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의 어촌정담(漁村情談) ④ 역사가 있는 어촌, 살아 있는 어업유산 마을
김준의 어촌정담(漁村情談) ④ 역사가 있는 어촌, 살아 있는 어업유산 마을
  • 김준 작가
  • 승인 2018.06.18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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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통영시 견내량 연기마을

[현대해양]

역사가 흐르는 바다, 견내량

견내량은 통영시 장평리와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 사이 좁은 해협을 말한다. 장평리는 견유, 신촌, 연기마을이 위치해 있다. 길이가 약 3㎞, 폭은 약 180m에서 400m에 이른다. 한산대첩의 격전지이다. 1971년 거제대교가 만들어졌고, 1999년에 신거제대교가 다시 놓였다.

진해만과 고성바다를 연결하는 바닷길이다. 이 길을 따라 남해바다의 많은 어패류들이 산란과 서식을 위해 오가며, 부산과 진해와 마산과 고성을 오가는 여객선과 고기잡이 배들이 빈번하게 오갔던 곳이다. 한때는 부산에서 여수까지 오가는 배들도 견내량을 지났다. 고려시대 정중부의 난으로 의종이 통영에서 거제 폐왕성으로 귀향오면서 건넜다 해서 ‘전하도’라고도 한다. 고성에서 거제부로 들어오기 위해서  꼭 건너야 하는 바다였다.

<여지도서>에 소개되어 있고 <세종실록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견내량진’이 표기되어 있다. 해방 후 이곳 견내량 도선장을 통해 포로들이 거제로 이송되기도 했다. 연기마을은 연기, 해간, 분곡 세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해간마을은 간섬 혹은 딴간섬이라 불렀고, 큰 마을인 연기는 육간섬, 뭍간섬이라고도 했다. 바닷물이 많이 빠지면 해간도가 연기마을과 연결되기도 했다. 지금은 다리가 놓여 연결돼 있다.

 

수백년을 이어온 전통채취법

자연산 돌미역은 동해안, 남해안, 서해안 섬과 연안 어촌에서 지금도 많이 채취된다. 그런데 굳이 연기마을을 찾는 것은 독특한 채취방법 때문이다. 조선총독부가 펴낸 《수산편람》(1919)에는 미역채취 기술로 나잠(裸潛), 간권(竿捲), 권(捲), 예채(刈採), 예취(刈取), 겸(鎌), 권(卷) 등을 소개했다. 나잠은 물질을 해서 채취하는 것이며, 간권은 장대를 이용해 바다 속에 있는 미역을 틀어서 채취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겸, 예채, 예취는 낫을 이용해 베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동해안에서 볼 수 있는 낫대로 물속에 미역을 베어 건지는 것인지, 물이 빠진 미역바위나 얕은 곳에서 미역을 베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명확하게 구분되지는 않지만 대체로 함경도와 강원도 경북은 낫대로 베고 갈퀴로 건지고, 경남, 전북, 충남은 틀개(트리), 전남과 제주에서는 나잠으로 채취했다.

▲ 옛날 목선을 타고 미역을 채취하는 주민

황해도 일대에서는 손으로 뜯기도 했다. 미역은 이처럼 전 해역에서 채취했다. 그만큼 미역은 당시 조선을 대표하는 해조류이자 수산물이었다. 연기마을의 미역채취법 ‘트리’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트리대’라고 부르는 장대는 크게 손잡이, 몸대, 십자 등 네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먼저 손잡이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50-60㎝ 길이로 직각에 가깝게 구부려 트리대를 돌리기 좋게 만들었다.

몸체는 왕대나무로 이뤄져 있으며 손잡이까지 포함해 전체 길이가 8m 정도다. 미역을 감는 끝부분은 70㎝ 나무대에 엇갈리게 구멍을 뚫어 열십(十)자로 5㎝폭에 50㎝길이 판자를 끼웠다. 트리대는 조류 반대방향으로 집어넣는다. 견내량은 수심 5-6m다. 바닥에 닿을 정도에서 트리를 넣어 손잡이를 돌려 열십자를 이용해 미역을 감는다. 대여섯 바퀴 정도 돌리면 감긴 미역 양에 따라 묵직한 느낌이 손잡이를 통해 전달된다.

