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천금성의 ‘한국 원양어업 개척사’ ⑨
다시 보는 천금성의 ‘한국 원양어업 개척사’ ⑨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 승인 2017.04.03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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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작가 故 천금성 기획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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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故 천금성 작가

 한국 수산업이 북양에서 황금기를 구가한 것은 정영준 사장의 삼양수산이 무작정 미국 영해에서 벌인 연어잡이가 아니라, 바로 그 무렵 한국수산개발공사 소속선인 ‘602강화’호가 베링 해에서 시험조업을 하면서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그곳 베링 해로부터 당시 소련 영해의 캄차카 해에 이르는 북위 50도의 넓은 바다에는 한국 트롤선 모두가 뛰어들어 그물을 끌어도 얼마든지 뱃짐을 채워낼 만큼 엄청난 양의 명태가 회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북양어업이라고 하면 곧 명태잡이의 또 다른 대명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어장 파악을 못한 최초의 개척사들은 하필이면 미국이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베링 해로 진출해 연어를 잡으려고 시도한 데서 귀중한 시간과 노력을 허비한 꼴이 됐던 것이다.

 그 사례가 정부의 적극적 주도 하에 3사(社)가 통합해 새로이 발족한 태양어업(주)였다. 삼양수산에 이은 태양어업의 북양선단은 규모 면에서 우선 경이로운 면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앞서 노르웨이로부터 도입한 여객선을 개조한 신흥수산의 1만 톤급 공모선(工母船)을 필두로 15척의 ‘캐처(일반 조업선)’가 따라붙었고, 거기에 1,000~1,500톤급 운반선이 3척이나 가세하고 있었으니 그만하면 세상의 어느 바다로 나가더라도 두려울 게 없는 대선단(大船團)임이 분명했다.

 그렇게 진용을 갖추자 선단은 단기간에 투자금을 회수하기로 하고 고가의 연어를 잡기로 의견을 모았는데, 출어연도인 1970년 한 해 동안 3만톤을 잡아, 그 중 절반은 현장(공모선 내 가공공장)에서 통조림으로 만들고, 나머지 반은 냉동 처리해 그 모두를 미국과 일본 등 지로 수출한다는 참으로 원대한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그게 못 오를 나무였으며, 때문에 태양수산마저 은행의 관리체제로 넘어가는 비운의 단초가 됐던 것이다. 그 실패의 자초지종을 여기서 짚을 필요가 있다.

 잡은 고기를 바다 위에서 곧장 통조림 제품까지 만들어낼 만큼의 기능을 가진 대선단, 공모선에는 선장 말고도 선단을 지휘할 선단장(船團長)과 공장장(工場長)이라는 별도의 직책까지 두고 있었다. 그 공장장은 수산청 출신으로 주일대산관에서 어로담당관을 역임한 노재동 씨가 맡았다.

 출어를 위한 준비도 몇 달이나 걸렸다. 연어를 잡으려면 유자망(流刺網) 방식을 써야 하는데, 어구를 비롯한 각종 예비품이 일본 어망회사로부터 아주 늦게 도착한 때문이었다. 거기에 한국 선단의 북양출어를 바라보는 일본의 속내사 담겨 있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한국선단의 북양출어가 마뜩찮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보면 한국선의 북양진출은 자국의 향후 행보에 어쩌면 좋은 계기를 마련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었다.

