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양 개척사> 제4부 한국 어민사 ⑥
<오대양 개척사> 제4부 한국 어민사 ⑥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 승인 2011.11.30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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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작가 천금성의 기획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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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 조선팔도(朝鮮八道) 시절, 함경도(咸鏡道) 명천군(明川郡) 어느 어촌에 태(太) 씨 성을 가진 한 어부가 고기잡이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암울하고 막막하기만 하던 고려 시대가 가고 새 나라(조선)가 개국하면서 지난 세월 전국 방방곡곡이 불경 외는 소리로 귀를 간지럽히던 부처님 숭상 기운이 다소 고개를 숙이면서 국법(國法)에 다름 아닌 살생금지(殺生禁止) 풍조가 차츰 기세를 꺾자 그 동안 황량하기만 하던 전국 각 어촌이 귀향인들로 넘치면서 다시금 고기잡이도 시작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어부 태 씨도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산티아고 노어부처럼 노를 저으면 수평선 아련한 곳까지 나아갈 수 있을 만큼 제법 실팍한 조각배 하나를 갖고 있어서, 이른 새벽이면 혼자 먼 바다까지 나가 주낙[延繩]을 깐 다음 낚시에 걸려든 물고기 몇 마리씩을 거두어 오는 게 일과였다.

 그런 어느 날은 낚시를 좀 깊게 드리웠는데, 생전 처음 보는 두세 마리 물고기가 걸려 있음을 보았다. 그러나 그게 도대체 무슨 고기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크기는 어른 팔뚝만큼하고, 등은 갈색이면서 옆구리로 두 줄 흑갈색 점선(點線)이 꽁지까지 이어져 있었으며, 제법 오징어나 정어리 따위의 작은 어류라면 얼마든지 잡아먹을 수 있을 만큼 아주 날카로운 이빨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아무 물고기나 먹으면 안 된다는 풍습이 만연해 있었다. 특히 이름을 모르는 낯선 물고기는 절대로 먹어서 안 된다는 금기(禁忌) 이상의 미신이 팽배해 있어서 엉뚱하게도 바다란 두렵고 외경스려운 곳이라는 인식을 널리 전파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어느 누군가가 난생 처음 잡은 배불뚝이 ‘복어’ 류를 성급하게 삶아 먹고는 중독(中毒)이 되면서 그만 목숨을 잃는 사고를 당한 것을 계기로, 그 뒤로는 특히 괴상한 모양을 하고 있거나 혹은 정체를 모르면 절대로 먹으면 안 된다는 말이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간 결과일 것이다.

 무명(無名)이 아니라 버젓이 이름을 갖고 있는데도 먹기를 꺼려한 물고기도 있었다. 가령 함경도 사람들은 ‘마어(麻魚)’라 하고, 남쪽 사람들은 ‘망어(?魚)’라 부르는 ‘삼치’는 일반 서민이라면 누구나 선호한 반면, 사대부(士大夫) 등 귀인 층은 외면하였다는 기록(<蘭湖漁牧志>)이 있고, 뱀장어나 갯장어 등 장어 류는 그 형태가 뱀을 닮았다고 하여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이조 말기에 이르기까지 먹기를 꺼렸다는 기록(일본인 학자 關澤明淸 <한국수산업조사보고서>)도 있다.

 그럼에도 어부 태 씨는 난생 처음 보는 물고기지만 버리기가 아깝기도 하여 뭍으로 가져와 여러 사람들에게 보였으나 아무도 아는 자가 없었다. 그래 어부 태 씨는 고을 최고 수장인 원님에게로 가져가 고견을 듣기로 했다.

 “사또 나으리! 오늘 어장에서 잡은 물고기인데, 처음 보는 놈이고, 또 이름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를 어쩌면 좋을까요?”
 사또가 망태기에 든 물고기를 이리 보고 저리 보고 하였으나 정체를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허허. 직접 잡은 어부가 모르는 물고기를 난들 어찌 알겠느냐? 그래 진실로 이 물고기를 아는 자가 아무도 없더냐?”
 “그렇습니다, 나으리.”
 “허허, 고것 참!”
 