이때 반대방향으로 이동해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트리대를 들어 올린다. 먼저 뱃전에 툭툭 쳐서 바닷물을 털고 열십자 맨 아래 나무를 뽑고 남은 한 개도 뽑은 다음 미역을 트리에서 밀어 털어낸다. 강원도에서도 소나무 장대 밑에 물푸레나무를 ‘열 십(十)’로 달아 미역을 감아 올렸다고 한다. 깊지 않는 곳에서는 낫대로 베어서 채취하고 깊은 곳은 틀개로 감아서 채취했다. 틀개를 사용하는 바다는 나중에 잠수부들이 작업을 대신하면서 틀개도 사라졌다.

 

옛날 부자어촌, 지금은 장수어촌

통영을 대표하는 수산물은 멍게와 굴이다. 어류양식은 숭어, 돔, 방어, 고등어 심지어 참치까지 시도되고 있다. 모두 통영바다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해조류양식은 통영보다는 완도, 고흥, 해남, 진도 등 서남해 지역에서 활발하다. 1914년 통영군 한산면 두억리에 ‘한산면어업조합’이 통영수협의 모태다.

100년의 세월이 지났다. 지금은 80개의 어촌계에 조합원만 5,000명이 넘는다. 연기어촌계는 60여명의 조합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양식어업이 발달하기 전에는 제법 부촌에 속한 어촌이었다. 연기어촌계는 1962년 9월 25일 설립되었다.

통영은 우리나라 수산업의 과거이자 현재이며 미래라고 한다. 그만큼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굴수하식양식수협, 멸치잡이 기선권형망수협, 근해통발수협, 해수어류양식수협등 전국규모 수협이 4개, 경남우렁쉥이양식조합, 경남정치망조합, 잠수기조합통영분소 등 업종조합과 통영수협, 욕지수협, 사량수협 등 3개 지역별 수협이 있다. 무엇보다 업종별 수협인 굴, 멸치, 멍게, 장어(통발) 수협의 본산이다.

어촌계장 장동주는 말한다. “양식을 많이 하는 어촌은 경제적으로 부유할지 모르지만 환경은 우리보다 좋지 않습니다. 돈보다는 자연환경이 더 중요하지요. 우리 마을은 정말 좋지요. 장수마을입니다. 바지락 파서 먹고, 미역 뜯어 먹고. 자기 밭이 있으니 움직여 일하고. 공기 좋고….”

그래서 귀어귀촌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지금도100여 가구 중 10%가 이주해온 주민이다. 살기 좋고, 살만 한 어촌이다. 통영시내에서 잠깐이면 닿는 곳이다. 양식과 수산의 중심인 통영에서 이만큼 쾌적한 어촌을 만나는 것도 쉽지 않다. 변두리에 위치해 있어 개발도 더뎠다. 최근 숙박시설이 들어서고 있다.

 

▲ 미역가닥이 풍성하고 길었던 옛날 미역이 지금도 간간이 채취된다며 들어 보이는 장동주 어촌계장

바다가 짓고, 하늘이 거두는 미역농사

미역채취는 물때와 관계없지만 조류가 빠른 때는 힘들어 피한다. 물때 보다 중요한 것은 날씨다. 채취한 돌미역을 하루에 충분히 말려야 색깔도 맛도 좋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오전에 미역을 채취한다. 보통 사흘정도는 날씨가 좋아야 안심하고 미역을 채취할 수 있다. 건조과정을 고려하지

않으면 채취해도 상품으로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트리를 돌려서 미역을 채취하는 일은 힘이 많이 드는 고된 일이다. 그래서 남자들이 채취하고 여자들은 건조과정에 참여한다. 미역농사는 다른 어떤 갯밭보다 뭍에서 하는 농사와 가깝다.

갯바위에 붙은 잡초를 제거하는 ‘기세(바위닦기)’나 조간대에 노출된 미역이 마르지 않도록 ‘물주기’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400년 전통의 견내량 미역이 2000년대 초반 위기를 겪기도 했다. 서식처에서 미역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미역종묘를 이식하고 곰피 등 미역성장을 방해하는 해초들을 제거했다. 다행히 이후 다시 미역이 견내량에 서식하기 시작했다.

미역채취는 보름정도다. 그러니 ‘보름농사’로 일 년 생활비를 건지는 셈이다. 젊은 사람들과 달리 나이가 많은 분들은 전기세에 쌀값만 해결되면, 나머지는 바다와 집 앞 작은 텃밭에서 해결한다. 바다는 생활비도 주고 반찬도 주는 효자 중에 효자다. 바지락밭은 텃밭처럼 개인 밭이 있어 무시로 채취가 가능하다. 미역은 곧바로 판매되어 돈이 되는 상품이다.

