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천금성의 ‘한국 원양어업 개척사’ ⑩
다시 보는 천금성의 ‘한국 원양어업 개척사’ ⑩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 소설가
  • 승인 2017.05.02 16: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선장작가 故 천금성 기획 다큐멘터리

 36

▲ 故 천금성 작가
 여기서 한국 원양어업의 초기적 온갖 험로(險路)를 마무리 지으면서 우리나라를 세계의 수산강국으로 견인해 온 어느 배의 운명적이면서도 아슬아슬한 항적(航跡)을 추적하는 것으로 대단원을 장식할까 한다.
- 코스타 데 마필(COASTA DE MARFIL).

 1972년 대서양 비스케이 만의 히혼 항 조선소에서 진수된 이래 태평양을 누비다가 페루의 카야오(Callao) 조선소에 닻을 놓고 있던 중 한국과 인연을 맺으면서 지금 보는 것처럼 가장 남성적이면서 역동적인 참치 선망어업(旋網漁業) 시대를 개막시킨 바로 그 배다. 영어로는 ‘IVORY COAST’이고, 우리말로 하면 ‘상아해안(象牙海岸)’이 되는 그 배가 한국으로 시집을 오게 된 것은 전적으로 동원산업 김재철 회장의 창조적 의지와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킨 불굴의 기개(氣槪)가 그 소산(所産)이었다.

 태평양전쟁 말기이던 1940년대 초 미국이 개발한 어로 방식인 선망어업 분야는 한국 수산계로서는 처음부터 ‘못 오를 나무’였다. 참치 떼를 대형 그물로 둘러싸 잡는 선망어업은 한창 질주할 때의 최고 속도가 30노트를 웃도는 날렵한 고기 떼가 식이(食餌) 활동을 하는 특
성을 역이용해 포획하는 어법인데, 그처럼 약삭빠른 고기 떼를 포획하기 위해서는 어군의 성향을 포함한 생태 내막을 소상히 파악해야 함은 물론 그 고기 떼를 통째 그물 속에 가두기 위해서는 그만한 속력을 가진 몇 척의 스피드 보트를 포함, 적의 잠수함을 찾아낼 만큼의 기능을 가진 헬리콥터까지 동원되고 있으니 그걸 어찌 단순한 고기잡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하여 선망어업이야말로 단 한 차례의 투망으로 일거에 몇 백 톤씩의 어획을 달성할 수 있는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역동적인 진수(眞髓)의 어법이어서 고기잡이라면 세계 최고의 어로기술을 자랑하던 일본인 어부들조차도 번번이 손을 들고만 불가사의한 어법이었다. 바로 그 조업에 동원산업이 도전장을 내민 것이었다.

 김 회장이 선망어업에 적극적인 의지를 표명하기 시작한 것은 회사 창립 10주년을 앞둔 1978년의 일이었다. 통조림 제품을 비롯한 갖가지 참치 식단은 워낙 고가여서 그 시장이 미국 등 유럽 국가에만 한정돼 있었으나 김 회장은 머지않아 장래에 틀림없이 우리 식탁에도 자리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경제도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넘보던 때이기도 해 김 회장은 미구(未久)에 우리 고유의 식탁에도 큰 변화가 일 것으로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지난해 미국의 간판 참치 메이커인 ‘스타 키스트’를 인수하면서 오늘날 세계 시장을 석권한 동원참치의 김 회장은 벌써 30년도 더 전에 그 같은 예견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기적으로 좋지 않았다. 때는 세계 최대 석유 생산국인 이란의 국내 혼란과 이슬람혁명의 여파로 두번째 석유파동이 불거지면서 세계경제가 엄청난 불황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으니 말이었다. 바로 그 불확실한 때에 김 회장은 중형 독항선 7척에 상당하는 320만 달러를 투자해 대형 선망선인 코스타 데 마필 호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러니 만에 하나 일본처럼 실패의 쓴잔을 마시는 날이면 지난 10년의 동원아성(東遠牙城)이 일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 일대 모험적인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은 김 회장의 결심을 전해들은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무모하면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비웃은 데서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10년 전 탑재모선식 중고선 한 척으로 출발한 동원산업은 그동안 20여 척 이상의 선박을 보유한 상위권 업체로 성장하면서 연간 200억 원의 매출을 기록할 만큼 승승장구의 사세(社勢)를 과시하고 있었는데, 그것으로 어쩌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인 것이었다.

