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현의 양망일기 ④ 해적에 관한 두가지 기억
하동현의 양망일기 ④ 해적에 관한 두가지 기억
  • 하동현 작가
  • 승인 2018.06.2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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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해양]

1 한국 선원들이 탄 가나 국적 참치 잡이 어선이 나이지리아 해적들에게 피랍됐다가 근 한 달간의 억류 끝에 풀려났다. 이 사건의 시작과 끝을 나름 상세히 들여다 볼 수 있었던 것은 대학동기 둘이 긴밀하게 엮여 있었기 때문이다. 한 친구는 피랍된 어선이 가나국적선박이지만 실질적 운항과 선원 송출을 관장했던 한국회사의 실무자였고, 또 하나는 현지에서 협상과정과 선원들이 풀려난 후 뒤처리에 힘을 보탠 기지 주재원으로 10년 넘게 가나에 거주 중인 동기다.

▲ 해군작전 모습 <사진=해군블로그>

일기를 들춰보니 지난 3월 28로 나온다. 9시간의 시차를 감안하면 그쪽은 오전이었다. 자갈치 해물 찜 집, 동기 모임에서 한 잔 씩 기울이던 중에 단체 SNS방에 나포사실이 떴다. 절대로 ‘남의 일’이 아니라 여긴 뱃놈 동기들은 술이 번쩍깼고, 담당 친구는 밖으로 나가 장시간 통화하더니 사색이 되어 회사로 긴급복귀 해야겠다며 자리를 떴다.

두 친구 모두 사고처리에 경황이 없었던지 한 달간 소식이 뜸했다, 힘든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에게는 입에 발린 위로나 격려보다 침묵으로 응원을 보내는 게 차라리 낫다. 이러한 세상의 지혜를 나이 들며 자연스레 터득한 우리는 모두 쉬쉬하며 사태가 원만히 해결되기를 지루하게 기다렸다.

미디어를 통한 석방뉴스를 4월말에 접할 수 있었고, 5월 3일에는 구출작전에 투입되었다가 다시 아덴만으로 회항하는 ‘문무대왕함’을 배경으로 찍은 현지 친구의 사진이 단체방에 올라왔다. 모두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부 전화며 문자보내기에 바빴다.

사건을 요약하면 이렇다.

현지시간 3월 26일, 가나해역에서 선장, 항해사, 기관사 3명의 한국인과 40명의 가나선원들을 태운 배가 9명의 해적들에게 피랍된다. 다음날 너무 많은 인질이 부담이 되었던지 ‘돈 안 되는(?)’ 현지선원들은 풀어주고, 한국인들만스피드보트에 태워 나이지리아 해역으로 도주한다. 그 길로 소재불명, 연락 두절이 된다.

3월 28일, 바로 정부와 합참의 투입명령을 하달 받은 청해부대 구축함 ‘문무대왕함’이 아덴만에서 긴급출동 한다.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4월 15일 가나해역의 기니 만(灣)에 도착해 구출작전에 돌입한다. 급물살을 탄 협상 뒤에 4월 27일 선원들이 풀려나고, 29일 나이지리아 해군으로부터 피랍선원들의 신병을 인수받는다.

날짜나 시간은 시차도 있거니와 중요하지 않고, 공식기사화는 엠바고로 하루 이틀 늦어졌겠지만, 불행히도 팔자에
없는 ‘개고생’을 한 동기들 덕에 소상히 사건의 전말을 접했던 것이다. 아마 국가 간의 전쟁을 방불케 하는 해군함정의 출현에 해적들이 엄청난 심리적 부담이 느끼지 않았을까.

해적들 중 행동대장 격인 돌격대 윗선에는 해적질을 국제적인 비즈니스(?)로 승화시킨 비범한 인간들이나 글로벌감각을 가진 협상가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건은 느슨한 조직구성에 오로지 돈에만 관심 있는 ‘런닝구 동네조폭’ 규모의 해적들이 행한 실수로 짐작된다. 중국을 위시한 원양어선 출어국가들의 불법조업에 현지어민들이 어장과 밥줄을 잃고 극한상황에 내몰려 해적질을 일삼는다는 말도 있다.

이러다보니 정보력의 부재로 한국이 소말리아 해역에서 피랍선박을 구출하며 펼친 ‘아덴만의 여명’작전 같은 것을 잊고 있었던 것 같다. 물밑작업으로 진행한 협상과정은 정부차원의 대응과 기타 대외비적인 측면이 있어 우리가 알기 어렵다. 실무자 동기에게도 묻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이러한 위험에 노출되었던 경험이 풍부한 뱃놈들이라 매스컴에서 결과를 두고 내뱉는 ‘몇몇 인간들이 개소리’에 격분할 수밖에 없었다.

