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⑤ 사람도 살리고 물고기도 살리는 숲
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⑤ 사람도 살리고 물고기도 살리는 숲
  • 김준 박사
  • 승인 2018.07.16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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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남해군 삼동면 물건마을

[현대해양] 비가 추적추적 오는 11월, 어부림을 걷고 있었다. 물건리 마을숲, 숲은 어떻게 가을을 맞고 있을까. 궁금했다. 예상대로 비가 와서 인지 오가는 사람은 적었지만 우산을 들고 숲을 오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숲 길 위로 예쁘게 물든 낙엽이 내려앉았다.

숲속 궁전으로 들어가는 공주처럼, 왕자처럼 사뿐사뿐 걸어 들어갔다. 오길 잘했다. ‘비 오는 날 오길 잘했어’라고 다독이며. 봄철에 물건리를 가는 것은 방조어부림 이팝나무를 보기 위해서다. 여름철은 숲그늘과 바다가 그립고, 가을은 멋지게 물든 마을숲 단풍을 보기 위해서다. 겨울에 그곳을 가는 것은 고즈넉한 겨울 숲과 바다소리를 듣기 위해서다.

어부림만으로도 물건리를 가야 하는 이유가 된다. 물건리는 경상남도 남해군 삼동면에 위치해 있으며, 물건마을, 은점마을, 대지포 그리고 독일마을이 있다. 이중 물건마을이 가장 큰 자연마을이다. 마을 앞은 남해바다가 펼쳐져 있고 주위로는 산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물건마을은 다시 큰마을, 윗마을, 고랑마을, 양지마을로 나누어져 있다.

임진왜란 이후 전주이씨가 들어오면서 마을을 이루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면사무소가 위치할 정도로 번성하기도 했다. 한때 물건마을은 430호에 이를 정도로 큰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250여 호에 500여 명이 살고 있다. 남해대교가 만들어지기 전, 남해군 사람들은 밖으로 나갈 대 삼천포를 거쳐 통영으로 오갔다. 1950년대 부산, 통영, 삼천포, 여수를 오가는 여객선이 있었다. 그래서 부산에서 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이 많다.

▲ 주변 어항은 레져공간으로 탈바꿈 되고 있다.

물건리 보물 1호, ‘방조어부림’

물건리 방조어부림, 팽나무, 느티나무, 후박나무, 푸조나무, 이팝나무, 상수리나무, 말채나무, 참느릅나무, 무환자나무 등 고목들이 해안을 따라 펼쳐져 있다. 큰 나무 아래는 때 죽나무, 구지뽕나무, 모감주나무, 생강나무, 쥐똥나무, 누리장나무, 예덕나무 등이 자란다. 그리고 바닥에는 송악, 마삭줄, 댕댕이덩굴, 청미래, 복분자 등 덩굴식물류가 있다.

길이만 1,500m, 폭이 30m로 370년 전 이씨가 마을에 정착하면서 조성했다고 한다. 그런데 고목 중에는 수령이 500년이된 것도 있다. 사람이 조성했지만 오랜 시간 잘 보전되어 자연천이가 이루진 보기 드문 마을숲이자 정원이다. 천연기념물 제 150호다. 태풍을 막고, 바닷물이 바람에 날려 마을과 농작물로 드는 것을 막기 위해 조성했다.

그런데 사람만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늘을 좋아하는 물고기에게 좋은 영양분을 제공하는 역할까지 하고 있다. 오래된 바닷가 마을에서 방풍림을 곧잘 만날 수 있다. 규모나 역할에서 물건리 마을숲을 덮은 곳이 없다. 사람도 살리고 물고기도 살리는 마을숲이라니, 그래서 ‘방조어부림’이다. 어느 핸가 남해안에 큰 태풍이 닥쳤는데 인근 마을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물건리만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방파제가 있기도 했지만 주민들은 어부림이 마을을 지켜줬다고 믿고 있다.

일제강점기 큰 태풍이 왔을 때도 물건리는 오롯이 지켜졌다. 어느 해는 먹고 살기 힘들어 마을숲 일부를 벌채해 세금을 냈다가 마을에 큰 화재가 발생하기도 했고, 어느 해는 폭풍우로 엄청난 피해를 입기도 했다고 한다. 보통 마을숲을 건들면 최소 반신불수요 최대 삼대가 피해를 받는다고 한다. 그만큼 마을숲을 소중하게 여겼다. 그런데 물건리 마을 숲은 그 피해가 고스란히 마을전체에 미친다. 오죽했으면 ‘숲을 건들면 마을이 망한다’는 말이 생겼을까. 실제 숲을 훼손하면 마을에서 벌금을 부과하는 규칙을 만들기도 했다.