 하지만 김 회장은 ‘하면 된다’는 신념 하나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것은 일찍 위기가 기회라는 믿음 하나로 일본의 대표 수산회사인 미쓰비시 상사(三菱商事)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려 1,300만 달러를 투자해 4,500톤급 대형 공모선인 ‘동산’ 호를 일본 시미즈의 미호조선소에서 신조, 북양어장에 투입한 데서도 확인되고 있다. 그렇게 캄차카 어장으로 나간 동산 호는 출어 3개월 만에 3,000톤의 어획을 달성하는 것을 시작으로 만선에 만선을 거듭함으로써 항간의 우려를 말끔히 씻어내는 쾌거를 이룩했던 것이다. 그 같은 김 회장의 의지야말로 위기에 봉착하면 오히려 과감한 투자로 정면승부하는 ‘역발상의 신화’인 것이었다.

 37
 1974년 4월, 한국 최초의 선망선이 되는 800톤급 코스타 데 마필 호가 페루의 카야오 항을 출항할 때 캡틴을 비롯한 어부 모두가 스페인 사람들로 이뤄진 그 틈새에 한국인 한 사람이 승선해 있었다. 지난 3년 동안 가다랭이 채낚시선인 801동원 호를 몰고 대서양을 누빈 가무잡잡한 얼굴의 김용문(金容文) 선장이었다. 그는 본사를 대표한 선박 인수요원 자격으로 승선해 있었으나, 본래의 목적은 스페인 어부들의 조업 견문(見聞)을 통해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선망식 어법을 터득하는 일이었다.

 김 회장이 허다한 사람 가운데 유독 김 선장을 코스타 데 마필 호로 특파한 것은 가다랭이 채낚시선의 어로 방식이 선망어법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었다. ‘스쿨 피쉬(School-Fish)’라고 한다. 마음껏 대양을 질주하며 멸치나 정어리 떼를 잡아먹는 참치 떼로, 수십 톤에서 수백 톤에 이르는 대어군을 형성하고 있다. 김 선장이 탄 가다랭이 채낚시선 801동원 호는 그 어군 가까이로 접근해 살아 있는 멸치를 뿌리면서 참치 떼가 먹이에 정신을 팔고 있는 동안 미늘 없는 낚시로 마구 채낚아 올리는 어법을 채택하고 있었는데, 선망어법 역시 그 같은 어군을 대형 그물로 둘러싸는 어법이었다. 하지만 스쿨 피쉬도 만만치 않다. 워낙 영민해 그물을 채 봉합(縫合)하기 전에 아직도 열린 상태인 그물 하단부를 통해 날렵하게 탈출을 감행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놈들을 성공적으로 포획하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해야 함은 물론 퍼싱 작업(그물 하단부 조이기)도 단시간에 끝내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 그 결정적 순간이 어느 때인가를 알아내는 게 선망어업의 진수(眞髓)이며, 일본인 어부들이 판판이 실패를 거듭한 것도 바로 그 결정적 순간을 잡아내지 못한 미숙함 때문이었던 것이다. 바로 그 기술적 노하우를 터득하기 위해서 김 선장은 스페인 어부들로 이뤄진 코스타 데 미필 호에 승선한 것이었다. 하지만 스페인 어부들은 만날 술이나 마시며 노닥거리기 일쑤였고, 기술 전수에는 매우 소극적이었다. 게다가 배 소유권이 한국의 동원산업으로 넘어가자 조업에도 미온적이어서 걸핏하면 ‘물방’을 먹기가 예사였다. 그렇게 여섯 달 동안 잡은 어획량이라야 1,000톤에도 이르지 못하여 완전 적자를 보고 말았다. 김 선장의 보고를 받은 본사는 부득이 스페인 어부들을 하선시키고 미국인 어부들로 대체하면서 김황희 선장 등 몇 명의 ‘동원맨’을 추가로 승선시켰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1년을 지나는 동안 누적된 적자폭이 무려 300만 달러를 넘어서는 최악의 상황에 봉착하고 말았다. 그대로 우물거리다가는 그동안 닦아놓은 회사 기반마저 통째 거덜날 판국이었다. 김 회장은 부득이 이듬해 7월 배를 부산으로 귀항시키면서 새로운 전기를 모색했다.

