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쇠 경제학
구두쇠 경제학
  • 이준후/시인, 산업은행 제주지점장
  • 승인 2011.11.30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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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독한 구두쇠 영감으로 알려진 스크루지,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의 주인공입니다. 소설뿐만이 아니라 해마다 연말이 되면 영화나 드라마 또는 뮤지컬로도 한번쯤 보게 되지요.

 동업자였던 마레가 죽은 뒤에도 노인 스크루지는 추운 사무실에서 불도 피지 않은 채 바쁘게 일합니다. 그는 굉장히 인색하였고 남과 사귀지도 않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습니다. 거지조차도 동정해 달라고 조르지 않습니다. 지독한 수전노인거죠. 그런 그에게 크리스마스 전날 죽은 마레의 유령이 나타납니다.

 유령은 그에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외롭고 쓸쓸하고, 주변 사람들은 물론이고 가족으로부터 버림받고 있는 모습을 말입니다. 마레는 어릴 적부터 친구이며 평생 동업자였습니다. 마레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쇠사슬을 발에 감고 있는 모습을 보고 스크루지는 경악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의 죽은 모습을 보고 절망합니다. 아무도 애도하는 사람이 없는 죽음, 미래의 자신의 모습입니다.

 크게 반성한 스크루지는 유령의 옷을 붙잡고 소리칩니다. “아닙니다! 유령님, 저는 이제 예전의 제가 아닙니다. 당신을 알기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유령과 여행을 마친 스크루지는 한마디로 개과천선합니다. 거액의 기부금을 내고 어린이에게 성탄 축하를 보냅니다. 그리고는 평생 가지 않았던 조카네 집을 방문합니다. 다음날 사무실에 출근한 스크루지는 사무실 직원인 보브의 월급을 올려주겠다고 말합니다.

 스크루지의 실제 모델이 알려졌습니다. 네델란드 학자이자 디킨스 박물관의 설립자인 셰 프 데옹박사는 2007년 네델란드 사람 가브리엘 데 그라프라는 사람이 스크루지의 모델이라고 밝혔습니다.

 가브리엘은 돈에 매우 집착하여 남들이 쉬는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무덤 파는 일을 했던 지독한 구두쇠였습니다. 불평이 많고 잔소리꾼이었으며 술주정뱅이였답니다. 게다가 스크루지처럼 아이들을 끔찍이 싫어해 아이들이 그의 주위로 지나가는 일은 상상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홀연 네델란드 거리에서 사라졌다가 7년만에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 나타났는데, 그는 더 이상 아이들을 싫어하지 않았고 불쌍한 아이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습니다. 이후 그는 전 재산을 아이들을 위해 쓰는 자선사업가로 변신했습니다.
가브리엘의 이야기에 감동받은 네델란드 동화작가 안데르센이 이 이야기를 친구인 영국 소설가 디킨스에게 들려주었고, 디킨스는 이 이야기를 1843년 감동적인 소설로 쓰게 되었다 합니다.


 그런데 수많은 문학작품 중에서도 이 훈훈한 이야기만큼 경제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된 작품도 없습니다. 서양의 몇몇 대학에선 이 작품을 경제학 참고도서로 삼고 있다고 합니다. 인정머리 없는 구두쇠, 돈의 노예인 수전노, 선악개념으로 보아 ‘악’쪽인 스크루지에 대하여 경제학자들의 평가는 다릅니다.

 한마디로 열심히 일하는 구두쇠가 왜 나쁜가 하는 것입니다. 스크루지는 열심히 일합니다. 심지어 크리스마스 전날까지 일하니까요.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습니다. 있다면 사무원 보브의 사무실에 난로를 피워주지 않는 거? 허나 자신의 방에도 난로를 피우지 않으니 나무랄 일은 아니겠지요. 집에 가서 죽으로 끼니를 때우니 배불리 먹지도 않습니다. 램프의 불도 심지를 낮춰 희미하게 켤 뿐. 이런 스크루지를 경제학자들은 자원절약형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램프 기름, 난방용 석탄, 식량 등의 자원을 최저로 사용한 것이라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스크루지는 구두쇠이긴 하지만 이기주의자는 아닙니다. 이기주의자는 세상의 자원에서 자기 몫 이상을 요구합니다. 구두쇠는 작은 몫만 요구합니다.

 소설에 인색함의 상징으로 나오는 기부금 거절에 대해서도 반박합니다. 기부는 일종의 개인적으로 행하는 자원배분입니다. 법적 제도적 자원배분은 국가의 몫입니다. 스크루지는 기부금을 청하는 펀드레이저(fund-raiser)에게 묻습니다. “고아원은 없소?”, “양로원은요?”라고 말입니다. 경제적으로 보아 개인의 자선에 의한 자원배분보다는 국가 재정에 의한 자원배분이 광범위하고 효율적이라는 것입니다.

 금융의 관점에서도 스크루지에 대한 변론이 나옵니다. 구두쇠 스크루지는 번 돈을 모두 은행에 넣어 예금합니다. 이러한 자발적 예금자들 때문에 시중의 금리는 낮게 유지됩니다. 은행은 큰 비용 없이 재원을 확보하여 필요한 사람에게 대출합니다. 이 또한 자원의 최적 배분에 해당합니다. 역설적으로 스크루지의 구두쇠 노릇 덕분에 기업이나 개인은 쉽게 필요한 자금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죠.

 만일 스크루지가 번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않고 금고에 쌓아두었다면 어떨까요. 그래도 경제에 기여를 하는 셈입니다. 뭉칫돈이 금고 안에만 있고 유통되지 않는다면 시장 내 화폐유통량은 감소합니다. 유통되는 상품은 일정한데 화폐량은 줄었으니 물가는 떨어집니다. 이 혜택이 소비자 모두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자선가는 소수에게 눈에 보이는 혜택을 주는 반면, 구두쇠는 다수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혜택을 골고루 준다는 것이 경제학자들의 주장입니다.

 자, 조금이라도 눈에 보이는 기부금을 낼까요, 아니면 보이지 않게 세금을 많이 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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