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의 두 얼굴
해적의 두 얼굴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 승인 2011.03.15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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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사상의 진수- 바이킹정신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인류문명의 개화와 번영은 선각자들의 진취적 욕구와 끊임없는 도전정신으로 성취되었다. 그 표상 한가운데 8세기 말부터 11세기 후반에 걸쳐 유럽 각지를 정복한 북(北)게르만족 바이킹(Viking)이 있다.

처음에는 전리품 획득을 구실로 무방비 상태인 교회나 수도원을 노략질하였으나 차츰 행동반경을 넓혀나가 점령한 타국 하구나 해안을 교두보로 삼은 다음 작은 나라는 아예 식민지로 삼았고, 강대국과는 교역을 병행하면서 필경 유럽 일대에 북해제국(北海帝國) 등의 봉건국가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엄밀히 따져보면 그건 해적질이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오늘날 바이킹을 진취적 모험가 내지는 개척자 반열에 꼽는 것은 ‘지리상 대발견 시대’보다 수 세기나 더 앞서 북미대륙 등의 존재를 확인한 역사적 공적에 근거해서다. 그 놀라운 원정항해는 노르만 계가 주도하였는데, 잉골푸르 아르나르손이라는 추장은 이미 서기 870년, 북위 60도선을 따라 서쪽으로 항진한 끝에 ‘아이슬란드’를 발견하였고, 그 1백년 후인 985년에는 에릭이 ‘그린란드’에 상륙한 이래 나중에는 캐나다 동부의 뉴펀들랜드까지 답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인류 최초가 되는 그 항해야말로 콜럼버스의 바하마제도(산살바도르 섬)를 발견한 시기보다 무려 5세기나 앞서는 대장정인 것이었다.


바이킹은 세계를 정복한 위대한 전사

1983년, 한국 TV방송 사상 최초가 되는 3부작 해양다큐멘터리 <오대양을 가다> 제작을 위해 필자를 포함한 제작팀은 노르웨이의 오슬로를 찾았었다. 목적은 종결편인 3부에서 ‘세계를 변화시킨 해양사상’을 정의하기 위해서였는데, 그곳에서 만난 후손 한 사람이 ‘바이킹의 정신이야말로 오늘날 말하는 해양사상의 근간이며, 따라서 그들이야말로 세계를 정복한 위대한 전사들’이라고 단언하는 것을 들었다. 하기사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나오기도 3~4세기나 더 전, 인도나 중국의 존재조차 알지 못 하던 시대에 바이킹은 이미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하고 있었으니, 그 후예들이 ‘우리 윗대 할아버지가 세계를 정복했었다’고 우기는 주장을 타박할 방법이 없어서 그 내용을 그대로 방송에 태울 수밖에 없었다.

당시는 아직도 미완의 시대였고, 황량한 북구의 만년빙에 둥지를 튼 열악한 환경의 그들로서는 부득불 먹고살기 위해 남의 나라로 쳐들어가 재물을 강탈해 올 수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바이킹은 바로 그 야만적 침탈과 노략질을 진취적 도전정신으로 미화하면서 세계를 하나로 묶는 해양사상을 정립했던 것이다.

바이킹의 원양항해가 가능했던 것은 그 시대에 이미 얕은 하천을 거슬러 오르는 평저선(平底船)이며 대양항해가 가능한 쾌속군선(快速軍船) 등을 건조한 조선술에다 천문학을 적용한 뛰어난 항해술 덕분이었는데, 지금도 오슬로 근교 박물관에는 바이킹쉽(Viking-ship)의 하나인 ‘오세베르그선’이 어엿하게 전시되어 있음을 본다.

하지만 소말리아 해적은 무엇인가

해적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기는 바이킹을 15세기나 더 앞선 고대 때부터였다. 그 시대에 벌써 크레타문명을 멸망시킨 아키이아 해적들이 이집트와 페니키아의 상선과 도시들을 습격하면서 세상을 공포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다음은 ‘지리상 대발견 시대’의 전개와 함께 구교국(舊敎國) 에스파냐가 중남미에 광대한 식민지를 확보한 다음 재물을 실어 나르기 시작하자 전혀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해적시대가 개막되었다. 특히 16세기끝 무렵 엘리자베스 여왕 당시, 잉글랜드 남서부에 은거하고 있던 바이킹의 후예들이 대서양과 발트 해를 연결하는 도버해협에서 에스파냐 배들을 공격한 해적행위는 가히 전쟁을 방불케 하였고, 심지어 J. 호킨스며 F. 드레이크 등 악명 높은 해적들은 카리브 해까지 원정하여 에스파냐 식민지를 습격하거나 전리품을 챙긴 공로로 작위 칭호까지 받아냈다. 당시에는 해적에게 재물을 빼앗기면 국왕은 자국 선장에게 ‘사략허가증’이라는 것을 발급하여 어느 항구나 선박을 불문하고 빼앗긴 만큼 재물을 되찾아오도록 하는 어처구니없는 국가적 뒷받침까지 보편화되고 있었으니, 말하자면 해적질의 악랄함과 야만성에도 불구하고 그 행위야말로 나라를 부강케 하는 가장 합리적이면서 적극적인 국가적 생산활동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17세기 들어서는 카리브 해를 거점으로 한 ‘바카니어 해적’들 비화는 자주 해양모험 영화로도 소개되고 있고, 명?청 시대에는 ‘정씨 부자(鄭氏父子)’로 일컬어지는 중국판 해적들이 푸젠성(福建省)을 중심으로 대륙연안을 장악하였다는 기록과 함께 나중에는 네덜란드 인을 내쫓고 타이완을 영유하는 등으로 그 세력이 가히 창대하였다. 또 이슬람경전인 코란에 ‘모든 선박을 강탈하는 왕’이라는 구절이 들어있을 만큼 아라비아 해적들은 가히 공포의 대상이었으며, 세계의 관문인 말라카해협으로는 말레이인 해적들의 기승으로 세계의 통항선들은 지금도 그곳을 다 빠져나갈 순간까지 뜬눈으로 갑판을 지키는 이중고를 겪고 있으며, 조선 시대에 남해안을 노략질한 왜구(倭寇) 또한 그 범주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비무장으로 평화로운 항해에 종사하는 선원들에게 해적은 그야말로 공포의 적(的)이요 야차다. 그래서 생포한 해적은 까다로운 법적 절차를 거칠 필요도 없이 사살하거나 또는 마스트에 거꾸로 매달아 말려 죽여도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지난 1월 30일, ‘아덴만 여명작전’ 끝에 생포한 5명의 소말리아 해적들이 법의 심판을 받기 위해 한국으로 압송됐다(덕분에 4개월간 억류되고 있던 ‘금미305’마저 풀려났다는 낭보도 들린다). 이로써 한국 해운업 사상 최초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해적재판이 곧 한국 법정에서 열릴 판이다. 그들 야만적인 소말리아 해적들을 보면서, 그 옛날 필자가 원양선 선장을 하던 시절 인도양을 항해하는 동안 선수 전방으로 꼼지락거리는 겨우 10톤 남짓한 목선을 보는 것만으로도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던 순간순간을 생각하면, 과연 저들에게도 민주적 내지는 법리적 절차가 필요한가라는 막된 생각까지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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