▲ 헬기와 스피드 보트를 이용한 최첨단 참치잡이 조업 장면
 대대적인 수리를 하는 동안 일본인 어로장을 초대하는 비상수단을 강구한 다음 이번에는 페루 인근이 아닌 미크로네시아의 서부태평양으로 어장을 바꾸었다. 그 항해에 김 회장도 동승했다. 김 회장의 직접적인 승선은 몇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어법인 만큼, 선주 자신이 그 난해한 어업을 소상히 파악하고 보자는 의도였는데, 그래야만 향후 현장에서 발생할 온갖 불확실한 사태를 한마디 보고로도 쉽게 파악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었다. 업계나 거래처에 대한 동원산업의 굳은 의지를 표방하면서, 선원들에게는 긴장감과 함께 사기 진작을 도모하면서 조업 효과의 극대화를 이룰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었다.

 하지만 긴장이 너무 과했던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출어하고 며칠 지나지 않은 10월 20일, 어탐에 나선 헬기가 바다에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조업 의지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고군분투하면서도 코스타 데 마필 호는 단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못 했다. 갑판에서 조업 상황을 지켜보던 김 회장은 눈앞이 캄캄했다.

 그러던 11월 20일, 파푸아뉴기니 인근에서 처음으로 대어군 포획에 성공하면서 비로소 자신감을 얻어내는 전기를 얻어냈다. 옐로우판과 가다랭이가 혼합된 250톤 규모의 참치 떼였는데, 당시 판매가가 22만 달러에 이르는 대어였으며, 바로 그 어획이 한국 수산계가 기록한 최초의 선망식 어획이었다.

 서부태평양 어장에서 꼬박 1년 반을 항해한 코스타 데 마필 호가 다시 부산으로 귀항한 것은 이듬해 12월이었다. 그동안 잡은 고기라야 1,000톤 남짓, 그 항해도 완전 적자였다. 톱브리지에 헬기를 탑재한 코스타 데 미필 호가 부산항에 입항하자 업계에서는 이구동성으로 ‘저 배 때문에 승승장구하던 동원산업이 낭패를 볼 것’이라고 입방아를 찧어댔다. 그럼에도 김 회장은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선망선이라는 가장 규모가 큰 ‘캡틴 김’호(1,400톤급)를 미국으로부터 추가로 도입하는 등으로 계속 척수를 늘여나갔다. 비록 스페인이나 미국인 어부들로부터 기술상의 노하우를 전수받지 못 했지만, 꾸준히 도전하고 연마하면 얼마든지 한국적인 어로방식을 체득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에서였다. 비싼 수업료라 치고 이 위기를 극복하는 것만이 동원산업을 한 단계 도약시키는 지름길이며, 아울러 미래 한국 수산업의 향방에도 기여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때에는 선망선 보유 척수가 15통에 이르면서 기라성 같은 명선장들을 속속 배출한 가운데 단위 회사로는 세계 최대의 참치선망 선단을 자랑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38
 독항선 선장 출신인 필자는 불가사의한 선망식 조업을 견문하기 위해 동원산업의 배려로 1994년 앞서의 캡틴 김 호를 비롯한 여러 척의 배에 번갈아 편승했다. 그 항해의 경험을 귀국한 다음 <주간조선>에 4회에 걸쳐 연재했는데,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시의 조
업 관련 기사를 이 자리에 인용(引用)하는 것으로 대신할까 한다.