막대한 세금을 들인 해군력의 심각한 낭비란다. 북한을 비롯한 주변국들의 군사위협에 대비한 주력함대의 군함을, 한낱(?) 원양선의 호위와 구출에 차출하여 국가적인 전투력 공백을 야기했단다. 기껏해야 소총이나 박격포가 고작인 오합지졸들에게 대함미사일로 중무장한 최신형 군함이 굳이 나서야 하느냐는 말이다.

이런 말을 스스럼없이 해대는 많이 배운 인간들에게, 굶주림에 지쳐 악마가 된 해적들에게 나포된 선원들과 하루만바꿔 인질노릇을 해 보라는 아예 실현 불가능한 권고는 접어두자. 요트니 유람선이니 팔자 좋은 휴가를 대신해 길게도 말고 파도가 뒤집어엎는 어장에서, 어선에 딱 일주일만 승선해 장 청소삼아 어릴 때 먹은 엄마 젖까지 토해볼 경험을 감히 권유해본다.

세월호 인양과 바로 세우기에도 막대한 세금낭비 운운하며 반대의견을 표출하는 인간들과 다를 바 없다. 국민들을 안전에서 지키지 못하는 국가는 더 이상 나라가 아니다. 국가는 이럴 때 존재하고 세금은, 나랏돈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 아닌가.

해적에 대한 해결방식은 나라마다 다르다. 양반국가들은 제외하고, 어떠한 테러에도 굴하지 않는다고 천명한 ‘마초맨’ 푸틴대통령의 러시아가 일단 속은 시원하게 한다. 협상 따위는 애초에 씨알도 안 먹힌다. 인질의 희생도 감수 하며 즉각 특수부대를 투입해 거의 사살수준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한다. 생포한 해적들은 육지와 5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망망대해에 무동력 보트에 태워 떨어뜨려버린다. 그길로 그들은 생사불명, 행방불명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북한배를 나포하려했던 해적들은 전원 특전사출신인 선원들과 격투 끝에 되레 제압당했다. 오히려 선원들이 해적을 인질로 잡고 몸값을 요구했다. 털어봤자 먼지 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돈 받을 가망도 없거니와 밥만 축낼 것 같으니, 물에 집어던져 수장시키려는 것을 미국 측의 권고로 겨우 살려내 인도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자국영해에서 불법침범조업을 일삼는 중국과 베트남 어선들을 나포한 후에, 함포사격으로 격침시키고는 ‘도둑은 도둑일 뿐이다. 우리 바다에서 일어나는 해적질을 용서할 수 없다’라고 선언한 인도네시아 같은 나라도 있다.

▲ 해경의 해적퇴치훈련 &#9400; 박진영


2 다행히 내 현직 시절에는 해적과 조우한 경험이 없다. 단 한 번, 옛날 대양항해로 한국에서 뉴질랜드로 배를 이동할 때, 필리핀 민다나오 섬에서 50마일 정도 떨어져 항해하면서 해적으로 의심할 수도 있는 배들과 마주친 적은 있다.

고무나 FRP(강화섬유플라스틱) 재질 선박이었던지 레이더에도 항적이 잡히지 않는 소형선 두 척이 출현했다. 어장이동을 위한 독자항로라 일반적인 뱃길도 아니고 위치상 고기를 잡을 어장도 아니었는데, 한 나절이나 우리 배의 동태를 살피듯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붙었다.

지금이야 아덴만을 위시한 중동해역이 ‘핫코너’가 되었지만, 당시 동남아 해적이 빈번히 출몰하는 수역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나 말레이 반도의 말라카해협이었다. 우리가 항해한 해역은 가능성이 희박한 곳이었으나 이슬람반군 무장단체의 본거지라는데 생각이 미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당시 일등항해사였다. 이미 고인이 되신 호방하고 낙천적인 성품의 대선배 선장님과, 해병대 출신 갑판장이 짜낸 자체 방어 전략이라는 게 엉뚱하게도 갑판에서 떠들썩한 회식 판을 벌이자는 것이었다. 만약 해적이라면 저들이 우리를 제압하기에 만만찮다는 것을 보여주자는 말이었다.

덩치가 크지만 탑승인원이 적어 장악하기 쉬운 상선에 반해, 비린내만 진동하지 돈 될 것도 없는데다가 떼거지가 많은 어선의 이점(?)을 염두에 둔 전략이었다. 단순항해에 지루해하던 45명 선원들을 갑판에 모아놓고 조명등을 대낮같이 환하게 밝혔다.

반으로 자른 드럼통에 캠프파이어를 하듯 장작을 태워 고기를 굽고, 야광봉을 흔들며 폭죽을 날렸다. 쇠파이프나 대나무 장대 끝에 무기가 될 만 한 것들을 매달아 두드려대며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불렀다. 현측으로 분수 쇼를 하듯 동키호스로 뽑아 올린 해수를 물대포처럼 쏘아댔다.