 웬만하면 원님은 ‘귀찮은 것, 그냥 갖다 버리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한 마리도 아니고 두세 마리나 되다 보니 그 어장에는 제법 많은 동종(同種)의 물고기가 있을 성싶기도 하여 이름만 붙여 주면 국거리라도 끓일 수 있을 터이고, 그러면 식량이 부족하여 매년 연례행사처럼 보릿고개를 넘기느라 아우성인 백성들의 주린 배를 채워 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면 조선 천지에서 처음 보는 놈이고, 또 이놈의 정체에 대하여 아는 자가 전무하니 내가 이름을 지어보기로 하겠다. 그래, 가만 보자.”

 그리하여 원님은 ‘명천군’이라는 지명(地名)에서 ‘명’ 자를 하나 따내고, 그 물고기를 잡은 어부 성씨인 ‘태’ 자를 따 이를 조합하여 ‘명태(明太)’라는 새로운 이름을 짓기에 이르렀다.

 이 이야기는 조선 순조(純祖) 때(18세기) 조재삼(趙在三)이라는 학자가 두 아들 교육용으로 편찬한 <송남잡지(松南雜識> 14책 ‘어조류(魚鳥類)’ 편에 기술된 것으로, 원문을 보면 마치 전설(傳說)인 양 풀어 쓰고 있다.

 이와는 달리 한국수산학의 개척자로 물고기 연구에 평생을 바친 정문기(鄭文基) 교수(부산수산대)는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에 의해 1938년 간행된 월간지 <조선(朝鮮)>에 ‘조선북어명태(朝鮮北魚明太)’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면서, 거기에 어원과 내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 조선조가 개국하고 250년이 경과한 때, 함경북도 명천군 연해에서 태(太) 모라고 하는 한 어민이 연승(延繩) 어구로 처음 보는 물고기를 잡았으나 아무도 그 명칭을 아는 자가 없었다. 그 후 관찰사(觀察使)가 순시를 나왔을 때, 그 물고기를 끓여 시식(試食)케 하였던 바 맛도 담백하고 국물도 시원하여 칭찬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아직껏 명칭이 불명한 것을 알고 그 고기를 잡은 내력을 물어 산지(産地)와 고기를 잡은 어부를 기념하기 위해 각 한 자씩 떼 내어…….
라고 소개하고 있으며, 이에 부가하여,

 - 북어(北魚)란 주로 경기도 남부 지방에서 명태를 동건조(凍乾燥)시킨 것으로, 전설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 전 고려 시대 강원도에서 처음 시도된 것으로, ‘북방 바다(북태평양)에서 회유해 온 고기’라는 뜻을 담고 있다. 당시는 강원도 연해에서 많이 잡혔으나 ‘이름 없는 고기는 먹으면 안 된다’는 미신 때문에 관심 밖이어서 어부들도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그 후 함경도에서 어획되어 앞서처럼 명칭이 부여된 이후부터는 보건식량품(保健食糧品)으로 각광받게 되었다.…… 라고 역시 조재삼의 <송남잡지>와 비슷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두 가지를 비교해 보면 명칭이 부여된 곡절은 동일하나 다만 그 시기가 무려 300∼400년이나 차이나고 있어서, 과연 그 시기가 이태조 때인지 혹은 조선조 중기 때인지가 분명치 않다.

 참고로 세종(世宗) 19년에 편찬된 <세종실록>(77권)에 의하면, 이조 초기(태조 李成桂 代) 때부터 전국적으로 어획되고 채집되어 식용으로 밥상에 오른 수산동식물(水産動植物)은 대구·고등어·방어·청어·조기 등 약 50여 가지의 어종을 비롯하여 10여 종의 패류와 해조류가 일일이 거명되고 있지만, 그 어디에도 명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조선 11대 중종(中宗) 25년(1530년)에 편찬된 <신증 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비로소 함경도 경성(鏡城)과 명천(明川) 지방 토산품(土産品) 편에 명태의 별칭인 ‘무태어(無泰魚)’ 혹은 ‘무태어(無太魚)’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고려 시대에는 전혀 명태잡이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박구병 교수는 <한국수산업사>에서 주장하고 있다.