 ……코파는 30m 높이의 중앙 마스트 꼭대기에 매달려 있었다. 까마귀 집처럼 생겼다고 해서 미국인들이 ‘Crow’s Nest’라 부르는 망루(望樓)다. 고성능의 쌍안경이 몇 개씩이나 마련되고 있어서 사방 10마일 이내의 바다를 샅샅이 살필 수 있다. 코파는 어군탐색이 주목적이고, 고기 떼를 찾아낸 다음에는 투망명령을 비롯한 모든 지휘가 이뤄지는 사령탑이다.

 남위 00도 17분, 동경 160도 40분. 서부태평양의 외딴 나우루 섬 영해 인접한 공해상. 이제 이틀 후면 한해가 저무는 12월 29일 오후 2시, 동원산업 소속선 ‘엘스페스(Elspeth)’ 호 선상.
 “렛고!”

 드디어 코파로부터 차용우(車鏞佑) 선장의 투망명령이 떨어졌다. 차 선장은 ‘참치명인’이다. 세계에서 가장 참치를 잘 잡는 선장에게 주어지는 자랑스러운 칭호다. 그는 지금까지 모두 다섯 차례나 그 칭호를 얻었다. 미국 참치캔 메이커인 스타키스트 현관에는 그의 이름이 다섯 차례나 새겨졌다.
 따앙!

▲ 어획된 참치를 그물로 퍼올리고 있다.
 묵직한 해머 소리와 함께 지금껏 모선의 선미 쪽 슬립웨이에 새끼 원숭이처럼 매달려 있던 스키프가 바다로 미끄러졌다. 20톤 남짓한 꼬마 배지만, 건조비가 2억 원도 넘고 750마력의 엔진을 장착한 당찬 배다. 곧 코르크부이와 퍼스라인의 스냅링을 포함한 그물이 총알처럼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거대한 윈치드럼에 감긴 와이어로프가 풀려나가는 금속성 음향이 고막을 때린다. 배는 진작부터 완만한 원주를 그리며 전속력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그 좌현 쪽으로 참치떼가 바닷물을 하얗게 뒤집어엎고 있다. 해면은 온통 백파로 뒤덮였다. 먹이(멸치떼)를 쫓는 참치의 부산한 움직임 때문이다. 하얗게 뒤덮힌 백파 규모를 보고 갑판장은 ‘눈까리 두 개는 되겠다’고 어림쳤다. 어군 크기가 200톤이라는 뜻의 어부들은어다. 그물이 목을 죄고 있는데도 참치 떼는 아직 멋모르고 좌현 300m 저만치서 물보라를 일으키며 물장구질에 여념이 없다.

 차 선장은 두 시간 전부터 참치 떼를 상대로 밀어(密語)를 주고받으면서 천천히 배를 좌회두시켜왔다. 덕분에 참치떼는 투망이 시작되면서 그물 풀리는 요란한 금속성 마찰음에도 놀라지 않았다. 결코 승산이 없는 투망을 하지 않는 게 차 선장의 장기였다. 그는 투망 명령을 내리기 전에 헬기에서 어군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그 날의 스쿨피쉬는 경부군(鯨付群)이었다. 오늘스쿨피쉬는 한 마리 고래와 함께 먹이사냥에 나선 참이었다. 고래와 참치 떼는 똑같이 멸치 떼를 노리고 있었다. 참치 무리는 외곽에서 멸치 떼를 둘러싸고 있었고, 아래쪽 고래가 수없이 공기방울을 뿜어 올리자 쫓긴 멸치 떼가 수면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상황이야말로 고래와 참치의 공격 순간이 된다.

 고래가 먼저 나섰다. 멸치 떼에 접근한 고래는 하품이라도 하듯 크게 입을 벌린다. 그렇잖아도 위기를 느낀 멸치 떼는 마땅한 피난처를 찾고 있던 참이어서 고래의 커다란 입을 보자 앞다퉈 그곳으로 몰려든다. 그 순간 고래가 덥석 입을 닫는다. 고래의 여유로운 포식이다.

 그러자 멸치 떼의 대형이 헝클어지면서, 그 순간을 기다려온 참치 떼가 공격을 감행한다. 먹고 먹히는 일대 아수라장이 연속이다. 자연은 그 같은 먹이연쇄로 균형을 이룬다던가.