중요한 것은 채취가 아니라 건조다. 날씨가 사흘 정도 좋아야 미역을 말릴 수 있다. 필자가 마을을 방문한 날도 저녁부터 비가 온다는 소식에 미역채취를 하지 않았다. 건조기를 이용해 기계로 말리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햇볕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좋은 빛과 바람에 한 번에 말려야 색깔이 좋다. 맛에는 차이가 없지만 얼룩이 지거나 색깔이 좋지 않으면 소비자들이 꺼려하기 때문이다. 채취한 미역은 두가지 형태로 건조한다.

미역틀에 얹어 가닥을 만들거나 한줄기씩 말리는 방식이다. 예전에는 틀에 맞춰 말렸는데 최근에는 한 가닥을 오롯이 줄에 걸어 말리기도 한다. 역시 찾는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이다.

 

전통성과 지속성, 바다가 건강해야 가능 

연기마을은 선대부터 양식보다는 채취어업에 의지했다. 이순신이 조정에 올린 장계처럼 조류가 거칠고 수심이 깊지 않아 물때에 따라 변하는 바다환경도 양식을 선택할 수 없었던 이유다. 다행이 물목이 좋아 멀리 가지 않고 돔, 장어, 학공치, 볼락 그리고 미역, 김, 청각, 톳 등 해조류, 개조개, 바지락, 전복 등 패류를 채취할 수 있었다. 양식어업이 본격화되기 전에는 통영 어떤 어촌보다 부촌이었다.

미역만으로도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통영사람들치고 아이를 놓고 연기미역을 찾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탓이다. 자연이 준 최고의 서식처이자 산란장인 마산만과 진해만으로 들고 나는 어류들이 견내량을 오가며 연기마을 주민들에게 생활양식을 공급했다. 그래서 일찍부터 연기마을 사람들은 바다와 갯벌에 의지해 살았다.

욕심도 크게 내지 않았고 바다와 갯벌이 주는 만큼 평화롭게 갯살림을 해왔다. 굴 양식, 멍게 양식이 시작되면서 인근마을에 부자가 되었다는 사람들이 생겨났지만 괘념치 않았다. 오히려 마을지선을 이웃 거제 광리마을에 내주며 같이 미역채취를 하고 있다. 비록 자연산 가리비가 사라지고 문어와 전복도 거의 사라졌지만 바다는 욕심을 내서는 안 되는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미역도 옛날처럼 줄기가 길고 실한 것들이 많지 않다. 장씨가 사진을 보여줬다. 옛날에는 이른미역이 주로 채취됐다며. 정말 지금 채취하는 것과 다르다고 했다.

마을 앞에 걸린 1930년대 미역채취사진을 보면 지금과 별반 차이가 없다. 노를 젓는 배에서 동력을 갖춘 배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런데 바다환경은 많이 바뀌었다. 연기마을의 노력만으로 옛날 바다 환경으로 되살리는 것은 어렵다. 지속가능한 어업은 경계가 없다.

▲ 미역을 건조 하는 마을풍경

지속 가능하고 살만한 마을을 꿈꾼다

날씨가 꾸물꾸물해지자 어촌계 사무실 앞이 소란스럽다. 마른 미역의 바스락 소리와 두런두런 주민들 소리가 파도 소리가 잘 어우러진 어촌교향곡이다. 사흘 말린 미역이 비라도 맞는 날이면 ‘말짱 도루묵’이다. 보관할 때도 습기를 차단하는 것이 관건이다. 우선 급한대로 커다란 비닐에 넣어 운반한다.

10년 이상 어촌계 책임을 맡고 있는 어촌계장 장씨는 마을이 발전하기 위해서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행정만 바라 볼 수 없으니 바지락체험과 돌미역축제도 시도했다. 하지만 마을만의 노력으로는 한계가 있다. 행정기관과 전문가들의 관심과 협조가 절실하다.

당장 돌미역만 해도 그렇다. 소문이 나서 판로에 큰 어려움이 없이 개인이 알음알음으로 완판이 되고 있다. 하지만만 지속가능하고 쾌적하고 살만한 어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미역판매에 그쳐서는 안 된다. 브랜드가치를 높이기 위해 건조과정, 유통, 가공 등에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고 한다.

 

김준 작가

어촌사회를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고, 지속가능한 어촌과 어업, 주민이 행복한 섬마을과 지속가능한 섬살이에 관심을 갖고 있다. 광주전남연구원에서 섬정책, 어촌정책, 지역관광, 지역문화 정책을 마련하는 일을 하고 있다. 쓴 책으로 섬살이, 섬문화답사기, 어촌사회학, 바다맛기행, 어떤 소금을 먹을까, 물고기가 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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