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현의 양망일기 ② 마린보이의 꿈
하동현의 양망일기 ② 마린보이의 꿈
  • 하동현 작가
  • 승인 2018.04.18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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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 집에는 ‘마린보이’가 둘이나 된다.

 하나는 전직 뱃놈으로 ‘늙은 마린보이’가 되어버린 바로 나고, 또 하나는 해병대에 자원입대해 ‘마린보이’ 칭호를 얻은 작은 아들이다.
 기억을 더듬어 내 군대 문제를 정리해보면 이렇다. ‘원양어선승선특례’로 군복무를 면제받았으며 3주간 기초군사훈련을 이수하여 육군이병 제대로 간주되고 병과는 ‘선박운용’.
 특수하게 선박관련인데 육군이병제대라니 어디가나 군대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한국남자세상에서 대놓고 말하기가 좀 초라한(?) 편이다.
 대학입학동기가 40명이 못되었는데 입학하자마자 광주민주화운동(당시에는 ‘광주사태’라 칭함, 외신도 반란, 폭동을 의미하는 THE GWANGJU UPRISING으로 표기)이 일어나 휴교령이다 뭐다 얼떨떨하던 차에 겨우 몇 명을 제외하고 1학년 때부터 입단해야하는 ‘해군학군단’ 모집 시기를 놓쳐버렸다. 
 그때 우리는 ‘특례보충역’이었다. 요즘은 올림픽이나 국제 대회 입상자들에게 국위선양에 상응하는 관용을 베푸는 제도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주된 취지는 방위산업체나 원양선박에 승선하는 젊은이들에게 일정기간 근무를 하면 군복무를 면제해주는 조건이었다.
 이면에는 가장노릇으로 식솔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숙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나와 동승했던 선원들 모두가 ‘자상한 아버지’보다 ‘굶기지 않는 아버지’의 덕목이 우선이던 시절이었으니.
 5년 내 3년 이상 승선조건이었다. 당시 원양선들의 어로계약이 2년 또는 30개월 정도가 태반이었으니 이 또한 짧은 기간이 아니었다. 두 번 어로계약을 마쳐야 된다는 계산이다.
 우리는 이를 ‘노예계약’이라 불렀다. 시간에 쫓기거나 해서 금방이라도 침몰할 것 같은 엔진만 살아 숨 쉬는 소위 ’똥배‘에 올라야 할 경우도 있었으므로.
 “쯧쯧, 이 어린 것들이 그리 멀리 배 타러 간다고…….”
 대폿집 할머니는 출국인사차 들러 막걸리 몇 잔에 취해 ‘선구자’를 목 터져라 떼 합창하던 우리를 보고 눈물을 찍어냈다.
 
 

2              마린보이의 꿈

 

위도 20도, 아열대의 바다는
끈적거릴 뿐 움직임이 없다.
끝없이 반복되는 투망(投網)질로
바람도 힘없이 가라앉아
새파란 청춘은 비릿한 냄새에 친친 감기고
숨 막혀 견디지 못한 나는
50미터, 깊은 곳에서 예망(曳網)중인
그물의 전개(展開) 상태를 확인해야겠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고
바닷속으로 뛰어 들고 싶었다.

두꺼운 현실의 장막을 찢고
발가숭이로 수압을 잊는 곳,
푸르디푸른 빛의 세계로
와이어(wire)를 잡고 따라 내려가서
천장망(天仗網)의 입구를 붙잡고
물살을 멋지게 타보기도 하면서
갑오징어, 도미, 갈치, 민어등과 만나고 싶었다.
그때 나는 마린보이가 되어
그들의 은빛 비늘, 현란한 춤의 절정을
산소 껌처럼 질겅질겅 씹으리라.

물 바깥의 세상을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런 상황이
오히려 나를 미치게 만들어
나와는 완전히 다른 종족들과
연애를 하고 새끼를 낳고
생명이 다할 때까지
아니 특례보충이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행복한 용궁 속에서 머물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대학동기 친구이자 시인인 최희철의 시 ‘마린보이의 꿈’ 전문이다.
 피 끓는 새파란 젊은 나이에 고기잡이배에 올라 바다는 인간의 손에 고기를 거저 쥐어주지 않고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교훈을 배워가던 그때, 사방에서 우리를 후려치며 흔들어대던 파도에 갈 곳 없이 헛헛하던 마음을 그렸다할까.
 ‘노가다’산업의 일선이라는 자기비하와 ‘마도로스’라는 허울의 낭만을 알아가던 ‘쫄따구’ 항해사 시절을 돌이켜 보며 마흔 넘어 써본 글 한 편 이라했다.
 다시 읽어봐도 절창이다. 문학적 성취는 모르겠고 우리만이 알던 세상, ‘그들만의 리그’에 대한 회상에 울컥 가슴이 벌렁거린다.