 갑판은 침묵 도가니다.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다. 그물 풀리는 소리와 3,600마력의 제너럴 모터스 엔진 음만이 대양의 정적을 깨트리고 있다.
 “센터 부이 렛고!”

 기관장이 투망 량을 코파로 보고한다. 이제 그물은 꼭 반만큼 풀려나갔고, 스키프는 모선의 건너편에 떠 있다. 시간이 3분가량 지나고 있었다.
 “삼백오십 미터!”

 소나를 들여다보고 있던 통신장이 어군까지의 거리를 보고한다. 배는 쉬지 않고 처음의 투망 위치를 향해 전속력으로 원을 그리고 있다.
 “3번 부이, 렛고!”
 이로써 2,138m 길이의 대형 그물이 참치 떼를 가운데 로 두고 동그란 원을 그렸다. 배의 항적을 따라 참외 같은 노랑 빛깔의 코르크 부이가 정확하게 원주를 그리고 있다. 320m의 망고(網高)를 가진 대형 그물이어서 63빌딩을 한꺼번에 3채나 둘러쌀 수 있는 대형 그물이다.
 “토우라인, 렛고!”
 
 차 선장이 갑판장으로부터 그물이 다 풀려나갔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처음 투망 위치인 스키프에게로 바짝 다가선 모선이 퍼스 와이어를 넘겨받아 곧 윈치에 물렸다. 이제부터 피를 말리는 퍼싱 작업이 시작될 참이다. 지금 그물은 참치 떼를 가운데로 둔 채 320m 높이의 차단벽을 만들고 있을 터이지만, 한 순간이라도 빨리 그물 밑줄을 조이지 않으면 참치 떼는 아직도 열린 채 로인 하단부를 통해 아주 쉽게 탈출하고 만다.

 퍼싱 작업은 빨라야 30분도 더 걸린다. 그물이 워낙 대형이고, 하단부에서는 2인치 굵기의 퍼스라인과 2,000개도 넘는 쇠고리가 매달려 있어서 그 무거운 퍼스라인을 감아들이기 위해 윈치는 찍찍! 아우성이다.

 그 순간 참치 떼도 위기감을 느꼈다. 사방으로 그물벽이 점점 조여지고 있어서다. 그럴 때 그물에 자그만 틈새만 있어도 영민한 참치 떼는 한순간에 탈출하고 만다. 몇 척의 스피드보트가 부산한 참치 떼의 앞길을 가로막은 채 엔진 굉음으로 겁을 주고, 헬기는 수초에 알
을 까는 잠자리처럼 수면 한 뼘 높이에서 호버링(정지비행) 자세로 주회전날개의 강풍을 휘몰아친다. 거기에 참치가 싫어한다는 연두색 물감이 뿌려지고, 모선 갑판에서는 해머로 뱃전을 두들겨 수중으로 소음을 전파한다. 그 모두가 참치 떼의 탈출을 막기 위한 어부들의 교란작전이다.

 그렇게하여 차 선장의 엘스페스 호는 그날 510톤에 달하는 대어를 이뤘다. 판매가가 50만 달러를 넘는 그야말로 대어였던 것이다.

 39
 그 해 차 선장의 엘스페스 호는 1년 동안 1만톤이 넘는 어획을 달성하면서 동원산업 소속선 12통 가운데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다. 동원산업의 1등은 한국선 40여 척을 망라한 1등이며, 세계 500여 척 선망선을 전부 포함해도 요지부동의 1등이었다. 결코 넘보지 못할 것이라던 선망어업에 동원산업이 도전하고 2009년으로 꼭 30년이 됐다. 그 짧지 않은 인내와 각고의 세월동안 동원산업은 선망어업 종주국인 미국과 스페인 등 수산 선진국을 깔아뭉개면서 매년 최고의 어획을 달성하는 단일 수산회사로 우뚝 올라선 것이었다.

 동원산업의 전진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2007년 ‘꿈의 참치잡이배’라는 ‘오션 에이스(OCEAN ACE)’와 ‘블루 오션(BLUE OCEAN)’ 및 ‘장보고’ 등 세 척의 신조선을 현역에 투입시키면서 새로운 참치 역사를 쓰게 한 일이 그것이다(그렇게 총 15통으로 척수가 늘어났다).

