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기회, 귀어 이야기 (26) 홍합·미더덕 양식 박영태 씨
새로운 기회, 귀어 이야기 (26) 홍합·미더덕 양식 박영태 씨
  • 이은섭 기자
  • 승인 2017.06.23 16: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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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바닷바람 차가워도 흥이 절로 난다
[현대해양 이은섭 기자]

 귀어 전 거주지역 : 서울특별시
 귀어지 : 경남 창원시
 귀어 전 직업 : 회사원
 귀여연도 : 2010년
 나이 : 59세
 어업형태 : 홍합·미더덕 양식
 귀어 초기자본 : 3억 여원
 연간수익 : 8천 여만 원

▲ 박영태 씨

 20여년 직장생활 과감하게 청산
 박영태 씨는 현재 6년차 어부다. 짠 내음 물씬 머금은 박 씨의 모습에서 도시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6년이라는 세월이 그를 어엿한 바닷사람으로 만들었다.

 평범한 직장이었던 박영태 씨는 대학 졸업 후 20여 년 직장생활을 했으나, 늘 ‘퇴직하면 어디가서 뭘 해먹고 살아야 하나’가 화두일 정도로 미래가 불안했다. 박 씨는 고민 끝에 정년 전 결정을 내렸다. 50대 초반, 귀어를 결정하고 직장을 그만둔 것이다.

 때는 2010년, 직장생활 25년차 53세였다. 그가 귀어를 택한 것은 경남 창원이 고향이라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박영태 씨는 경제적인 면을 가장 많이 고려해 퇴직 전 귀농과 귀어를 수없이 저울질 해봤다. 그 결론이 바로 귀어였다.

 농사는 수확을 통해 투자금을 회수하는 시간이 길었다. 귀농해서 자리를 잡으려면 4~5년 걸린다는 게 박 씨의 중론이다. 그러나 어촌은 사정이 좀 다르다. 그날그날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으면 바로 현금화가 가능하다. 그는 경우에 따라 조금씩의 차이는 있으나 양식 어장의 경우도 1년 정도면 자리를 잡을 수 있다는 판단이 서 바다를 택했다.

 귀어귀촌 시, 가족의 동의를 얻는데 얼움을 겪는 이들이 많다. 보통 아내들이 생활 편의 등을 내세워 반대하는 경우가 많은데, 박영태 씨의 경우는 달랐다. 아내가 장기적으로 보자며 더 적극적으로 귀향을 권했다. 주위에서 남자들이 퇴직한 후 무기력한 일상을 보내는 모습을 봐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외의 걸림돌이 나타났다. 부모의 반대였다. 혼양양식을 천직으로 살아왔던 박 씨의 부모는 당신들처럼 고생 안 시키려고 대학까지 보내놨더니 귀어를 하느냐고 펄쩍 뛰었다. 자초지종을 말해도 설득이 안 됐다. 어쩔 수없이 무작정 짐을 싸서 고향으로 내려갔다. 세상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그제야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그렇게 그의 어촌 생활은 시작됐다.

 “바다에 나가면 다 돈이 된다?”

 “처음에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 같다”는 박영태 씨는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으면 돈이 되고, 나가면 바로 만선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라는 걸 깨달았다”며 “바다는 수시로 변한다. 바람이 변하고, 물때가 있고 포인트가 있다. 이 모든 것이 체험으로 터득되는 것”이라고 귀어 초기의 좌충우돌을 설명하며 쓴웃음을 짓는다.

 이 모든 것을 공부라고 생각했던 박 씨는 “양식만 해도 그렇다. 창원으로 내려올 땐 오만둥이 양식을 염두에 뒀었다. 하지만 널뛰는 가격이 문제였다”며 “오만둥이 가격은 작은 상황에 따라 가격이 너무 큰 폭으로 춤을 춘다. 한때 40kg에 20만 원 하던 것이 이듬해 2만 원까지 곤두박질쳤다. 종잡을 수가 없다”고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이어 그는 “위험성이 너무 컸다. 물론 급속 냉각 시설 등을 갖추고 있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하지만 시설비를 감당하기 힘들다. 그렇게 주력하게 된 것이 홍합양식”이라며 “연배가 좀 있는 이들은 홍합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있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포장마차에서 서비스로 주던 시원한 홍합 국물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도 그 개운한 맛 때문에 수요가 많다. 워낙 쓰임새가 많아서 판로 걱정이 없다”고 덧붙였다.

 2015년 ‘짬뽕 라면’ 열풍이 불면서 홍합이 재료로 들어갔기에 품귀 현상까지 일어났다. 지난 해에도 태풍으로 창원 지역 어장의 30%가 소실돼 공급이 소요를 따라가지 못했다. 당연히 가격도 뛰었다. 이런 때 ‘어장 관리’의 여부에 따라 수입이 달라지는데, 박영태 씨의 성적은 꽤 좋은 편이었다.

