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사봉공(滅私奉公)의 본보기 법원도 움직인 헌신적 공무원의 귀감
멸사봉공(滅私奉公)의 본보기 법원도 움직인 헌신적 공무원의 귀감
  • 현대해양
  • 승인 2008.12.29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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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촌어항협회 배평암 회장

 

 

 


수산인의 집안에서 태어나 공직자로서 수산업을 위해 일생을 바쳐온 한국어촌어항협회 배평암 회장.
전남 고흥의 금산에서 태어난 그는 파도가 치는 날이면 그 파도가 담을 넘어와 파도를 막기 위해 벽을 높이 쌓아야 했던 기억을 회상하며 바다와 인연을 맺은 지난 세월들을 풀어놓는다.  나면서부터 바다와 인연을 맺게 된 그에게서 바다내음이 나는 것이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일인 듯싶다. 일생을 바다와 해양·수산에 바친 그에게 건강상 혹독한 시련이 닥치기도 했지만 이제는 건강도 회복되고 지난날 헌신적인 노력까지 인정받게 되었으니 전화위복(轉禍爲福), 아니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차분한 모습 속에 넘치는 카리스마가 협회를 한단계 업그레이드시킨 원천은 아닐는지.... 종로3가 번화한 도심 한가운데 고전과 현대가 공존하는 종묘공원에서 배평암 회장의 과거와 미래를 꺼내본다.

 

 

 


 과거 “수산밖에 몰라”

 현장은 물론 연구, 교육, 정책 등 해양·수산분야에 있어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있을까? 바다에서 태어나 수산을 전공하면서부터 배평암의 젊은 시절은 시작된다.

 수대를 졸업하고 지난 1967년부터 수산청시절 연구관, 사무관, 과장, 국장을 거쳐 1996년 해양수산부가 발족 된 이후 국립수산과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수산청에서 업무를 시작한 배 회장은 당시 연구원 직분으로 통영 현장에서 굴 양식분야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굴 적지조사부터 시작해 종패실험, 채묘, 양식, 어장관리 등의 업무를 일임하면서 당시 제출한 논문만도 20여 편을 넘길 정도였다. 지금은 ‘굴 하면 통영’, ‘통영하면 굴’이라는 인식이 심어질 정도니 그 뿌듯함이야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라며 깊은 감회에 젖는다.

 “통영은 저에게 있어 제2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굴 산업의 부흥에 이어 어류양식, 진주 양식개발에 이르기까지 열과 성을 다 해 노력했습니다. 지금도 그 때의 그 열정을 생각하면 가슴이 뜁니다.”

 하지만 그의 열정은 그 의지만큼 함께 할 수 없었다. 수과원장으로 근무하던 중 외국과의 어업협상 적임자로 선택되었고 건강상의 이유로 고사했으나 차관보로 발탁되어 협상을 총괄하게 된다. 이후 러시아, 일본, 중국과의 어업협상 과정에서 격무와 스트레스, 폭음에 시달려 간질환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하지만 입원조차 맘 편히 할 수 없었던 그는 병원에서 무단외출을 감행하면서까지 결국 러시아와의 협상을 무사히 마치는 괴력을 발휘했다.

 퇴원 후에도 한·일, 한·중 어업회담, 한·일 각료회담, 대일 김수출 회담 등의 격무에 시달리다 지병인 간염이 악회되어 결국 2000년 5월 사임과 함께 아들의 간을 이식받기에 이르렀다. 22시간의 대수술 끝에 그는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현재 치료와 회복

 공무원연금관리공단에서는 간이식수술을 하는 동안 공무상 질병으로 인정해 치료비를 지급했지만 배 회장은 모든 것을 본인의 부덕한 탓으로 돌리고 평생을 바쳐 봉사해온 공직마저 포기한 채 스스로 치료를 계속해 건강을 회복하게 된 것이다. 그동안 어려운 여건 속에서 병원에 다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해양수산부 동료들이 지난 2004년 12월 공무원연금관리공단에 공무상 요양승인신청을 하게 됐다.

 1심에서는 대법원의 판례를 들어 이를 기각하였으나 고등법원에서 직무상 과로와 과도한 폭음이 질병을 급속히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며, 공무와 질병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한 것이다. 이번 판결로 그동안 지병으로 불이익을 받아왔던 전·현직 공무원들이 희망을 갖고 업무에 종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연신 부끄럽기 그지없다는 말만 되풀이 하던 그는 “다시 생명을 얻었으니 더 열심히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가족과 후배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그동안 퇴직금으로 수술비용을 충당해야 했던 터라 그 이후 생활은 참담할 정도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지만 대학 강단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주위의 도움으로 어항협회의 수장자리에까지 앉게 되면서 이제야 안정적인 생활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며 잔잔한 미소를 띤다. 그리고 다시 예전의 그 열정을 서서히 찾아가며 의욕마저 대단하다.

 미래 협회의 도약위해 노력
 협회는 지난 1987년 사단법인 한국어항협로 출발해 지난 2005년에는 어촌어항법이 통과되면서 그해 12월, 한국어촌어항협회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업무영역도 기존의 어항조사·기술개발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어촌어항 개발관련 조사·연구, 기술도서 발간과 어항시설물 안전점검과 유지관리, 어촌어항에 대한 홍보와 문화창달, 어촌관광 활성화, 외국과의 기술교류 협력사업과 국가어항과 주요 연안어장의 정화사업까지 업무영역을 확장하여 수행하고 있다.

 협회는 수산업의 기반구축에 앞장서겠다는 모토로 주요업무를 빛, 돌, 물, 터로 구분하고 각각의 개념을 설정했다. 「빛」은 조사연구와 기술개발, 국제기술 교류협력, 수산관련 도서 발간을, 「돌」은 어항시설물 안전점검, 어항의 유지·관리, 어항기능 효율화 촉진의 역할을 담당하고, 「물」은 해양 침적 폐기물 수거와 해양폐기물 수매, 정화선 운용을, 그리고 「터」는 어촌관광 활성화, 도시·어촌간 교류확대, 어촌문화의 창달 등의 역할을 수행해 나가게 된다.

 배 회장은 “지난해까지는 기반구축과 골격을 세우는 한 해였다면 올해는 잘 다듬어서 수산업계에서 가장 우위를 선점할 수 있는 알찬 협회로 성장시키겠다”며 새로운 각오를 다진다.

 언제나 ‘최선을 다하자’는 신념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배평암 회장. 그는 “내일 당장 이 자리를 떠나는 한이 있더라도 협회를 더욱더 빛내기 위해 쓸고 닦겠다”며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것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어촌어항협회의 재도약과 함께 그 중심에 서 있는 배평암 회장.

 그의 열정과 능력으로 어업인들의 삶의 터전이 잘 사는 어촌, 쾌적한 어항, 풍요로운 어장으로 조성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2007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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