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양 개척사> 제3부 한국 해운산업 개척사 ②
<오대양 개척사> 제3부 한국 해운산업 개척사 ②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 승인 2011.01.20 15: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선장작가 천금성의 기획다큐멘터리

 6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한국 해운사상 가장 핵심적으로 기여해 온 해기사(海技士)와 일반선원의 배출이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가에 대해 고찰해 보기로 한다.
세계 해운사(海運史)를 상고해 보면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혹은 네덜란드 등 선진 해양강국들은 이미 고대 때부터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한 천문학을 바탕으로 항해술이 연계되면서 중세 들어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나 마젤란의 세계일주 성공으로 지구상 대변혁을 가져온 지리상 대발견시대가 열린 것으로 되어 있다. 그에 따라 선원 양성도 매우 조직적으로 이루어져 모험심이 강하거나 미지의 세계에 대해 도전정신이 뜨거운 젊은이들이 앞 다투어 해양으로 진출하였다.
반면 오래 전부터 농본주의(農本主義)에 몰입된 조선사회는 ‘무당과 뱃놈에게는 딸을 주지 않는다’는 식으로 선원비하(船員卑下) 사상이 팽배하여 어부라면 당시 신분 분류상 한 잣대인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어디에도 끼지 못 하는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해 있었다. 그러니 해운이나 해양진출의 가장 핵심 요건인 선원을 양성하는 기관이나 조직이 존재할 까닭이 만무했다.
그런 차에 구한말인 광무(光武) 6년(1903년), 일본정부는 무역회사인 삼정물산(三井物産)을 앞세워 승립환(勝立丸)이라는 증기선에다 고물 대포 하나를 장착한 다음 군함(軍艦)이라고 속여 당시 돈으로 55만 원이라는 엄청난 가격으로 한국정부에 팔아먹었다. 그게 한국으로는 최초의 대형선 접촉이었고, 따라서 비로소 해양에 눈뜰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총톤수 3,400톤으로 14노트의 속력을 가진 그 배는 원래 영국의 상선이었으나 연료인 석탄이 워낙 많이 소모되어 화물창보다 석탄창고가 더 커야 할 만큼 경제적으로 빵점이었는데, 일본은 갑판에다 대포 하나를 장착한 다음 군함(軍艦)이라고 속여 엄청난 바가지를 씌워 한국에다 팔아 먹었던 것이다. 그래서 점잖은 양반들이 갖다 붙인 별호가 ‘석탄 낭비선(Coal-eater)’이었다.
군함이라는 거짓에 속아 배를 인수한 구한말 정부는 그럼에도 ‘양무함(揚武艦)’이라 이름 붙여 초대 함장에 파견 유학생으로 동경고등상선학교 항해과를 나온 신순성 씨(앞 호에서 언급된 부산호 태극기 주인공)를 임명하였으나 도대체 화부(火夫)조차 충원할 길 없는 배를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 그 결과 대한제국의 주력함은 화통에 불 한 번 지피지 못 하고 하릴없이 인천항에 묶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악운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듬 해(1904년) 2월, 한반도와 남만주(南滿洲) 지배권을 둘러싸고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의 발틱함대와 맞붙게 된 일본은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양무함을 순양함으로 개조하여 도고 헤이하지로(東鄕平八郞) 사령관이 이끄는 일본함대에 편입시켰다. 그 전쟁에서 일본은 제정러시아 표드로1세가 재임 중일 때 창설된 무려 300년 역사의 발틱함대를 대한해협에서 괴멸시켜 승리를 거두었는데, 일본은 고맙게도 전쟁이 끝난 다음 배에 장착하고 있던 일체의 무기를 철거한 다음 원래의 상선으로 개수(改修)하여 한국정부에 반환하였다. 그러나 배를 되돌려 받았지만 여전히 선원을 확보하지 못한 양무호는 화물을 실어 나르는 일조차 엄두를 내지 못 하고 재차 부산항 세관 부두에 묶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정박선 신세로 보낸 세월이 처음 배를 인수하고부터 어언 5년이었다.
