그리스, 구제금융 신청 초읽기에 들어간 스페인, 그다음 순서로 꼽히는 이탈리아. 모두 유럽 재정위기의 주범으로 타국의 따가운 눈총을 받는 국가들입니다.

 그리스와 스페인, 유로존 위기의 핵심 당사자인 두 국가의 상황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는 금융시장 붕괴와 유로화 탈퇴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스페인은 추가 구제금융을 신청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전망이 나옵니다. 두 나라의 냉혹한 현실을 유일하게 위로해 주는 게 축구입니다.

 그중에서도 그리스의 분투는 빛이 납니다. 8강행 관문에서 전력이 앞선 러시아를 1-0으로 꺾었습니다. 수도 아테네 도심은 감격의 도가니가 되었습니다. 그리스팀 주장은 경기 후 “국가의 위기가 자극제가 됐다.”고 했습니다. 이해가 됩니다.

 그리스의 8강 상대는 독일입니다. 독일은 그리스인들에겐 가혹한 구제금융 조건을 강요하는 나라입니다. 그리스는 노골적인 적대감을 보이고 능력이상의 전의(戰意)를 나타냅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국치(國恥)의 울분으로 ‘IMF 점령군’을 접했던 우리나라를 떠올리면 알 만합니다.그리스와 스페인 언론은 자국 대표팀의 경기 결과와 일정, 선수의 동정 등을 연일 자세히 전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죠. 그리스는 ‘유로 2004’, 스페인은 ‘유로 2008’ 우승국입니다.

 물론 ‘유로 2012’ 우승컵이 실업률을 낮춰 줄 순 없습니다. 구제금융을 없던 일로 해 주지도 못합니다. 스페인 대표팀 감독은 “우리가 좋은 성적을 거둔다고 해서 경제위기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고 꼬집습니다. 지나친 희망과 기대가 더 큰 절망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닙니다. 심리적인 효과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와 스페인이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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