 청춘이며 낭만이며 사치스런 단어들을 모두 파도에 저당 잡힌 채, 자본이 기획한 터전에 화폐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스물 셋에 배에 올라 천지도 모르고 개고생을 하던 심정을 읊었는데, 30년도 넘은 그 시절의 기억들이 액션영화의 슬로우비디오 화면처럼 생생히 떠오른다.
 그때까지의 짧은 인생과 경험만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이 우리 앞의 바다에 펼쳐져있었다. 바다와 배라는 고립된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지고 누려야 할 영역이 어디까지가 안이며 어디부터가 밖인지도 몰랐다.
 바람의 고향은 바다가 틀림없었다. 사방팔방에서 난리를 치며 불어오는 바람과, 그에 장단을 맞춰 날을 세워 배를 덮치던 파도는 허한 마음의 젊은 뱃놈에게 이상한 카타르시스를 던져주고는 했다.
 아직도 생생하다. 술 취한 젊은 뱃놈에게 바다가 안개속의 여자처럼 속삭이던 물음.


-너, 나랑 평생 살 수 있어?


 파도 속의 술 한 잔은 달고 또 쓰렸다.
 아, 바다와 한판 맞장 뜨는 법을 배워가던, 그 젊고 무모하던 스무 살 푸릇한 시절.
 그때 누가 나에게 물었었다. 아마 여자였을 것이다. 바다는 나에게 어떤 의미냐고. 몇 번이고 연습한 발표원고를 외듯 주저 없이 대답했다.
 “바다에 내 인생을 맡겼으니 이제 바다가 내 전부가 되어버렸다.”
 해 놓고 보니 멋있으려 비장하게 꾸며 낸 잠언 같은 말이 되고 말았다.
 물위에 선을 긋는 것과 같은 젊음이었다. 우리를 키워낸 것은 파도와 바람이다. 고통과 황홀을 번갈아 선사하던 바다에서의 세월이 내 삶을 조련하는 시간들이었을까. 바다는 우리가 남긴 자취를 기억이나하고 있을까. 그곳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고 깨우쳤으며 문신처럼 몸에 새긴 바다에서의 경험으로 더 크고 먼 세상으로 걸어 나갈 수 있을까.
 한바탕 신명나는 굿판의 어깨춤사위 같은 너울과 파도, 그리고 그저 캄캄한 어둠속에서 희뿌연 여명으로 끝없는 가능성을 보여주던 그 바다. 부스러지는 파도 위에 내 흔적을 새길 수 없어 천고의 시간처럼 사라져버릴지라도 험한 뱃길을 밝혀나가는 고독한 항해자의 리스트에 내 이름을 올리고 싶었다.
 
 후에 바다를 버리고 마주쳤던 뭍에서의 삶은 고단하고 숨 가빴다.
 ‘빼도 박도 못하는‘ 사고를 미리 당겨 쳤거나, 그때만 해도 한 번 마음을 준 남자를 버리고 떠나는 게 가슴이 쓰려 선심성(?) 결혼을 해준 이 땅의 지고지순한 애인을 가진 몇을 제외하고는 대개 결혼이 늦었다. 나이보다 훨씬 더 들어 보인다는 의심까지 받으며 이러구러 가정이란 걸 꾸리고 흔들릴 때마다 한 잔에, 황천파도아래 비틀거리며 그물을 끌던 배처럼 여기까지 살아왔다.
 예수님이 떡 다섯 조각과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다는 ‘오병이어 의 기적’, 그 대목에 견주어 원양어선 선장으로 목숨을 건 도둑고기를 잡아 국민 단백질 공급에 일조 했니 어쩌니 혼자 잘나서 물고기란 단어만 들어도 반가워했던 자부심은 할아버지 묘를 옮길 때 친척 분이 모신 풍수가의 준엄한 경고에 산산조각이 났다. 내가 보기엔 영락없는 엉터리 땡초 스님인데 그가 하는 말이 기가 막히다. 원양어선 출신이라니 엄청난 생명을 살상 했을 것이므로 항상 참회하고 근신하라. 
 헷갈렸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했다가 ‘못 올라 갈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 한다. 내 근육과 판단만으로 맞서 나갔던 바다에서의 시간과 달리 육지서는 그저 모든 게 서투르고 피곤했다.