▲ 동원산업은 2007년 꿈의 참치잡이배 블루오션, 오션 에이스(위), 장보고(아래) 등 세 척을 신조했다.
 총톤수 2,200톤급의 그 배들을 한 차례 투망으로 대량어획이 가능한 자선의 강점에다, 종전 선망선에 없던 독항선 식 초급속·초저온 냉동 시스템을 접목(接木)시킴으로써 종전 어가(톤당 평균 1,000달러 내외)를 단박에 50%이상 끌어올리는 엄청난 부가가치(附加價値)를 창출했던 것이다.(본지 2008년 7월호 <레이더 스코프> 기사 참조)

 2007년 한 해 동안 오션 에이스 호가 올린 어획량은 모두 1만 2,000여 톤. 그 가운데 1만여 톤이 가다랭이였고, 나머지 2,000여 톤이 횟감으로 최고 어종인 황다랑어와 눈다랑어였다. 동원산업은 그 두 가지 어종을 가려내 독항선 식 초급속 냉동처리를 적용해 어가를 단박에 3~4배 이상 끌어올렸던 것이다.

 이전까지 선망선들은 두 어종을 가려내지 않고 가다랭이와 함께 소금물 냉동법인 ‘브라인(Brine) 처리’로 오로지 통조림 원료로만 제공됐다. 그러니 어가가 반쪽일 수밖에 없었다. 김 회장은 그게 너무 아쉬워 자사 소속 독항선을 선망선에 부선(附船)토록 해 귀중한 어획물을 넘겨받아 처리하는 방식을 수차 적용하기도 했으나 그 절차가 워낙 번거롭고 또 빈번한 일도 아니어서 그만 흐지부지되고 말았었다.

 그렇다면 종전의 선망선에다 독항선 식 초급속 냉동 시스템을 추가하는 방법은 어떨까. 그게 김 회장의 아이디어였다. 확신은 곧 실행으로 옮겨졌다. 그렇게 하여 대만 ‘칭푸 조선소’에서 건조한 세 척 신조선을 현장에 투입, 종전 어가의 두 배에 이르는 3,500달러 이상으로 수직상승시킴으로써 추가적으로 획득한 이익금이 1,000만 달러를 넘어서는 일대 혁명을 이룩했던 것이다.

 도대체 김재철의 야망은 어디까지이며, 추후로도 동원산업이 보여줄 도약과 성장은 과연 어디까지일까. 분명한 것은 동원산업이 전진을 멈추지 않는 한 그 견인력(牽引力)에 힘입어 한국 수산업도 위축됨 없이 덩달아 세계의 바다를 평정해 나갈 것이라는 확신인 것이다.

 2007년을 기준으로 한국 원양어업의 총 생산량은 64만여 톤이었다. 그 가운데 45%이상인 30만여 톤이 참치 어종이었고, 그 중에서도 25만 톤이 선망선에 의한 어획이었다. 그 뒤를 해외 트롤업이 20만여 톤, 북양트롤 3만여 톤, 오징어채낚시 8만 7,000여 톤, 꽁치봉수망
1만 2,000여 톤이 가세했다.

 특히 북양 꽁치잡이는 2005년을 정점으로 그동안 매년 4만여 톤 이상의 어획을 유지해 왔으나, 급속한 지구온난화 등 기상이변으로 어획량이 급감하기 시작한 게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이 같은 불황은 비단 북양 꽁치잡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
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수산업은 결코 그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이 자리에서 한국원양산업협회 장경남(張慶男) 회장의 평소 지론(持論)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단원에 가름할까 한다.

 - 200해리 경제수역의 확대와 기상이변 등이 우리 원양어업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지만, 인류가 생존하는 한우리 어부들의 생산 활동은 결코 중단되지 않을 것입니다. 바다는 여전히 식량의 보고(寶庫)이며, 아직도 개발의 여지가 무궁무진하기 때문입니다. <연재 끝>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