초대함장인 신순성 씨는 앞 호에서 언급한 구한말 군함인 ‘광제함’을 거쳐 이미 퇴역한 상태였으므로, 관리를 맡은 부산세관은 양무호를 고철로 두기보다는 선원양성 도구로 이용하는 게 낫다고 판단, 항해와 기관 두 직종의 수련생을 모집하기로 하고 1908년 7월 9일부터 13일까지 무려 5일에 걸쳐 당시 <황성신문>에다 ‘부산항 양무호 선원양성소’ 명의로 다음과 같은 모집광고를 내기에 이르렀다.

- 이번 한국인 자제들을 대상으로 우수한 해기사를 양성하기로 하고 부산항에 정박 중인 양무호 내에 해원양성소를 설립하였는 바, 항해 및 기관 양과 각 15명씩을 모집하니 지원자는 하기 조례(條例)를 명심하여 이달 20일한 부산세관 항무부(港務部)로 청원(請願)할 사(事).……

그런 다음 몇 가지 지원자 자격을 명기하였는데, ‘18세 이상 25세 미만의 한국인 남자로, 발육과 시력이 온전하면서 보통 수준의 독서가 가능하여야 하고, 수련 기간은 물론이고 수료 후에도 일체 가업(家業)에 관여하지 않고 전심(傳心)으로 관련 업(業)에 종사할 자’ 등으로 제법 엄격하였다.
그 같은 집중적인 홍보에도 불구하고 지원자가 극소하여 해원양성소로서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 하다가 이듬해(1908년) 다시 일본상사 소유로 국적이 바뀌었는데, 이후 양무호의 종적에 대하여는 어느 곳에도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그만 종적이 묘연해지고 말았다.
20세기 들면서 세계 해운계는 바다가 좁다며 온갖 종류의 배가 운항에 투입되고 있었으나 한국은 아직까지 어엿한 배 한 척 갖지 못한 처지여서, 일제 동안 일본선을 탔던 한국인 해기사들은 인천이나 부산항으로 입출항하는 타국적선들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는 처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7

정체된 흐름을 깬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한국을 식민지로 삼고 있던 조선총독부였다. 통상 지배국 통치자를 대리한 총독은 식민지를 억압하면서 수탁과 착취를 일삼으며 자국 이익을 증대시키는 게 주된 임무로 인식되고 있었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1918년) 세계적으로 해운업에 불이 붙기 시작하자 곧장 제기된 문제가 선원 공급의 절대 부족이어서 조선총독부는 그 같은 고마운(?) 일에 착수한 것이었다.
곧 조선총독부는 1918년 7월 초순, 당시에는 해운국(海運局)이라는 기구가 없었던 관계로 체신국(遞信局) 산하에다 해원양성소를 설립한 다음 인천의 출장소 창고를 교실로 쓰기로 하고, 본과인 고등해원반과 별과인 보통해원반 등 두 과로 나누어 희망자를 모집했다. 하지만 워낙 지원자가 적어 겨우 한두 명을 입소시킨 가운데 9월 15일에는 제 1회 본과 입학식을 겸한 개소식을, 10월 2일에는 별과 입학식을 추가로 가짐으로써 한국 최초의 해기사 양성기관이 출범하게 되었다.
인천 해원양성소는 꾸준히 교육을 실시하여 수십 명의 보통선원들을 양성해냈으나 고등해원반은 거의가 중도 탈락 내지는 자퇴하여 단 한 명의 완성품도 만들어내지 못 했다. 그러다가 개소 8년째인 1926년도에 이르러서야 겨우 두 명의 항해사를 배출해냈는데, 그 두 사람이야말로 신생 한국이 배출해낸 최초의 해기사였다. 그 중 한 사람이 나중 한국해군 창설에 기여하면서 2대 해군참모총장을 역임한 다음에도 평생을 한국 해운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금년(2010년) 5월 태종대에 소재하는 ‘해기사 명예의 전당’에 헌정(獻呈)된 박옥규(朴沃圭) 씨였다(참고로, 지금까지 헌정된 해기사는 영국 해양대학을 졸업하고 이승만 대통령 내각에서 내무?국방장관을 거쳐 나중에는 국무총리서리까지 지낸 申性模와 동경고등상선학교 기관과를 나와 한국해양대 설립을 주도한 李時亨 둘뿐이다).
