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정신으로 지켜온 삼해상사 김광중 회장의 가업 잇기 제2부
장인정신으로 지켜온 삼해상사 김광중 회장의 가업 잇기 제2부
  • 김광중 삼해상사주식회사 회장
  • 승인 2008.12.29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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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 39년 삼해상사 김광중 회장의 자전적 수기

  한국 김 유통의 대부(代父) - 김광중 회장의 가업 잇기
- 제 2 부

 구조조정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 인듯하다. 1982년부터 시작한 사업이 매년 300%이상 급신장을 하게 되자 3년째가 되던 해 부터는 군소업체가 난립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 맛김시장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제품부족 현상까지 발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보고 있던 대규모 종합식품업체들이 물실호기(勿失好機)다 하고 벌떼처럼 달려들기 시작했다.

 소기업이 힘들게 공들여 제품을 개발하고 시장까지 확장해 놓고 나니 대기업 무리들이 염치없이 달려들어 기존 시장 질서를 문란 시키고, 무자비하게 경쟁함으로써 김만을 전문으로 하는 우리와 같은 소기업들은 생존에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당시에 맛김시장에 뛰어들었던 큰 업체들로는 미원, 오뚜기, 해태, 동방유량, 동원참치 등으로 동방유량과 동원산업은 현재까지도 사업을 이어오고 있으나 나머지 회사들은 전문성이 없고 부가가치도 떨어져 포기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지난 1986~1987년은 경제여건이 어려워져 더 이상 감내하기 어려운 적자상태에 빠져들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전국적으로 노사문제가 큰 쟁점으로 부상하면서 기업하는 사람의 의욕을 저하시켰을 뿐 아니라 과연 누구를 위해서 사업을 하는 것인지 자문해 보고 싶은 심정이 들 정도였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직업이 있다. 하지만 그 직업은 이 사회가 필요로 할 때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을 때는 자연 소멸되기 마련이다. 또한 수요공급의 원칙에 따라 수요보다 공급이 많을 때는 오히려 이익보다는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이 자명한 이치다.

 우리 김 업계도 일시적인 난립으로 이익은커녕 처참하기 그지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분명 김 사업이 꼭 필요한 사업이긴 하지만 일시적으로 포화상태가 되어버린 상황을 지켜보면서 작전상 잠시 후퇴했다가 어느 정도 시장이 정비되면 다시 시작하는 것이 효과적이겠다는 판단에 따라 조미김 부분 사업체를 다른 회사에 매도하기로 했다. 다행히 매도 의사를 밝힌지 5일 만에 매매가 전격적으로 성사되어 회사부도의 위기를 면했음은 물론이고 종업원까지 전원구제 할 수 있었다.

 김 업계가 어려운 형편에서 벗어나기까지는 약 10년의 세월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하고 그동안 소규모로 사업의 명맥만 유지하면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그 10년의 세월을 2세를 위한 대물림 교육기간으로 생각하고 어렵더라도 참고 견디기로 한 것이 벌써 19년째에 접어들었다. 다행히 그동안 쌓아온 신용과 「명가김」이라는 브랜드 이미지는 더욱 높아졌고 약 300%나 신장하면서 업계의 선두주자 자리를 5년 연속해서 유지할 수 있었다. 특히, 지난 1999년에는 업계 최초로 수출 500만불 탑을 수상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부연할 것은 가공 김 업체는 양도했으나 유통을 담당하던 회사는 남아있었기 때문에 거래선의 요청에 못이겨 양도한 지 3년 후부터 「명가김」이라는 새로운 브랜드로 다시 맛김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영업 방법 면에서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즉, 과거에는 국내위주의 내수시장을 겨냥한 생산에서 이제는 수출과 주문생산에 의존하는 안전한 방법을 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대물림

 운동선수나 공직자 등은 연령에 따라 은퇴시기와 정년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업을 하는 사람도 예외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유업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데로 하고, 나이를 먹어 병약할 때까지 하다가 죽거나, 병상에서 본의 아니게 후계자에게 인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이유는 본인이 자수성가한 사람의 경우 사업에 대한 애착과 남들을 믿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병폐가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창업한 사람들은 특별한 사람이다. 고집이 세다든지 욕심이 많다든지, 부지런하고 투기성이 있다든지, 무엇인가 다른 점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그 2세들은 보통사람이기 때문에 특별한 생각과 결단을 요하는 사업을 하는데 부족함이 많기 때문에 섣불리 자기가 창업할 사업을 계획적으로 물려주지 못한 채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맞고서야 사업에서 손을 떼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선배나 주변에서 2세에게 너무 늦게 사업을 인계함으로써 후계자가 사업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일실하여 실패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기 때문에 나는 공직자처럼 55세를 기준으로 대물림 10개년 계획을 세우고 사업을 대물림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실천해 왔고 또 현재도 하고 있다.