설령 자연고사하거나 태풍으로 쓰러진 나무도 집안에 들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방조어부림이 잘 보전될 수 있었던 이유다. 방조어부림을 잘 보전 한 덕분에 환경부 ‘자연생태우수마을’, 해양수산부 ‘아름다운 어촌마을’, 행정자치부 ‘살기 좋은 지역만들기’, 산림청 ‘아름다운 마을 숲’ 등으로 지정되었다. 그뿐인가, ‘맨발의 기봉이’, ‘인어이야기’ 등 영화와 드라마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어부림은 마을신이 되고

해마다 섣달이면 동제를, 10월이면 풍어제를 위한 제상이 마을숲 아래 마련된다. 물건마을 동제 제당은 할배당산, 할매당산, 동천고개밥무덤, 은점고개밥무덤 등이다. 이곳에 황토를 놓고 금줄을 친 다음 제를 지낸다. 옛날처럼 성대하지는 않지만 끊어지지 않고 있다. 고령화와 주민들 외면 속에 사라질 위기도 있었지만 경남도의 지원으로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 제당 중 하당인 할매당산은 방조어부림 중앙에 있다. 할매당산에도 금줄이 쳐져 있고 느티나무 밑에는 밥무덤이 있다.

밥무덤은 밥구덕, 밥꾸디, 밥돌이라고도 한다. 경남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의례다. 동제를 지낸 후 제상에 진설 된 밥을 한지에 싸서 묻는 풍습이다. 최근 동제를 지내기 어렵거나 간소화되면서 제물을 마련해 제사를 지내는 번거로움 대신 밥만 묻기도 한다. 그래서 밥무덤을 신체로 모시기도 한다. 이 경우는 돌탑, 석탑, 시멘트로 구조물 등을 만들어 밥을 묻는 형태로 바뀌었다.

▲ 집집마다 멸치통을 모아 마을기업을 이루었다.

물건마을 살림살이, 마늘과 멸치액젓

마을로 내려가는 길이다. 차도 내려오고 마을사람들도 여행객들도 무시로 다니는 길이다. 안방과 길은 벽 하나로 나누어져 있을 뿐이다. 좁은 골목길이었다. 어부림까지 내려오는 길에 두 가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는 마늘 밭이다. 분명 집터였다. 5월 중순이라 마늘을 수확하기는 이른데 마늘쫑이 아니라 마늘을 뽑는 어머니를 만났다.

“왜. 벌써 마늘을 뽑으세요.”

“장마 오기 전에 뽑으려고 좀 일찍 심었어요.”

남해도는 마늘로 유명하다. 마늘박물관이 있고, 마늘축제도 열리고 있다. 마늘은 우리나라 어딜 가도 있다. 하지만 마늘을 주제로 박물관을 만들어 연구, 자료수집, 종자개선, 품질향상, 판매까지 하는 곳은 마늘나라 ‘남해’ 뿐이다.

독일마을 아래 텃밭에도, 쌀농사를 짓던 어부림 인근 논에도 곳곳에 마늘이 심어졌다. 마늘은 시금치와 함께 명실공이 남해를 대표하는 환금작물이다.또 다른 하나는 액젓이다. 멸치액젓. 물건리 중요 소득원의 하나가 마른멸치, 멸치액젓이다. 물건리에는 집집마다 몇 개씩 멸치액젓 통이 있었다. 그 멸치통을 모아서 마을기업을 만들었다. 그래서 통마다 이름표가 붙어 있다. 따로 또 같이, 깨끗하게 보관하고, 어부림으로 브랜딩하고 홍보한다. 마을기업이 가야할 길이다.

어부림 멸치 액젓은 어간장이다. 슬로푸드다. 산패간장대신 으뜸이다. 보관할 때 서늘한 곳에, 흰곰팡이(갯뜸팡)이 피면 걷어내고 드셔도 괜찮다. 너무 짜면 소주를 약간 부으면 된다. 멸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물건리는 멸치잡이보다는 호망을 이용한 겨울철 대구잡이를 비롯해 도다리, 낭태, 백조기, 갑오징어, 서대, 전갱이 등을 잡는다. 정치망에는 멸치 외에도 삼치, 방어, 고등어가 멸치를 따라 들어온다. 장어, 물메기, 게 등 통발어업도 이루어지고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었다. 어부림 앞에서 조업을 했다.