 이와 관련, 박 교수는 같은 책에서 조선조 초기에 이미 대구·고등어·청어·방어·조기 등 고급어류가 많이 잡힌 반면, 보다 훨씬 대중적인 명태가 빠져 있는 것은 당시에는 과학적 어족분류법(魚族分類法)이 정립되어 있지 않을 때여서, 그 생김새가 비슷한 대구와 혼동한 게 아닌가 하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그 증거로 조선 후기 실학자 유희(柳僖)가 저술한 <명물고(名物考)>에 명태를 ‘대구새끼’라는 뜻의 ‘대구어지소자(大口魚之小者)’라 칭한 예를 들고 있다.

 어쨌거나 어부 태 씨에 의해 처음 잡히고, 비로소 이름을 얻은 명태는 이후 단박에 무명의 설움을 딛고 각광받는 귀중한 생선으로 우대 받기에 이르렀고, 어부들도 한 척씩의 조각배를 마련하여 앞다투어 동해 멀리까지 나아가서는 아주 본격적으로 명태가 회유한다는 100길 깊이까지 낚시를 드리우게 되었다.

 그렇게 만선을 이룬 배들은 당시 집산지인 원산(元山)으로 기항하여 양륙하면 이를 넘겨받은 상인들은 운반선 편으로 타 포구로 운송하거나 혹은 말(馬) 잔등에 실어 전국 각 지방으로 배송되었는데, 그 행렬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어질 만큼 청어와 함께 당시 산업의 한 축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 무렵 동해안 일대에는 내장을 제거한 명태 말리는 ‘덕장’이 무수히 설치되어 있었는데, 당시는 마땅한 보관시설(냉장고 등)이 없어 장기보존이 어렵자 선대 어민들이 짜낸 지혜의 하나로,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면서 종당에는 ‘건명태(乾明太)’- 즉 ‘북어’라는 명품을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북어는 일용식으로도 별미였을 뿐 아니라 제수용품(祭需用品)이나 큰 행사에서는 필수품이 되었고, 심지어 임금님 수라상에까지 오를 만큼 최고 품목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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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값도 저렴한 동해안 명태가 일약 최고 식용품 내지는 인기품으로 부상하자 덩달아 여타 물고기까지도 관심의 대상이 되면서 비로소 조선인들의 식탁에는 한꺼번에 몇 가지나 되는 생선 요리가 등장하면서 가히 풍요로운 식생활의 혁명기를 맞게 되었다.

 거기에 속도를 붙인 게 한반도 연해의 풍부한 어족자원이었다. 고려 시대 금살생 여파로 어부들이 고기잡이에서 손을 떼는 바람에 연근해는 실로 회유해 온 어족들로 바닷물이 마를 지경이었던 것이다.

 덕분에 호황을 누리기는 이웃 섬나라 일본인들이었다. 그들은 원래부터 생선을 선호하여 워낙 자국 연안을 치훑은 나머지 이미 어자원이 고갈된 형편이었으므로 물 반, 고기 반인 조선 해역으로 들어와 아주 마음껏 휘저어댔으며, 그 틈새에 정크선을 탄 중국인(청나라) 어부들까지도 서해안을 제집 안마당인 양 연평도 턱밑까지 파고들었으나 누구 하나 제어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앞서 인용한 <한국수산지> 1집에는 당시 일본인과 중국인이 선호한 대표적 수산물이 열거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일본인들은 도미·삼치·조기·멸치·해삼·전복·홍합 등을 최고로 쳤고, 중국인들은 갈치·준치·달강어·조기·새우 등을 첫손가락에 꼽았다. 그런 한편으로 조선인들은 그저 눈만 둥그렇게 뜬 채 타국 어부들의 조업 광경을 바라보기만 하였고, 식탁에는 그저 소금에 절인 푸성귀가 유일하였으니 그 몰골이 과연 어떠하였을까.