만일에 대비해 빈 소주병에 휘발유를 붓고 화염병도 몇 개 준비했다. 노래자랑이 무르익을 때쯤 아예 배를 선회해 그배들 쪽으로 잠시 전진했다가 다시 원침로로 돌리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니 반쯤 취한 선원들은 그 상황을 오히려 즐겼던 것 같다. 안 그래도 응어리진 한 많은 세상,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해적이고 나발이고 올 테면 와봐라 식이었다. 만약에 해적이었다면 그들이 볼 때 정상이 아닌 미치광이들이 날뛰는 배로 여겼는지, 몇 시간을 우리 항적을 따르던 배들은 슬그머니 사라져버렸다.

결과는 해피엔딩이었지만, 난데없이 스릴 넘치는 즐거운 회식을 제공한(?) 그 배들의 정체는 영원히 알 수 없는 의문으로만 남았다. 모두 이상한 열기에 들떠서 행인지 불행인지 해적과 직접적인 조우가 없었음을 못내 아쉬워(?)했던 기억이 난다.

3 영해 침범 조업을 해적질로 간주한 인도네시아를 예를 들었는데, 잊을만하면 뉴스에 등장하는 중국어선들의 불법조업도 골칫거리다. 우리 어장을 황폐화 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진압하는 해양경찰에게 흉기를 들고 격렬히 저항하는 장면들은 소름이 끼칠 정도다.

그런데 우리는 좀 뜨끔했다. 그런 뉴스를 접할 때 헛기침만 해대는 뱃놈 동기들과의 술자리가 아니면 죽을 때까지 묻고 가야 할 이야기지만, 말이 난 김에 현역 어선선장 시절 내가, 아니 우리가 저질렀던 과오도 고백해 볼까한다.

밑으로는 드물지만 우리 동기 중에는 작고한 친구가 한 명이고, 선배 각 기수 마다 한 둘은 아프리카, 중동, 남미어장에서 나포된 경험을 가진 선장들이 있었다. 그 옛날 한국어선 들의 도둑고기잡기는 다른 나라 배들은죽었다 깨어나도 못 따라 올 정도로 가히 입신의 경지에 올랐었다.

원인은 성과급제인 보합제(步合制) 임금구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흔히 짓가림제, 쉬운 말로 나눠먹기로 표현하는데, 굶어죽지 않을 만큼 월급형태의 최저생계비를 가족에게 지급하고, 계약만료 때까지 고기 잡아 판매한 결과만을 가지고 조업경비를 감한 후에 순이익을 계산해 분배하는 방식이었다.

지금이야 고급사관들은 성과급을 적용하더라도 하급선원들을 죄다 동남아 선원들로 태워 월급제로 운영할 것이니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이야기다. 고가어종을 많이 잡아 큰돈 되는 경우도 있겠으나, 수리경비가 많이 드는 사고가 난다든지 고기를 못 잡았을 때는 말그대로 ‘헛방’이다. 심지어 이론상으로 마이너스 정산이라면 선원들 측에서 회사로 보전금을 게워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니 생일이고 설날이고, 저기압이 바다를 뒤집어놓은 황천파도 속에서도 죽기를 무릅쓰고 고기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배를 들이대 한 마리라도 더 건져 올려야 했던 것이다. 고기를 잡지 못하는 선장은 전쟁에 패한 장수 대접 밖에 받지 못하며,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대어만선으로 선원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게 어선 선장의 숙명이었다. 거기다 경쟁사회에서 배우고 자란 한국선장들의 본능적인 승부욕도 한몫 더했지 싶다.

책 한권 정도로 서술할 수 있는 어장별 경비정 식별에 관한 사전 정보, 시기별 어장형성에 따라 디테일하게 분류한 영해 침입 노하우와 비상시 효율적인 도주방법, 적발되었을 때를 대비한 사후대처 관련 매뉴얼 같은 지침 따위는 후임 선장과의 인수인계 제1호 항목이었다.

영웅담처럼 회자되는 다른 사람들의 예는 묻어두고, 모 국가 연안경비대의 추격을 피해 열여덟 시간 도주했던 내 경험은 지금도 갓 깨어난 악몽처럼 생생하다. 그도 그럴 것이 경비대도 잡아 놓아봤자 조사다 재판이다 세월아 네월아 시간만 보내는 외국선들보다 급한 기질로 재빠른 협상이 이루어지는 한국 어선들을 ‘주 타깃’으로 했다는 믿거나 말거나의 소문도 있을 정도였으니.

인간의 존엄이 먼저인지, 돈이 먼저인지,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해 밀어붙이기식 조업을 하던 옛날 이야기다. 이번 해적 사건으로 떠올려 본 씁쓸한 기억들이다.

 

하동현 작가

부경대학교(구, 부산수산대학) 어업학과를 졸업하고 원양어선선장, 운반선 감독관을 역임하며 전세계 망망대해를 누볐다. ‘2016년 부산일보 해양문학상 우수상(중편소설)’을 수상했고 한국해양문학가 협회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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