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두 여인의 이야기
6.25, 두 여인의 이야기
  • 이준후 시인/BCT감사
  • 승인 2017.07.07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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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해양]

▲ 이준후 시인/BCT 감사

1950년 7월 8일 경남 동래군 구포읍 구명초등학교 운동장, 전쟁통이라 교실은 군인들 몫이었고 학생들은 운동장에서 수업을 받고 있었다. 우리 1학년 서해진 담임 선생님이 출석을 부른 뒤, “전쟁터로 떠나는 군인 아저 씨들 힘내라고 전송가(戰送歌)를 불러주러 가자!”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누런 종이에 크레용으로 그려 만든 태극기를 하나씩 들고 구포역까지 500여m 길을 펄럭펄럭 흔들며 신나게 걸었다.

역은 이미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우린 맨 앞에 일렬로 섰다. 드디어 늠름한 국군 아저씨들이 나왔다. 우린 목소리를 한껏 높여 '승리의 노래'라는 전송가를 불렀다. 목청 좋다고 어른들 귀여움을 받았던 나는 특히 크게 불렀다.

그때 저만치 우리 아버지가 보였다. 나는 너무 신이 나서 목에 더 힘을 줬다. 아버지가 돌아보더니 “자야, 자야, 희자야!”하며 달려와 나를 와락 껴안았다. 곧 헌병이 달려와 아버지를 떼어낸 뒤 기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기차가 움직였다. 나는 끝까지 태극기를 흔들어댔다.

전쟁이 터지자 아버지는 군에 지원하여 일주일 훈련을 받고 그날 전쟁터로 떠나셨다. 철없던 나는 그날의 의미를 몰랐다. 아버지를 다시 볼 수 없게 될 줄도 몰랐다.

그날 이후 언제부턴가 어머니와 나, 여동생이 할머니 댁에 찾아가면 할머니는 어머니에게 ‘남편 잡아먹은 년’, 나와 동생에겐 ‘애비 잡아먹은 새끼’라며 문을 잠가 버렸다. 어머니는 부산 아미동 판잣집에 둥지를 틀고 국제시장에서 빈대떡 장사를 했다. 장사는 잘됐고 우리 집은 좀 살 만해졌다. 어머니는 전쟁이 끝나고도 저녁때면꼭 밥 한 그릇을 따로 퍼 놓았다.

그러던 고교 1학년 어느 날, 어머니가 나를 조용히 불러 앉혔다. “네 할머니가 말씀해 주셨는데…”라고 말문을 떼시더니 “네 아버지가 1950년 9월 8일 안강전투에서 전사하셨단다”고 말했다. 나는 벼락을 맞은 듯했다.

1961년 어머니는 젊어서 고생을 많이 한 탓인지 내가 대학에 입학하자 자궁암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그때 어머니가 아버지 사망신고를 했다는 사실을 호적초본을떼 보고서 알았다. 전사소식을 듣고도 아버지 저녁밥을 지어온 지 10년, 본인이 죽을 무렵에야 어머니는 그 기다림을 끝냈다.

그리고 또 수십 년이 흘렀다. 2004년 1월 한 노인이 나를 찾아왔다. 나의 작은아버지, 아버지의 막내 동생이 라고 했다. 전쟁 이후 할머니가 우리가족의 왕래를 막아 나는 작은아버지를 이때 처음 봤다. 팔순을 바라보던 작은아버지 말에 나는 정신을 잃을 뻔했다. “네 아버지 죽은 뒤 전사통지서와 유해가 함께 집으로 왔다. 너희 가족에겐 얘기 안했다. 너희 외갓집 선산 큰 돌 밑에네 아버지를 묻었다. 미안하다. 나 죽기 전에는 말해줘야 할 것 같아서…” 당장 달려가 돌을 들어냈더니, 대부분 썩어버리고 남은 아주 작은 누런 뼛조각들… 얼마나 서럽게, 또 얼마나 오래 울었는지 모른다.

(사연의 주인공 72세 김희자 씨의 수기를 정리한 것입니다.)

올 2017년 5월 17일, 부산 남구 유엔공원 내 유엔군 참전군인 묘역을 한 50대 외국여성이 찾았습니다. 그녀는 빈센트 힐리(Vinent Healy, 전사 당시 호주 육군병장) 라는 이름이 적힌 묘비 앞에 주저앉았습니다. 故 힐리 병장의 외조카 루이스 에번스(54세) 씨였습니다.

에번스 씨는 낡은 검은색 노트 한 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노트에는 56년 전 힐리 병장의 어머 니이자 에번스 씨의 외할머니인 델마 힐리가 1만 5,000km 떨어진 한국에서 숨진 아들을 찾아 나선 과정을 기록한 내용이 담겨있었습니다.

1950년 가을 英연방 27여단 산하 호주 왕실 3대대 소속으로 한국전에 참전한 힐리 병장은 1951년 3월 강원도 원주 매화산에서 중공군과 싸우다 전사했습니다. 집안의 장남이었던 힐리 병장은 큰 키에 빼어난 외모로 가족의 자랑이었습 니다. 도박에 빠진 아버지를 대신해 가족을 부양하던 家長이기도 했습니다. 아들의 전사 소식은 모친에게 청천벽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의 유해는 고향 호주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산의 유엔군 묘지에 묻힌 것입니다.

죽은 아들을 만나는 것, 모친의 평생의 소원이 되었습니다. 가장 역할을 하던 맏아들이 전사하자 넉넉지 않던 집안형편은 더욱 힘들어졌습니 다. 모친은 파인애플 통조림 공장에서 일하며 남은 9남매를 키웠고 그러면서 틈틈이 저축을 했습니다. 그렇게 모친은 10년 동안 한국행 여비를 모았습니다. 드디어 1961년 5월 한국으로 가는 크루즈船 3등석에 몸을 실을 수 있었습니다. 2주일의 항해 끝에 도쿄와 서울을 거쳐 부산 유엔묘지에 묻혀 있는 아들을 만났습니다. 귀국한 모친은 ‘아들과 영혼의 재회(spiritual re-union)를 이루었 다’며 묘역에서 가져온 흙과 돌을 죽을 때까지 몸 에 지니고 다녔습니다. 모친은 1971년 그토록 그리던 아들 곁으로 갔습니다.

외손녀 에번스 씨가 가지고 있는 노트는 외할 머니 힐리 여사가 호주 동부 브리즈번에서 부산 까지 아들을 만나러 가는 2주일여정을 꼼꼼히 기록한 것입니다.

에번스 씨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외삼촌을 찾아 한국 땅을 찾은 것은 이 노트 때문입니다. 외할머 니가 돌아가신 후 집을 정리하다 이 노트를 발견 하고 67년 전 한국에서 발발한 전쟁과 그 곳에서 싸우다 죽어간 호주인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기자 출신인 에번스 씨는 2014년 호주에 있는 6.25 참전용사 20여 명을 수소문하여 힐리 삼촌과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외할머니의 1961년의 한국行 여정도 정리했습니다.

삼촌의 묘지를 돌보아 준 한국인들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에번스 씨는 이런 내용들을 담아 작년 ‘부산으로 가는 길(Passage to Pusan)’이 라는 책을 호주에서 펴냈습니다.

에번스 씨가 이번에 한국을 찾은 것은 56년 전할머니의 여정을 영상에 담기 위해서입니다. 그녀가 만드는 50분 분량의 다큐멘터리는 오는 8 월 호주의 한국영화제에서 상영될 예정입니다.

에번스 씨는 “전쟁터의 영웅담이 아니라 전쟁이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나의 가족 이야기를 통해 알리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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