 당시 한반도 인근 해역에 얼마나 많은 어류가 회유하였는가는 몇 가지 기록이 증거하고 있다.

먼저 명태에 관한 것으로,
- 자망 혹은 연승 어구로 잡는데, 호황기에는 하루아침에 2만 마리를 잡기도 한다.(岩水重華 <최신한국실업지침(最新韓國指針>)
- 성어기에는 어군이 밀집하여 산란하느라 바다는 우윳빛으로 변하고, 해안으로 밀려온 알은 그물로 떠올리기도 쉽다.(小松悅次 <신찬한국사정(新撰韓國事情)> 등이다.
조기에 대하여도 언급이 많다.
- 속칭 ‘전라도명태’라고 하는 조기에 대한 조선인의 기호와 그 수요량은 결코 동해의 명태에 뒤지지 않는다. 그 수요를 감당하려고 그랬는지, 전라도 영광군 법성포 인근에서만 하루에 능히 1백만 마리를 잡은 적도 있었다. 1903년 조선해통어업조합(朝鮮海通漁業組合)이 간행한 <회보(會報>에 언급된 기록이다.
<한국수산지>도 비슷한 기록을 싣고 있다.
- 안강망(鮟鱇網)으로 잡으며, 성어기에는 한 그물에 4∼5만 미(尾)가 예사고, 불황기라도 5∼6천 마리는 너끈하다. 때로는 망에 고기가 충만하여 도무지 인양할 재주가 없어서 종당에는 그물을 파손하고 말았다.……등등.

 대구는 또 어떤가.
- 대구는 진해(鎭海) 만을 중심으로 번창하였는데, 경상도에서는 첫 손가락으로 치는 ‘효자물고기’였다. 최성기 때는 연간 1백만 관(貫)은 실히 잡아냈으며, 인근 가덕도(加德島)에서도 한 어기에 5만 미에 육박하는 풍어를 기록한 적도 있었다.(葛生修亮 <한국통어지침>)
일본인들이 연안 어종 가운데 구이나 횟감으로 최고로 치는 도미는 단 한 방의 그물로 운반선 10척을 만선시키기도 하였다는 다소 황당한 이야기도 나온다.(岩水重華 <최신한국실업>)
그 밖에 삼치와 고등어의 대량어획에 대해서도 같은 맥락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특히 일본인들이 기호하는 전복과 홍합은 잠수기선을 이용하여 하루에 기백 관(貫) 넘게 쓸어 담아 제주 해녀들의 원성을 샀다는 내용은 앞장에서 밝힌 그대로다.

 마지막으로 ‘해수(海獸)의 왕자’인 고래(鯨) 무리에 대한 묘사는 많은 흥미를 끈다. 동해의 고래 무리는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을 정도로 풍부하다’는 전제 하에, 항해하다 보면 하루에 10여 마리를 목격하는 일은 예사고, 때로는 ‘수백 마리가 떼를 지어 온 바다가 그들이 내뿜는 분수(噴水)로 장관을 이루어 포경인(捕鯨人)들을 경탄에 빠트렸다’고 적고 있다.

 특히 구한말인 1895년, 노국(露國) 포경선 한 척이 함경도 앞바다에서 하루에 7마리를 포획한 바 있으며, 또 다른 배는 1주일에 사나흘을 쉬고도 12마리나 포획하여 이의 처리에 무진 애를 먹었다고 한다.

 당시 동해에서 고래잡이에 종사한 배는 일본과 러시아 말고 미국 포경선도 있었는데, 지구 반대편에서 멀다 않고 동해까지 내달아 온 것은 그만큼 고래가 많다는 말을 들어서였겠지만, 미국선은 고래를 식용으로 삼기보다는 갑판에서 가마솥으로 졸여 짜낸 경유(鯨油) 수집이 그 목적이기 때문이었다. 일반 생선의 지방분(脂肪分)과 달리 비린내가 나지 않는 고래기름은 향수 재료나 정밀기계 윤활유로 유용하여 엄청난 값을 받을 수 있었으므로 때문에 왕복에 두 달도 넘는 장기항해도 감수했다는 것이다.