하지만 다른 한 명의 동기생(李繼弘)과 함께 최초의 수료자가 된 박옥규 제독의 수료증에는 발급처가 인천양성소가 아닌 ‘진해고등해원양성소(鎭海高等海員養成所)’로 바뀌었다. 그것은 인천의 교사가 워낙 협소하여 개소한 지 8년째가 되는 1927년 8월말(수료를 앞두고), 현재의 해군사관학교 캠퍼스 자리인 진해 앵곡동으로 이전하면서 소명(所名)이 바뀐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진해고등해원양성소’가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여 오늘날 보는 한국해양대학교의 전신(前身)이 된 것이었다.
이후 진해양성소는 해방되던 1945년도까지 매년 1~7명씩의 해기사를 수료시키면서 항해과 51명과 기관과 35명 등 누적 86명의 고급선원을 배출해낸 이외에 보통과는 외국인을 포함, 모두 363명을 수료시키는 업적을 남겼다.


8

조국광복은 나라의 근간이 통째 변혁을 겪는 격동의 시대를 불러왔지만, 특히 적수공권 처지인 해운업계에서는 그야말로 조국의 미래를 내다본 해기사들에 의해 갖가지 도전이 전개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해기사 양성을 목적으로 앞서의 진해양성소를 발전적으로 변혁시켜 ‘진해고등상선학교’를 설립한 이시형이었다.
일제하이던 1936년 동경고등상선학교 기관과를 졸업한 그는 곧 한국 유일의 해운회사인 ‘조선우선’에 입사하여 처음으로 2,500톤급 선박(新京丸)에 3등기관사로 승선했다. 당시 조선우선은 20여 척의 증기선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모두 조선총독부 명령에 따라 조선~일본, 조선~북중국, 일본~북중국 간의 연안항로를 뛰고 있었다.
각선의 인적 구성을 보면 한국인은 대부분 보통선원이었고, 갑판장이나 조기장 등 직장 급은 몇 명에 불과한 반면, 선장을 비롯한 고급사관은 거의 일본인들이 차지하고 있어서 언제나 한국인들이 몰리는 서먹서먹한 분위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시형 3기사가 승선하였으니 한국인 선원들에게는 정신적 지주가 될 수밖에 없었다.
개성이 강한 그는 또 선장을 비롯한 일본인 사관들에게 대들기 예사여서 그 결과 매번 인사고과에서 불이익을 당한 나머지 다른 사람에 비해 기관장 승진이 수년이나 늦었다고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다. 그는 또 일본선에 승선한 연유로 자칫했으면 수중고혼이 될 뻔하였다고 쓰고 있다. 그것은 승선 5년째인 1941년 12월 8일(진주만 기습 공격일), 그가 1기사로 승선하고 있던 ‘흥동환(興東丸)’이 군수품을 싣고 대만 인근을 지나다가 미국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아 동행하던 ‘후지환(富士丸)’은 격침되었으나 그가 타고 있던 배는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하였다는 게 그것이다. 하지만 날짜를 보면 그의 증언에는 다소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격한 바로 그 날부터 미군 함정이 태평양 전역에 걸쳐 마구잡이로 일본선을 격침시키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항해를 계속, 배가 목적항인 ‘하이난다위(海南島)’에 도착하자 주권사상이 강한 그는 한국인 선원들을 불러 모아 ‘머지않아 일본은 패망한다. 우리가 더 이상 일본선을 타고 있으면 틀림없이 개죽음을 당하고 만다. 그러니 이번에 귀국하면 무슨 꾀를 부려서라도 배를 내리는 게 상책이다. 그런 다음 고향으로 돌아가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는 게 좋다’는 식으로 일장 연설을 하였다고 한다. 다음날 당연히 일본인 선장(堀秀篤)이 호출하여 무슨 소리를 지껄였느냐는 닦달을 받았으나 적당히 얼버무려 위기를 모면하였다는 게 그의 증언이다. 그리고 그는 배가 일본에 입항하자마자 꾀병을 부려 군의관으로부터 하선 허락을 받아서는 그 길로 고향(인천)으로 돌아간 것으로 되어 있다.