주변 어장이 좋고, 지척에 삼천포 어시장이 있어 일본인이 들어와 권현망이나 정치망을 이용해 멸치잡이를 하기도 했다. 초기 어장은 이들의 영항을 많이 받았다. 잡은 생선들은 선어로 삼천포 어시장에 팔았다. 물건리는 한국전쟁 후 먹고 살기 어렵던 시절에 어장이 좋고 일자리를 구하기 좋아 많은 사람들이 들어왔다. 남해사람들에게 ‘돈곶’으로 소문났고, ‘용꿈을 세 번 꿔야 물건리 총각과 결혼할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도 이었다. 물건리에는 권현망(1), 유자망(5), 양조망(3), 정치망(3), 호망(16) 등으로 고기잡이를 하고 있다.

방파제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대부분 어장을 어항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만큼 연안으로 많은 물고기들이 들어왔다. 어부림이 큰 역할을 한 것이다. 대신에 태풍과 높은 파도로 종종 논밭이 잠기고 마을도 피해를 입었다. 어부림으로만 막아내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만든 것이 방파제다. 물건방파제, 태풍피해는 어느 정도 막았지만 갯가로 들어오는 어류의 길도 막았다. 대신 안전해 해수욕은 물론 요트, 카누 등 비롯해 해양레저 활동공간으로 변신하고 있다.

▲ 독일마을 전경


희망과 그리움으로 마련한 보금자리 ‘독일마을’

남해를 그렇게 오갔지만 한 번도 독일마을에 머무른 적이 없다. 삶이 덕지덕지 붙은 물건마을을 두고 독일마을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이번에는 마음먹고 독일마을에 문을 두드렸다. 딸 때문이다. 독일마을을 궁금해 했다. 반송의 힘이 컸다. 솔직하게 나도 궁금했다. 독일맥주와 소시지도 제공한다는 주인장의 후덕한 인심도 집을 결정하는데 한 몫을 했다.

독일마을은 독일로 이민 간 간호사와 광부들의 정착촌을 만드는 일에서 시작되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10여 년간 우리나라 간호사와 광부들이 서독으로 파견되었다. 당시 서독 경기는 호황으로 노동력이 부족했다. 특히 자국민들이 기피하는 광부와 간호사에 수요가 급증했다. 이에 그리스인, 터키인 등 제3세계에서 인력을 받아들였다.

처음으로 파독광부를 모집하는 광고(동아일보. 1963년8월31일)를 보면 ‘경쟁 5대1 20대, 고졸만 50%’라고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대학졸업생도 꽤 응시를 했다. 모두 7,900여명이 파견됐다. 광부보다 앞선 1950년대 말 파견이 시작되어 1970년대 중반까지 1만1,000여 명이 파견됐다. 간호업무에 간병업무까지 노동강도 강한 독일 간호사 업무를 수행한 파견간호사를 두고 ‘로투스 불르메’라 했다. ‘동양에서온 연꽃’이라는 의미이다. 성실하고 친절한 한국인 간호사를 부르는 별칭이다.

광부들 중에 상당수는 간호사들과 결혼을 하기도 했다. 간호사들이 계약연장이 쉬운 탓에 독일에 계속 머물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취업도 어려운 고국보다 자유로운 독일체류를 원했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 중 계약이 만료되어 귀국한 경우는 약 40%, 독일 잔류 40%, 나머지는 제3국으로 이민을 했다.

1990년대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 독일마을 조성이 시작된다. 독일에 거주하는 간호사와 광부들에게 몇 차례 사업설명회를 거쳐 우여곡절 끝에 2002년 문을 열었다. 지금은 독일마을 34가구 중 27가구가 민박을 하고 있다. 이들은 독일에서 나오는 연금, 민박 수익으로 생활하고 있다. 남해관광에 독일마을이 큰 역할을 하면서 앵강만이 내려다보이는 호구산 자락 용소지구에 ‘미국마을’을 조성했고, 일본마을도 계획중이다.

물건리는 방조어부림은 생태숲으로 힐링공간으로, 항구는 해양레저 공간으로 변신중이다. 감소하던 인구와 가구 수도 멈추거나 늘고 있다. 살기 좋은 어촌마을로 알려지면서다. 독일마을 유치도 큰 역할을 했지만 가장 큰 자원은 역시 방조어부림이다. 잘 가꾼 마을숲은 태풍과 파도만 막는 것이 아니다. 물고기만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부르고 고향을 떠난 자식들을 불러들이며, 지속가능한 어촌의 희망을 주고 있다.

 

Profile  박사

어촌사회를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고, 지속가능한 어촌과 어업, 주민이 행복한 섬마을과 지속가능한 섬살이에 관심을 갖고 있다. 광주전남연구원에서 섬정책, 어촌정책, 지역관광, 지역문화 정책을 마련하는 일을 하고 있다. 쓴 책으로 섬살이, 섬문화답사기, 어촌사회학, 바다맛기행, 어떤 소금을 먹을까, 물고기가 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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