 한반도 해역인 동해에 그처럼 많은 고래가 회유하고 있었지만, 조선 어민들은 외국선들의 박진감 넘치는 포획 활동을 보고도 한숨과 함께 그저 감탄만 되풀이하는 게 고작이었으니 그 처량함이 오죽하였을까 싶다.
이제 고래에 얽힌 조선인들의 애환을 함께 회고해 보기로 하자.

 고래에 관한 한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인들의 한(恨)은 참으로 눈물겹다. 세계에서 첫 손가락으로 꼽히는 어장(고래 회유지)을 지척에 두고서도 기술과 장비가 미흡하여 마음껏 잡지 못 하였으니 말이다.
이와 관련, 박구병 교수는 200년 전 엮어진 임원경제지(林園經濟誌 ; 편찬인 불명)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 일본인들은 화살을 쏘거나 작살을 던져서 고래를 잡았으나, 한국인들은 마땅한 도구가 없어서 고래잡이에 나서지 못 했고, 다만 백사장으로 떼 밀려온 죽은 고래를 얻은 게 고작이었다.……

 이 이야기의 시대배경은 조선조 중엽인 것으로 보인다.
 조선인들이 고래잡이에 나서지 않고 포경업을 등한히 한 것은 도구가 없어서가 아니라 거기에는 또 다른 사연이 있었다.

 가령 해안 모래톱에 고래가 좌초(坐礁)했다는 소문이 들리면 주민들은 아예 얼씬거리지도 않았고, 그래서 헐떡거리며 먼저 달려오는 사람이 관리들이었다. 고래 소유권은 마땅히 관가 몫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관리들은 불쌍한 어민들을 불러서는 죽은 고래를 해체(解體)하는 등의 부역에 투입시킨다. 어민들은 시키는 대로 열심히 칼질을 하지만 수확물은 모두 관리들이 갖고 가고, 고기 한 토막 맛보지 못 한다. 가령 어민이 바다로 나가 사투를 벌이는 등으로 어렵게 고래를 잡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국놈이 먹는다는 말처럼, 고생은 어민이 하고 고기는 관리 차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 어민들은 처음부터 포경법을 배우려 들지도 않았고, 모처럼 고래가 해안에 좌초되더라도 오히려 온갖 수단을 다하여 바다로 되돌려 보내는 기이한 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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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조선 시대 동안의 우리 어민들 생활상은 어떠하였을까. 여기에 한 가지 재미있는 기록이 발견된다.

 1830년대의 일로, 독일인 에르네스트 오페르트(Ernest Oppert)라는 자가 외륜(外輪) 증기선 로나(RONA) 호를 타고 서해안을 북상하여 한양 턱밑인 한강(漢江)까지 거슬러 오르는 동안 관찰한 당시 조선의 갖가지 풍물과 관련해서다.

 증기선 로나 호는 상하이(上海)에 근거한 영국인 선주 제임스 휘탈(James Whitall) 소유의 상선이었다. 당시 상하이는 영국과의 ‘아편전쟁’ 이후 난징조약(南京條約)에 의해 개항되었으며, 이후 영국이 영사관을 설치하면서 조차지(租借地)로 설정되어 있었다.

 선주 휘탈은 그곳에서 무역업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황해를 건넌 조선에까지 상권(商圈)을 넓히기 위해 앞서 말한 오페르트에게 개항(開港)을 유도하도록 증기선 로나 호를 제공하여 조선을 방문케 했던 것이다. 그의 조선 방문은 전후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으나 당시 조선은 천주교 탄압과 함께 쇄국정책(鎖國政策)으로 일관한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이 기세를 드높이고 있던 때라, 번번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어쨌거나 오페르트는 조선을 세 차례나 방문하는 동안 흥미로운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그게 <숨겨진 나라- 꼬레아에의 항해(Foebbiden Land- Voyage to the Corea)>라는 제목의 항해기다.
그 중 일반인에 대한 관찰기(觀察記)부터 보자.

