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⑦ 다산도 반한 음식, 목리장어
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⑦ 다산도 반한 음식, 목리장어
  • 김준 작가
  • 승인 2018.09.10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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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군 강진읍 목리

[현대해양] 앞으로 우리나라를 소개할 때,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뚜렷한’이라는 수식어는 빼야 할 것 같다. 절기는 가을인데 날씨는 여름이다. 자연스레 가을이 짧아질 것 같다. 봄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이러다 여름과 겨울으로 나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다. 덩달아 죽어나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복달임으로 뭍에서는 닭이 수난이요, 바다에서는 애꿎은 장어가 편치 않다.

▲ 목리교 아래 탐진강 전경

무더운 여름에 고향을 찾는 이유?

“집이 광준데 일 년에 몇 차례오지라. 여름철에는 더 오지라.” 말복을 앞두고 탐진강에 장어와 동고동락을 해온 목리 장어집에서 만난 손님이 자주 오느냐는 말에 탐진강을 바라보며 한 말이다. 그들은 강진이 고향이다. 강진을 떠났지만 무더운 여름이면 이곳을 찾는 이유는 오직 장어 때문이다.

지금은 양식장어로 음식을 만들고, 자연산을 원하면 미리 어민에게 주문을 했다 내놓는다. 물론 이때도 손님이 직접 어민에게 사와야 한다. 너무 비싸니 손님이 직접 살 수 있도록 연결만 시켜주고 가져오면 원하는 조리를 해 준다.

힘들고 지치면 생각나는 것이 고향이다.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고향음식이다. 몸과 마음은 따로 놀지 않는다. 마음이 힘들면 몸이 축나고, 몸이 힘들면 마음도 무너진다. 몸이든 마음이든 힘들고 지친 것을 살피고 북돋아 주는 것이 고향음식이다. 어머니가 차려주신 밥상이다. 어려서 고향에서 먹든 음식이다.

지금처럼 가공식품이 식탁에 오르지 않았고, GMO와 MSG가 활개를 치지 않았을 때니 식재료는 자연이 주고, 상차림은 어머니가 했다. 어머니는 자연의 맛을 연출하는 예술가였다. 어머니 손맛도 자연이지만 식재료도 자연이었다. 부부가 광주에도 많은 장어집을 두고 굳이 목리까지 와서 장어를 먹는 이유일 것이다.


목리 장어를 아시나요

목리는 강진읍에서 속하며, 강진군에서도 마을세가 큰 마을이다. 탐진강이 장흥을 거쳐 강진읍으로 이르는 길목에서 영포, 남포와 함께 수문 역할을 하고 있다. 괴동, 만드라미, 초지 등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해방 전까지 목리교 근처에 일본인이 운영하는 장어 통조림 공장이 있었다. 강진은 물론 완도와 해남 등 인근에서 잡은 장어를 일본을 통해미국으로 수출하기도 했다.

탐진강은 유치면과 장동면에서 시작되어 부산면과 장흥읍을 거쳐 강진을 지나 총 50여㎞를 달려 완도가 자리한 남해로 흐른다. 전남에서는 영산강, 섬진강과 함께 풍요로운 곡식과 다양한 바다생물을 주는 모천 역할을 했다. 영산강이 하구언으로 막혔지만 섬진강과 탐진강은 강과 바다가소통하는 탓이 서남해 바다가 그나마 다양한 생물이 서식할 수 있었다.

섬진강이 은어를 품었다면, 탐진강은 장어다. 은어도 그렇지만 장어 역시 강과 바다가 만나는 어느 곳에서는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은어 역시 섬진강에서 힘들게 머물고 있고, 장어도 탐진강 하구 ‘도암만’(주민들은 강진만이라 함)을 어렵게 지키고 있다.

목리장어집을 운영하는 안주인이 시집을 와보니 옛날 다리 아래서 시어머니가 장어집을 하고 있었다. 시어머니로부터 ‘맞은편에서 일본인들이 맛있는 냄새를 풍기며 장어를 구워 먹는 것을 보고 시작했다’고 들었다. 도암만은 물론이고 일대에서 잡은 장어들은 모두 목리로 들어왔다. 장어 가공공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본인들이 장어를 좋아했기에 목리를 통해서 강진은 물론 광주나 인근 지역으로 유통되었다. 그래서 나주영산강 구진포장어나 고창 인천강 풍천장어처럼, 탐진강 목리장어도 널리 알려졌다. 목리장어집의 역사는 1950년대 중반부터라고 한다.

▲ 목리 장어


다산도 장어맛을 보았겠지

장어가 오르고 내리는 길목에서 다산은 유배생활을 했다.

이들을 따라 오르내리며 고기잡이를 하는 어민들을 숱하게 만났으리라. 그가 쓴 ‘탐진어가’가 이를 잘 말해준다. 그 첫대목에 장어, 뱀장어 속칭 민물장어가 나온다.

桂浪春水足鰻鰻
橕取弓船漾碧漪
高鳥風高齊出港
馬兒風緊足歸時

당시에도 주민들은 봄이면 뱀장어를 잡았던 모양이다. 특히 높새바람이 부는 물때에 나갔다가 마파람이 부는 물때에 들어왔다. 바람과 노를 저어가는 배였기에 바람을 이용한 것도 있지만 장어가 오가는 생태도 파악했던 것 같다. 그의 형도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자산어보’에 장어 이야기를 기록했다.