귀향한 그는 조국광복의 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그의 꿈은 언제나 해방 조국이 ‘해운부흥(海運復興)’을 이루는 데 있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하선한 다음(일본 패망을 3년여 앞둔 1942년 무렵) 월남 캄란 만에 기항한 흥동환이 미군 함정의 공격을 받고 승조원 대부분이 몰살당하였다는 후일담이다. 만약 그가 계속하여 승선해 있었다면 그 역시 캄란 만의 물귀신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해방이 되었어도 살아남은 해기사들은 천직인 국적선(國籍船)을 탈 기회가 없었다. 그리하여 눈을 돌린 것이 일제 동안 일본인에 의해 운영되던 조선우선의 인수였다.
그 무렵 이시형은 마침 요즈음의 노조(勞組) 비슷한 ‘해원동맹(海員同盟)’에서 위원장 대리를 하고 있었는데, 처음으로 행동에 나선 일이 일본패망으로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된 조선우선의 인수 작업이었다. 그 작업이 성공한다면 그가 몸담았던 회사인 만큼 경영에 직접 뛰어들 수도 있을 뿐 아니라 향후 한국의 해운업을 선도할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에서였다.
그리하여 동경고등상선 항해과를 나온 연배로 15년이나 선배인 유황렬(劉恒烈) 선장을 앞세우고 20여 명의 선원들과 함께 아직도 간판을 내걸고 있는 조선우선 일본인 사장실로 쳐들어가 그 동안 선원들을 착취한 배상금과 퇴직금 등을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하지만 일본이 패망한 순간부터 발이 묶여 귀국도 못 하고 맨손뿐인 일본인 사장이 할 말은 ‘후일 지불하도록 노력하겠다’는 답변뿐이었다(그 후로도 배상금 지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거기에 해원동맹은 크게 고무되었다. 그래서 다시 사나흘 후 재차 조선우선을 찾아가 이번에는 좀 더 크게 나갔다.
“여보시오! 당신네 나라는 이미 패망하지 않았소?”
그게 이시형의 첫 마디였다.
“…….”
히로세(廣瀨博) 사장은 아무 말도 못 했다. 그 무렵 일본인들은 거의 본국으로 돌아갔으나, 아직껏 본사와 미 군정청으로부터 아무런 지시를 받지 못한 일본인 사장은 혼자 남아 회사를 지키고 있는 처지였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오늘부로 이 회사는 우리가 접수하겠소.”
그러자 일본인 사장이 의외로 순순히 나왔다.
“그건 어찌 되든 내 알 바 아니오. 하지만 최종 결정권은 미 군정청이 갖고 있다는 사실만 아시오.”
그 말에 모두들 환호성을 질렀다. 그렇게 되면 회사 인수는 따 놓은 당상이니 말이었다. 하지만 그 같은 행동이 나중 악재(惡材)로 작용할 줄 몰랐다. 상황을 전해들은 미 군정청 운수부(運輸部) 책임자인 해밀턴 중령이 포항을 기점으로 상선회사를 운영해온 김용주의 ‘해운건설협회’에 경영권을 넘겨주고 만 것이었다. 해밀턴은 해운동맹이라는 단체명이 다소 수상한 느낌이 드는데다가 거기에 단체로 일본인 사장을 협박한 일 등이 좌경 색채가 있는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이시형은 곧 딜레마에 빠졌다. 만약 해방된 한국에 운항 가능한 배가 있었다면 그는 천생 직분인 선상생활을 계속했을 것이다. 더욱이 그가 기관사로 9년이나 몸담았던 조선우선만이 선박을 보유한 회사인데다 미구에는 적산선박 등 얼마든지 쏟아져 나올 선박을 확보할 가능성이 높은 회사였으니 말이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이시형이 해기사 전문양성 기관 설립에 눈을 돌린 것은 그게 계기였다.