- 조선 사람들이 대단히 애호하는 오락은 무용(舞踊)이다. 유럽의 댄스와 전혀 다른 형식이다. 조선에서는 남녀가 함께 춤을 추는 것은 풍속에 위배되어 있을 수 없다. 전통무용을 보면, 소복(素服)을 한 여자가 나와 장고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되, 머리를 앞뒤로 가볍게 끄덕이고, 그저 부채를 든 팔과 다리를 천천히 움직이는 데 지나지 않는다. 지루하기만 하고, 도대체 무얼 하는지 모르겠더라.
조선인은 중국인과 비교하면 조선인들은 유럽 음악에 매우 우호적이었다. 중국인들은 유럽 음악을 다만 동정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우리 것(중국 음악)과는 비교할 바 없다는 식으로 우월감을 표하는 반면, 한국인들은 좋아하면서 박수갈채를 보냈다.
특히 돛도 없이 한강으로 거슬러 오르는 로나 호는 보고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나루터에 배를 댄 다음 수부(水夫)들이 손풍금이나 바이올린을 연주하면 아주 매혹되어 피곤할 만큼 연신 앙코르를 요구하였고, 아주 지체 높은 관리들도 음악에 맞추어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다음은 조선인 어민과 고기잡이배와 관련한 오페르트의 기록이다.

 - 조선 서해를 북상하는 동안 때때로 고기잡이에 나선 외딴 배를 만나기도 하였다. 그들은 말이 없어서, 우리가 ‘서울?’ 하고 물으면 단지 손가락으로 북쪽을 가리킬 뿐이었다. 생김새는 매우 둔하게 보였지만, 그러나 배는 매우 빠른 속도로 달아났다. 한 배에 무려 사오십 명이 타고 있었으며(그러나 배의 크기는 언급하지 않았다), 예외 없이 옷이라고는 별로 걸친 것이 없었다.…… 우리는 어두워질 무렵 다행히도 한강 어귀에 당도하였다. 바로 그 때 심한 뇌성벽력(雷聲霹靂)과 함께 소나기가 쏟아져 부득이 강가 한 곳에 닻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시간에 많은 조선 배들도 돌아오고 있었는데,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닻을 내렸다. 그 참에 나는 여러 배들을 둘러볼 기회를 가졌다. 배에는 각기 30명 내지 심지어 90여 명에 이르는 많은 어부들이 타고 있었으나 마찬가지로 하체만 겨우 가렸을 뿐 제대로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배는 갑판(甲板)이 없는 대신 바닷물이 출렁거리는 위로 고정되지 않은 널빤지를 덮어 두었고, 그 안에서 팔팔 산 고기들이 헤엄을 치고 있었다. 뱃사람들이 작은 뜰채로 건져 올린 고기를 나에게 주겠다고 하였으나 사람 몰골을 보나 고기를 보나 매우 구미가 떨어져 연신 말로는 고맙다고 하면서 극구 사양하고 말았다.……

 이 글에 대하여 박 교수는 오페르트의 관찰이 비교적 세밀하기는 하지만, 옷을 걸치지 않았다거나 한 배에 수십 명이 타고 있었다는 등의 묘사에는 별로 동의하지 않고 있다.

 가령 오페르트의 고국인 독일이나 북구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여러 나라에서는 워낙 추위가 매서운 고위도여서 방한용(防寒用) 고무제 갑바 따위를 착용하는 게 보통이나, 온대 지방인 조선의 한 여름 철이라면 걸치적거리기만 할 뿐인 윗옷을 구태여 착용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하는 이론인 것이다.

 또 흡사 패망한 조국을 등지고 자유를 찾아 무작정 항해에 나선 베트남의 보트피플을 연상할 만큼, 한 척의 배에 수십 명이나 되는 어부가 타고 있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고개를 갸웃거린다. 세계 어느 나라 없이 제아무리 손이 많이 드는 고기잡이라 할지라도 한꺼번에 그처럼 많은 어부가 출어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페르트의 거서가 모처럼의 진귀한 기록에는 틀림없지만, 그 진실성에 의구심이 간다고 박 교수는 아쉬워하고 있다. <다음 호에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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