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고?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고?
  • 이준후 시인/BCT 감사
  • 승인 2017.05.01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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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후 시인/BCT 감사
 중국이 ‘한국이 중국의 일부였다’라고 말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신문과 의 인터뷰에서 “시진핑 주석이 미국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한국은 사실 수천 년간 중국의 일부였다”라고 말했다고 확인했습니다. 한국(Korea)이라고 했다 하니 남·북을 가리지 않고 한반도라고 해석된다고 언론은 전합니다.

 우리 정부는 중국 정부에 확인을 요청했습니다. 정부는 ‘지난 수천 년간 한중관계의 역사에 있어 한국이 중국의 일부가 아니었다는 점은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라며 사실여부에 확인을 요청했지만 중국은 확인을 피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주변국가에 대한 인식의 단면입니다.

 고래로 대국인 중국의 주변 민족은 흉노족, 몽고족, 티벳족, 선비족, 여진족, 거란족 등 많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우리 한민족, 현재에 이르러 독립국가로 남은 민족은 우리나라가 유일하다고 하겠습니다. 몽고족의 일부가 국가로 남아있긴 하지만 민족의 대부분이 중국의 내몽고자치구에 속하고 있습니다. 그 막강한 주변 민족, 국가들이 모두 중국의 일부가 되어 사라졌습니다.

 중국의 주변국가에 대한 태도는 ‘원교근공(遠交近攻)’, 즉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와는 사귀고 가까운 나라는 경계하고 공격한다는 것입니다. 고대 중국의 가장 골칫거리는 서북방의 유목민족 흉노족이었습니다. 세력도 막강했습니다.

 기원전 200년, 항우를 물리치고 한나라를 건국한 유방 한고조는 흉노를 정벌하러 친히 전쟁에 나갔다가 흉노의 꼬임에 빠져 산서성 백등산에서 흉노의 40만 군사에게 포위당하고 말았습니다. 고조는 모사를 시켜 흉노의 왕 모돈의 부인에게 황금과 주옥을 수레 가득 뇌물을 바치고 나서야 겨우 풀려났습니다. 중국에서는 이를 ‘백등산의 치욕’ 백등지치(白登之恥)라 합니다.

 흉노의 실력을 실감한 황제는 화친하기로 하고 공주를 모돈에게 시집보냅니다. 후일 왕소군이 흉노에게 시집간 것도 그 정책의 일환이었습니다.

 한고조의 손자인 무제는 흉노에 대해 원교근공을 추진합니다. 흉노에게 패해 멀리 중앙아시아로 쫓겨 간 오손(烏孫)에 장건(張騫)을 파견합니다. 장건은 도중에 10년을 흉노에 잡혀 포로생활을 하다 탈출해 겨우 오손에 도착합니다. 이 길이 바로 실크로드, 장건이 우여곡절 끝에 개척한 이 길로 이후 중국의 비단이 서쪽으로 팔려나갑니다. 그러나 협공으로 흉노를 공격하자는 장건의 설득에 오손은 응하지 않습니다. 이 때의 원교근공은 실패했지만 흉노는 그 후 언젠가 소리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중국이 주변 국가를 대하는 다른 전략은 이이제이(以夷制夷)였습니다. 중국 입장에서는 사방의 여느 민족들을 다 오랑캐라 불렀습니다. 이이제이란 이 오랑캐를 이용해 저 오랑캐를 제압한다는 것입니다. 오랑캐끼리 싸우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고 아니면 자신들의 오랑캐 토
벌전쟁에 다른 오랑캐를 앞세우는 전략입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사르후 전투에서 조선군을 앞세운 것입니다.

 1619년, 중국의 명나라는 동북방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후금(後金)을 제압하기 위해 정벌에 나섭니다. 당시 후금은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합해 그 기세가 대단했습니다. 명은 전쟁에 앞서 조선에 파병을 요청합니다. 조선의 왕은 광해군, 당시 조선은 불과 20년 전 일본과의 전쟁을 끝낸 터라 명나라를 지원할 국력이 안 됐지만 명나라가 거듭되는 요청에다 신하들의 재촉에 결국 1만 명의 전투병을 파병합니다. 명나라의 이이제이 전략을 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조선군을 앞세운 명나라는 이 전투에서 참패함으로써 이후 명나라의 국운은 크게 쇠하게 됐고 반대로 후금은 만주 지역의 패권을 확보하게 됐습니다. 후금은 후일 청(淸)으로 국호를 바꾸고 명나라를 멸망시킵니다.

 중국의 또 다른 이웃나라 전략에 순망치한(脣亡齒寒)이 있습니다.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 즉 완충지대 역할을 하는 이웃나라를 보호한다는 전략입니다.
 
 임진왜란 초기, 명나라는 조선을 크게 오해했습니다. 조선의 길을 빌려 명나라를 치고자 하는 왜군의 전략에 조선이 동조하는 것 아닌가하고 의심했습니다. 왜군의 진격속도가 너무 빨랐기 때문입니다. 전투다운 전투없이 왜군은 보름 만에 한강에 도달했습니다. 구원병을 요청하는 조선의 사신에게 노골적으로 의심을 드러냈습니다. 다급하게 재차 사신을 보내자 왜군 전력을 탐색하기 위해 부총병 조승훈과 병력 5,000명을 보냅니다. 조승훈이 일거 참패를 당한 뒤에야 본격적인 구원병을 보냅니다. 7만 4,000의 대군을 파견합니다. 전쟁이 자국인 요동지역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한양을 탈환한 뒤에는 강화(講和), 즉 종전을 추진합니다. 그런데 당시 명국이 내건 강화조건에 조선반도 분할조건이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명국에게 조선은 그야말로 입술국가, 완충지역 그뿐이었습니다.

 6·25 한국전쟁에서도 중국의 역할은 결정적이었습니다. 당시 중국은 국공내전을 통해 장개석 군대를 대만으로 몰아내고 건국한지 채 2년이 되지 않아 전쟁에 참전하기 극히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군부 내에서 반대도 많았고 국내 식량난도 심각했지만 모택동은 참전을 결심합니다. 중국의 보편적인 정책인 ‘적대국가와 국경을 같이하지 않는다’라는 순망치한(脣亡齒寒) 전략에 따른 사전조치였던 것입니다.

 최근 북한에 대한 미국 트럼프 정부의 태도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핵 보유를 기정사실화하
고 핵실험을 준비하고 있는 북한에 대해 미국은 군사적 조치를 공언하고 있습니다. 군사적 조치로 선제공격까지 거론하고 있습니다. 중국에 대해서는 북한에 대한 압박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막무가내인 북한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까요. 여러 얘기가 있습니다만, 어떠한 경우에도 중국은 북한을 순망치한으로 엮어두려 하지 않을까요? 그게 중국의 국가이익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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