 

3 호랑이 띠 작은 아들이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다.
 공부는 뒷전이고 축구다 태권도다 운동에만 열을 올리며 내가 볼 때 참으로 한가한 대학생활을 즐기는 것 같더니 2학년을 마친 어느 날, 또 무슨 운동시합을 마치고 뒤풀이라도 한 듯 옅은 술 냄새를 풍기며 집으로 들어섰다.
 역시 늙은 마린보이들과의 동기모임에서 술 한 잔 걸치고 라면야식으로 해장 중이던 나에게 앞 접시와 젓가락을 들고 한 술 거들겠다며 식탁으로 다가왔다.
 다시 캔 맥주가 곁들여지며 부자간에 술판이 벌어졌다.
 “아버지도 군대 면제고 형은 축구선수로 활약하다 인대가 끊어져 면제니 가문을 위해서 저 하나라도 제대로 된 군 생활을 하고 싶습니다.”
 엉뚱한 구석이 있는 녀석의 농담 같은 선언에 웃고 말았지만 어투가 자못 비장했다. 뒤이어 덧붙이는 사족은 늙은 마린보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왕에 가야 할 군대라면, 피할 수 없는 것은 차라리 즐겨야한다는 결심이 한  몫 한 것 까지는 좋았으나, 낙타가 바늘구멍 격으로 취업도 어려운 세상에 아무리 털어 봐도 헌혈 몇 번 한 것 말고는 내 세울 구석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기에 그나마 ‘군대스펙’이라도 업그레이드 해야겠다는 그 말.
 올해 초 몰아친 극강한파의 혹독한 추위에 바람을 몰고 입대하더니 어느새 7주간의 기초훈련을 거쳤단다. ‘연평부대’로 배치되었다는 소식을 받고 수료식에 참석했다.
 영하의 추위에 강풍주의보까지 내린 날이다. 전국에서 모인 가족들은 한 시간 전부터 연병장에 집결해 벌벌 떨면서 아직도 품안의 코 흘리게 같은 아들들을 애타게 기다렸다.
 어디선가 세상을 삼킬 것 같은 함성이 몰아쳤다. 극기훈련을 수료한 이등병 해병들이 열을 지어 청룡처럼 늠름하게 걸어 나오더니 ‘물개박수’를 치며 연병장이 떠나가라 ‘팔각모사나이’를 목 터지게 불렀다. 장관이었다.

 

팔각모 얼룩무늬 바다의 사나이
검푸른 파도타고 우리는 간다.
내 조국 이 땅을 함께 지키며
불바다 해쳐간다 우리는 해병

 

 아들은 소대 기수로 차출되어 펄럭이는 깃발을 움켜쥐고 몰아치는 바람에 지지 않으려는 듯 꿋꿋하게 서있었다.
 젊은 이등병들의 함성과 열기에 추위는 다 물러갔다. 검푸른 파도, 바다의 사나이, 불바다. 가사 몇 마디에 덩달아 늙은 마린보이의 가슴도 쿵쿵 뛰었다.
 미담도 있더라. 아들의 동기 한 놈, 싱가포르로 이민 간 집안의 귀한 아들이 해외영주권을 포기하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신념으로 자원입대해서 귀신 잡는 해병이 되었다는 이야기. 모두가 아낌없는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나는 내 아들을 이 세상에 있게 했으나 마주칠 세상을 헤쳐 나가는 것은 순전히 이놈의 몫이다.
 아직도 내게는 변치 않는 생각이 하나가 있다. 그 사람을 알려면 그의 청춘이 어떠했는가를 먼저 알아야한다고. 치열한 열정으로 마주쳤거나 무엇인가를 사랑했던 그 ‘시절’들은 의미를 가진다.
 시간은 기어코 떠나가기 마련이고, 살아 온 세상의 모든 것들이 흐르는 세월에 힘없이 잊히고 사라지지만 누구에게나 결코 버릴 수 없는 것이 있다. 알 수 없는 넓은 세상으로 인도하는 출구였으며, 부활의 몸짓을 안아주던 공간인 바다가 나에게는 그것이다.   
 내가 온몸으로 겪어 낸 바다와 이놈들이 마주칠 바다는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를까.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특례보충역’을 택했던 젊은 뱃놈에게 빵과 옷을 제공하는 밥줄이었든, 젊은 해병의 거친 숨결을 포용해주며 국토방위의 전선으로 펼쳐진 바다든, 나에게 그랬듯이 아들의 가슴에도 흥겨운 남사당패 가락처럼 바다가 너울대기를 바랐다.
 우리 집에는 ‘마린보이’가 둘이나 된다.
 

PROFILE  하 동 현 작가

부경대학교(구, 부산수산대학) 어업학과를 졸업하고 원양어선선장, 운반선 감독관을 역임하며 전세계 망망대해를 누볐다.
'2016년 부산일보 해양문학상 우수상(중편소설)'을 수상했고 한국해양문학가협회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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