 

 나의 대물림 10계명

 많은 사람들이 자식과 골프만큼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난 2005년 12월 10일 창립 37주년이 되는 날 2세를 사장에 임명시키면서 1차 대물림을 완성했다. 2세가 취업한지 17년 만의 일이다.

 사업을 대물림 하기란 많이 힘들고 어려운 일중 하나다. 내가 알고 있는 주변에서도 부모의 재산이 너무 많아서 일을 할 생각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돈 쓰기부터 배워서 웬만한 일거리는 양이 안차고 돈을 준 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어 패가망신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때문에 나만은 그들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처음부터 마치 정원사가 씨를 뿌리고 묘목에서부터 큰 나무로 자랄 때까지 나무를 보기 좋고 값있게 가꾸듯이 계획을 세워서 2세 경영을 위한 점진적인 노력을 해 왔다. 하지만 12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미완 상태라서 10년 계획을 15년으로 연장해야 할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이름 석자와 자식을 남기고 생을 마치는데 가능하면 자기가 창업한 사업을 남기고 그 사업이 대를 이어서 오래 영속 되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을 것이다. 비록 자식이 아니더라도 창업 이념만 계승해 준다면 관계가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동안 대물림을 위해서 한 일 중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2세의 학교 전공 선택

 내가 아무리 대물림을 하고 싶어도 사업을 인계받을 본인이 적성에 맞지 않거나 원치 않을 때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인데 학교 전공부터 아들과 틀어지기 시작했다.

 결국은 내가 원하는 한국외대 일어과로 진학했지만 처음 아들은 연·고대 상과를 지망하겠다고 나섰다. 이 계획을 변경하는데 힘들기도 했지만 직접 명령식으로 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우회방법을 택했다. 그 방법은 연합고사를 보고 대학 원서접수 전에 있었던 일이다.

 하루는 아들을 불러서 용돈이 부족하지 않은가하고 물어보았다. 물론 부족하다는 대답이었다. 그 대답이 나올 것을 예상했던 바라 나는 그의 말에 아직은 고등학교 학생 신분이므로 그 이상의 용돈은 더 줄 수는 없고 아르바이트라는 부업이 있는데 해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용돈도 벌고 사회경험도 하고 일거양득이 아니겠는가? 하고 물은즉, 쾌히 하겠다고 해서 그 때 처음으로 내가 하고 있는 사업장에 잡역부로 아르바이트를 해보도록 했다.

 그 과정을 통하여 사회와 아버지의 직업, 그리고 본인의 장래문제를 실제와 부딪히면서 조명해 보도록 했으며 거래하는 은행지점장과 종합상사 간부 입을 통하여 진학방향을 바꾸도록 종용했다.

 일본어를 선택토록 한 이유는 김 사업의 경우 세계에서 일본이 가장 선진화되어 있고 또 일본어가 2세에게는 가장 필요한 외국어가 될 것이고 만약 국제결혼을 한다 해도 생활문화가 비슷한 점도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현재 우리 회사는 일본과 교역량이 제일 많고 그 인연으로 며느리도 일본어를 전공한 고등학교 선생을 얻어서 사업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둘째, 사업에 대한 이해

 일반적으로 김 장사를 한다하면 행상이나 시장의 어물가게를 연상하게 된다. 하지만 김 사업도 그 규모와 역할에 따라 큰 기업이 될 수가 있다. 내 아들도 생각하는 범위가 전자에 속해 이를 이해시키기 위해 회사에 나와서 아르바이트를 하도록 했다.

 일을 시키면서 은행이나 종합상사에 심부름을 보내서 간접적으로 김 사업을 이해하도록 하고, 김의 수출이나 유통업도 국가와 사회가 꼭 필요로 하는 사업임을 인식토록 했다. 심부름을 보낼 때는 반드시 상대방에게 사전에 연락해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고 조언해 줄 것과 나에 대한 피알(PR)도 아들에게 간접적으로 해주도록 부탁을 해 두었다.

 한편으로 일본에 언어연수를 겸하여 선진화된 일본 김 업계를 견문토록 했는가 하면 명절에 직원들이 귀향할 때 공장에 가서 숙직을 시키기도 했으며, 때로는 백화점 매장에 판매원으로 아르바이트를 시키기도 했다.

 셋째, 결혼을 한 후 직업을 갖도록 했다

 ‘혼자서는 반쪽짜리 인생이고 결혼해서 가정을 가짐으로써 완전한 사회인이 된다’는 말이 있듯이 직업선택에 있어서도 배우자의 역할이 자못 크다. 배우자가 이해를 못하든지 반대하는 경우는 사업을 계속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대 생활 중에 약혼을 했고, 제대와 동시에 결혼을 시켰다. 또 다른 이유는 부양가족이 생김으로 인하여 직업을 가져야 할 이유가 확실해 지기 때문이기도 했다.   <계속>

2007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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