9

정처가 없어진 이시형은 눈만 뜨면 서울 종로 거리로 나가 동년배의 해기사들과 막걸리를 마시는 게 일이었다. 모두가 마땅한 배를 찾아내지 못해 아까운 시간이나 축내는 따라지 신세였다.

그러다가 진해양성소 항해과 출신인 방상표(方相杓)를 만났다. 동경상선 기관과를 나온 이시형과는 출신이 달랐으나 워낙 해기사가 희귀하던 시절이라 ‘나 무슨 배를 탔소!’라고 하면 그것으로 얼마든지 십년지기가 될 수 있던 시기였다.
“이거 영 재미없는데.”
그렇게 한 사람이 푸념을 하면,
“뱃사람 손에 물 마르면 돈 떨어진다는 건 하나도 안 틀려.”
그렇게 응수하기가 예사였다.
그러다가 방상표가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우리 형편이 지금이야 뭐 그렇다 칩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해양국 아니오?”
그 말에 토를 달 아무도 없었다.
“그거야!”
그럴 때면 언제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는 게 천생 뱃사람들의 버릇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요모양 요꼴이지만, 언젠가는 이 나라에도 해운융성 시기가 올 거 아니오?”
그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그렇지요!”
이시형도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내가 나온 진해고등양성소 말인데요.……”
방상표 말에 동경고등을 나온 이시형은 이 친구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하고 두 귀를 모았다.
“그 양성소가 지금 문을 닫고 있단 말이오. 해방이 되자 일본인 선생들은 모두 도망을 쳤지, 학생들도 보따리를 싸고 고향으로 돌아갔지, 그래서 개점휴업 상태라고나 할까……아주 텅텅 비어 있단 말이요.”
“흐음.”
이시형의 머리에 무언가가 잡혔다. 조선우선 인수에 실패한 그의 앞에 또 하나의 무주공산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걸 인수하여 미래에 대비한 고급 해기사를 양성하는 학교를 세우면 어떻겠소?”
그걸 반대할 사람이 어디 있을 것인가. 번듯한 교사도 있겠다, 놀고 먹는 해기사도 지천이겠다, 거기에 어떻게 학생들만 끌어 모은다면 그것으로 얼마든지 학교 간판을 내걸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던 것이다(이듬해인 1946년, 방상표는 경남도로부터 인가를 받아 고향인 통영에다 따로이 ‘통영해원양성소’를 설립, 몇 달간 운영했다).
다음날 이시형은 곧 군정청 운수부 책임자인 해밀턴 중령을 찾아갔다. 조선우선 인수 실패로 껄끄러운 관계가 되어 있었으나 충심으로 신생 한국의 장래를 걱정한 텍사스 출신 해밀턴은 아무 스스럼없이 내방객을 맞았다. 자상한 성격의 해밀턴은 승선 기회를 놓치고 번둥거리는 젊은 해기사가 안타까웠던 것이다(그 때 이시형의 나이 35세였다).
“조금만 기다리면 전쟁 중 우리나라(미국)가 쓰던 전시표준선 가운데 몇 척이 한국으로 넘겨질 거라 합니다. 그러면 승선 기회도 생기지 않겠어요?”
그게 해밀턴 중령의 위로의 말이었다.
그러나 이시형은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제가 찾아온 것은 그게 아니고…… 실은 달리 논의할 일이 있어서……그게 뭔고 하면…….”
“그래, 뭡니까? 말해 보시오.”
“제가 해기사 출신이어서가 아니라, 한국 해운업이 발전하려면 무엇보다도 고급 해기사 양성이 급선무가 아닌가 해서입니다.”
“그래서요?”
해밀턴이 상체를 바투 당겨왔다.
“그래서 고급 해기사 배출을 위한 대학 수준의 학교를 설립했으면 합니다. 마침 진해에 양성소로 쓰던 건물도 있고 해서…….”