 박 씨는 귀어 초기 양식장 1ha를 매입하고 시설 투자를 하는데 3억 여원을 들였다. 1억 여원은 대출을 받아 충당했다. 2010년 귀어 당시 귀어자금정책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그는 귀어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집까지 담보로 잡혔다. 만만치 않은 투자였던 만큼 박영태 씨는 귀어 후 절실하게 일에 매달렸다. 그 결과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의 어장보다 소득이 좋아 한때 시샘어린 눈총도 받았다. 박 씨는 홍합을 까서 출하한다. 그러면 부가가치가 높다. 그러나 일일이 손으로 까야하기 때문에 일손 구하기가 힘들다. 그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작업자들을 출퇴근시켰다. 주위 사람들은 괜스레 일을 만든다는 이유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그런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 덕분에 작업자들이 선호하는 어장이 됐고 자연스럽게 매출도 올랐다.

▲ 양식장에서 홍합 수확 후 배 위에서 정리할 때가 행복하다.

 새벽 3시에 기상

 박영태 씨의 하루 일과를 들여다봤다. 박 씨는 새벽 3시에 일어나 작업장으로 간다. 귀가 시간은 오후 6~7시다. 새벽부터 나서는 이유는 작업자들을 출근시키기 위해서다. 겨울엔 작업자들이 일할 수 있도록 작업장에 불을 지핀다. 4시면 일이 시작된다. 고된 일과다. 직장생활 같으면 견뎌내지 못했겠지만 자신의 일이니까 가능하다. 그만큼 보람이 있고 수입도 뒤따른다.

 그가 이렇게 되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귀어 초기 박영태 씨를 힘들게 한 것은 일이 아니었다. 사람 관계였다. 아무리 고향이라고 해도 쌍수를 들어 반기는 이는 없었다. 서울 생활할 때 가끔식 내려와 만날 때 상냥하게 대해주던 그들이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이제 경쟁자가 되는 관계니 그럴 수 있다 싶었다. 그럴수록 박 씨는 주위 사람들에게 인사 잘하고 열심히 일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앞장섰다. 도와달라는 이가 있으면 달려가 품삯도 안받고 도왔다. 그도 일손이 달리면 도움을 청했다. 이웃이 달려왔다.

 “다 시간이 필요하다. 사람관계가 다 그렇다. 처음에는 경계를 한다. 하지만 이내 친숙해지고 고민이 있으면 털어놓는 사이로 변한다”는 박영태 씨는 이 정도면 ‘준 베테랑’이 됐다고 생각했다. 2015년, 아찔한 경험을 한 후 박씨의 생각이 바뀌었다.

 이에 그는 “살얼음이 언 갑판 위에서 미끄러져 바다에 빠졌다. 수영에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다급한 상황이 되니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며 “간신히 위로 올라오긴 했지만 그 당시 5분이 마치 50분처럼 느껴졌다”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박영태 씨는 이 일로 바닷일을 할 때 결코 긴장을 늦추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박 씨는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지금도 부산에 있는 국립수산과학원에 수시로 전화를 한다. 일을 하다 궁금한 사항이 있으면 그때그때 궁금증을 해결한다는 것이다.

 “바다 환경이 많이 바뀌고 있다”는 그는 “대표적인 게 수온 변화다. 또 양식장 면적의 확대 및 각종 개발에 따른 조류의 변화로 홍합 등 생육 환경도 악화되고 있다. 현명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공부가 필수”라고 밝혔다.

 이런 박영태 씨의 노력에 매출도 화답해 연 1억 원을 훌쩍 넘겼다. 직장생활보다 나았다. 경제적인 부분도 있으나, 가족이 좋아하니 박 씨도 좋다. 그의 아내도 “서울 생활보다 백배 낫다. 삶의 질이 업그레이드 됐다고나 할까. 사람사는 것 같다”고 할 정도다.

▲ 명절때 모인 가족. 귀어 후 가족의 소중함이 더 짙어졌다.


 바다 직장엔 정년이 없다
 박영태 씨는 귀어를 하려는 이들에 대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먼저 건강해야 한다. 건강해야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는 박 씨는 “건강해야 열정도 생긴다. 하고자 하는 열정없이 세상사되는 일은 없다. 둘째는 같이 살아간다는 것”이라며 “혼자서는 할 수 없다. 함께 어우러져 도움을 주고 받는 게 세상이다. 셋째는 조급하게 결과물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열심히 하다 보면 절로 결실이 나올 것”이라고 강직한 표정을 지었다.

 건강만 허락한다면 70세, 80세까지 정년 없이 일할 수 있어 행복하다는 그다. 스트레스도 덜하다. 만족스러운 귀어 생활이다.

 마지막으로 박영태 씨는 자신의 귀어에 도움을 준 이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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