‘모양은 뱀과 같으며 크기는 짧고 빛깔은 거무스름하다. 땅에서도 잘 움직인다. 뱀처럼 머리를 자르지 않으면 죽지 않는다. 맛이 달콤하며 사람 몸에 이롭다. 오랫동안 설사를 하는 사람은 이것을 죽을 끓여 먹으면 이내 낫는다.’

뱀장어는 갯장어, 붕장어 등과 함께 경골어류 뱀장어목에 속하는 어류이다. 이들 중 강에서 자라서 바다로 나가 산란을 하고 다시 민물로 돌아오는 장어는 뱀장어뿐이다. 그래서 민물장어라고도 한다. 강에서 충분히 자란 뱀장어는 반년에 걸쳐 태평양 깊은 바다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이동한다. 그리고 알을 낳고 최후를 맞는다.

연어와 다르게 바다에 산란을 하고, 강에서 자란다. 부화한 새끼는 아주 작은 댓잎모양이다. 그래서 ‘댓잎뱀장어’라고 부른다. 이 뱀장어는 어미와 반대로 1년에 걸쳐 약 3,000Km를 이동해 어머니가 머물렀던 강으로 여행을 한다. 강어귀에 이르면 ‘실뱀장어’로 변한다. 기수역에서 실뱀장어를 포획해서 양만장에 키워 장어요리로 내놓는다.

실뱀장어가 많이 잡히는 곳은 영산강 하구, 금강하구, 동진강과 만경강 하구였다. 하지만 이들 강은 모두 막혔다. 대신 신안의 섬과 섬 사이, 고흥, 보성, 함평, 영광 등 작은 지천이 흘러드는 해안이나 섬 주변에서 잡히고 있다.

특히 해안선이 길고 섬이 많은 전라남도에서 국내 실뱀장어 절반이 잡히고 있다. 실뱀장어 어획량이 줄어든 결정적인 원인은 댐이다. 어린 뱀장어가 강으로 올라 갈 수도, 성체가 되어 산란을 하기위해 바다로 가려고 했도 댐이 물길을 가로막아 오갈 수 없기 때문이다.

▲ 도암만에서는 돌무덤을 쌓아 잡는 옛날 전통방식으로 장어잡이를 하고 있다


오래된 어업유산, 장어독다물

구진포나 인천강과 달리 이곳 도암만에서는 돌무덤을 쌓아 잡는 옛날 전통방식으로 장어잡이를 하고 있다. 목리교 아래부터 강진천과 탐진강이 만나는 남포와 해창인근까지 야트막한 가장자리에 군데군데 돌무덤들이 있다. ‘다물’, ‘독다물’, ‘돌무덤’이라 부르는 장어잡이 어구이자 어법이
다.

옛날에는 200여 개 돌무덤이 있었지만 지금은 50여 개가 실제 장어잡이에 이용되고 있다. 그 흔적까지 헤아리면 100개 ‘돌무덤’이 확인된다. 장어의 습성을 이용해 돌로 담(무더기)을 쌓아 낮에 장어가 숨도록 유인해서 잡는다. 장어는 낮에는 돌 틈이나 갯벌에 몸을 숨기며 지내다 밤에 나와 먹이활동을 한다.

전라도에서는 돌을 ‘독’이라 한다. 다무락은 ‘벽(담)+울타리+악’으로 풀이 한다. 풍천장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전라북도 고창의 인천강의 장어잡이는 ‘장어얼’이라고 하기도 한다.

독다물장어잡이는 조류가 급하지 않고 바닥이 단단한 곳이 좋다. 탐진강이 장흥을 돌아 도암만으로 빠져나가는 길목에 잠까 한숨을 돌리는 곳이자, 강진천과 만나는 곳이다. 보통 물이 많이 빠지는 사리 물때에 나가 잡는다. 사용하는 도구는 쇠말뚝 다섯 개, 호미, 그물, 잡은 장어를 담는 망, 커다란 함지박 정도다. 물이 독다물이 보일 듯 찰랑찰랑할 때 그물로 감싼다.

그물은 3m 내외의 사각형이며 한쪽에 임통이 있다. 그물을 설치한 후 돌을 하나씩 그물 밖으로 던진다. 이때 돌무덤에 숨어 있던 장어가 놀라 ‘쑤기통(임통)’으로 들어가게 된다. 옆에 모아 놓은 돌무덤은 다음 기회에 같은 방법으로 장어를 잡는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장어가 가을이면 산란을 하기 위해서 바다로 나갈 때 잡는 ‘내림장어’를, 봄에는 민물을 찾아 올라오는 ‘오름장어’를 잡는다. 오름장어보다는 내림장어가 굵고 맛도 좋다.

탐진댐이 생기고 도암만에 크고 작은 제방이 쌓아진 후 은어도 사라지고 백합도 사라졌다. 장어도 많이 잡히지 않지만 그래도 독다물 어법은 지속되고 있다. 사초리 개불잡이와 함께 도암만을 대표하는 전통어법이자 어업유산이다.

다리 아래 있던 오래된 장어집은 제방 너머로 옮겨 지금도 아들과 며느리가 대를 이어 장어를 굽고 있다. 그 사이 ‘원조’라는 이름을 달아야 했다.

 

김준 작가

어촌사회를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고, 지속가능한 어촌과 어업, 주민이 행복한 섬마을과 지속가능한 섬살이에 관심을 갖고 있다. 광주전남연구원에서 섬정책, 어촌정책, 지역관광, 지역문화 정책을 마련하는 일을 하고 있다. 쓴 책으로 섬살이, 섬문화답사기, 어촌사회학, 바다맛기행, 어떤 소금을 먹을까, 물고기가 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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