“아, 진해해원양성소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그러면 됐습니다. 대단히 좋은 생각이십니다. 내 당장 학교 설립허가서를 발급해 줄 테니 내일 다시 오시오.”
“아이구, 고맙습니다!”
반신반의하면서도 이시형은 꿈인가 하였다. 도대체 대학 수준의 학교 설립이 일개 미군 중령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었으니 말이었다.
다음날 이시형이 다시 군정청을 찾아가니 해밀턴은 미리 준비한 군정청장(존 리드 하지 중장) 명의의 학교설립 인가서에다 이시형을 교장으로 임명한다는 임명장까지 내놓았다. 그 서류를 받아 쥔 이시형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 했다. 도대체 일개 대학의 설립이 단 하루만에, 그것도 한두 사람의 미군에 의해 결정되다니!
이시형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댓바람에 진해로 내려가 빈 교사를 지키고 있던 일본인 경비원을 쫓아내고 옛날 기관장을 할 때 데리고 있던 선원 한 명을 불러 교사를 지키도록 한 다음 서둘러 ‘진해고등상선학교(鎭海高等商船學校)’라는 이름으로 학생모집 공고를 냈다. 그리고 그 명칭은 몇 달 후 ‘진해해양대학(鎭海海洋大學)’으로 개명된다.
지망자는 구름처럼 몰려왔다. 일자리가 없어 청년 실업자가 지천인 데다 수업료 면제에다 급식과 제복도 관급(官給)이라니 그보다 더한 직장이 어디 있겠느냐는 당시 사회적 분위기 덕분이었다.
물론 이시형은 학생들을 위한 관비제(官費制) 실시도 허락을 받아내고 있었다. 당시 식민지 후유증을 겪고 있던 한국은 식량 사정이 열악하여 미국 식량계획에 의한 밀가루와 설탕 등을 원조받고 있었는데, 해밀턴은 그 가운데 얼마를 떼어내면 능히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안이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학생들의 급식 문제 해결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원조물자 배당이 적시에 이루어지지 않아 걸핏하면 학생들이 굶기를 밥먹 듯한 게 그것이었다. 그럴 때면 임시휴교를 선언하여 학생들을 집으로 보내 각자 먹을 식량을 갖고 오도록 하는 궁여지책도 짜냈다. 그 와중에 집안 형편이 여의치 못 하여 쌀을 갖고 오지 못한 학생들은 등교도 못한 채 교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걸 한때나마 해결해 준 것도 미국이었다. 그 사정은 안 경남도 농림국장을 하던 미국인 고문관이 옥수수 한 화차(貨車) 분을 선뜻 보내 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식당에서는 한 달 내내 노랗게 익힌 옥수수만 식기 가득 담겨 나오기도 하였다.
또 하나의 어려움은 교수진의 확보 문제였다. 향후 망망한 바다를 무대로 활동할 해기사 배출 기관인 만큼, 교수진도 가능하다면 해기사이거나 해양과 관계있는 인사들로 구성하는 게 옳을 일이었다. 하지만 해기사라야 몇 안 되는데다가 그들 모두 관련 분야의 회사나 기관에 종사하기를 원했지, 전망도 시원치 않은 시골(진해)에 소재하는 양성소 비슷한 곳으로 가겠다고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어서였다.
겨우 겨우 확보한 교수가 항해 파트에 진해고등양성소 출신인 이응섭(1933년 수료) 정인태(36년 〃) 신종섭(37년 〃) 등에, 통영양성소를 운영하던 방상표(35년 〃)가 합류하였고, 기관과 역시 같은 양성소 출신인 조용구(35년 〃) 신대현(38년 〃) 등이었다. 이시형 학장 역시 ‘증기기관’ 담당교수로 함께 뛰었다.
그렇게 반년이나 학교를 꾸려나갔을까. 그 해 10월 들면서 난데없이 오늘날 해군사관학교 전신이 되는 ‘해군병학교(海軍兵學校)’ 간부가 찾아와 두 기관이 아예 합병을 하든지 아니면 시설 일체를 넘겨달라고 제의해 왔다. 그거야말로 개교 이래 최초로 봉착한 위기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