 수산업에 관한 한 본능적으로 반응해온 일본은 광대한 북태평양 전체를 아주 마음껏 휘저어댔으면 했으나 아직도 미국의 점령 하에 있던 1951년 12월, 미국 주도 하에 캐나다와 함께 3개국이 체결한 어업조약(漁業條約)에서 일본만큼은 북태평양의 절반에 해당하는 동경 175도 선을 넘어서면 안 된다는 부속서(附屬書)의 규정에 묶여 조업 범위가 한정돼 있었다. 그런데 한국전쟁 이후 줄곧 미국으로부터 경제원조를 받아온 한국은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북양진출을 밀어붙이고 있음을 보고 그렇다면 이 참에 어쩌면 자신들에게도 유리한 국면이 전개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게 된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처음부터 한국선단의 북양출어를 범국민적(汎國民的)으로 저지하는 입장이었다. 더욱 대상 어종이 연어라니까 그에 대한 반응은 거의 신경질적이기까지 했다. 물론 태양수산도 그 상황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예 국제관례나 그 절차를 무시한 막무가
내식으로 밀어붙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출항에 앞서 수산청과 회사는 갖은 꾀를 동원했다. 우선 회사를 출범시키면서 이사(理事) 진용에다 퇴역장성을 끼워 넣은 이외에, 청와대 비서관이 참석하는 비밀회의도 몇 차례 가졌으며, 나중 출항 임박해서는 회사 이름까지도 등기부 상의 태양수산이 아닌 ‘삼양어업(주)’로 바꾸기까지 했는데, 그것은 비록 실패의 쓴잔을 맛봤을망정 세 차례나 되는 북양출어 경력을 사진 예전 삼양수산의 간판을 은근히 앞세워 미국의 저지를 완화시키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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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정부와 어민들이 연어 자원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지극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북태평양을 회유하는 연어는 모두 미국의 각급 하천에서 부화해 바다로 나간 만큼 아무리 공해상일지라도 다른 나라가 잡아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배타적 고집은 갖고 있었고, 또한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철저한 보호와 관리 하에서 지금껏 그 자원이 보존돼 왔다는 우직한 주장을 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일본도 마음 놓고 연어잡이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판국이나 설령 고기를 잡더라도 그 어획물을 온전히 판매할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선단이 출항하기 한 달 전 정규성(丁奎成) 사장이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워싱턴 조야의 정치인들을 상대로 온갖 접촉을 벌였으나 도무지 먹혀들
지 않았다. 다급해진 정 사장은 출항을 앞둔 노재동 공장장을 전화로 불러서는 곧장 워싱턴으로 오라고 지시했다. 그렇게 하여 출항을 앞두고 공장장을 급히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소동까지 벌여야 했다.

 알래스카를 경유해 워싱턴에 도착한 노 이사는 장 사장과 함께 우선 도널드 맥커난 미국무성 수산담당 대사(大使)를 만났다. 일행을 만난 맥커난 대사는 처음부터 한국선의 연어잡이는 국제해양법에 위배된다는 식으로 크게 나왔다. 그 말을 들은 정 사장은 뒤틀렸다.

 “도대체 그런 엉터리 규정이 국제해양법 몇 장 몇 조에 있습니까?”

 

▲ 북양 명태 조업

 맥커난 대사는 꼭 그런 규정은 없으나 전통적으로 우호적인 한미 양국 관계에 비춰서라도 우리 어민의 정서를 해쳐선 곤란하다고 맞받았다. 그러면서, ‘만약 연어와 넙치만 잡지 않는다면 한국선의 북양조업은 사능할지도 모르겠다’고 회유했다. 그러나 정 사장은 다른 고기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특히 미국인들이 북태평양 연어를 자국 소유라고 우기는 데 대해서는 한사코 동의할 수 없었다.

 

 “좋습니다. 당신 말대로 연어가 미국 것이라는 증거가 있으면 그렇게 하지요. 가령 고기마다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라는 스탬프가 찍혀 있다면 말입니다”

 농담조 말이었지만, 그 농담에 맞장구를 칠 맥커난 대사가 아니었다. 그 여파로 미국은 한창 조업 중인 한국선단에 대해 ‘당장 조업을 중단하라!’는 전문을 보내도록 압박하기에 이르렀다.

 조업이 불가능해지자 삼양수산 측은 궁여지책으로 미국 어민들이 잡은 연어를 매입(買入)하겠다고 제의했다. 그 고기를 일본 등지에 팔아 출어경비라도 건지겠다는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일이 수월하게 진행되는 듯 싶었다. 곧 알래스카의 한 어류판매상과 계약을 맺으면서 선단을 베링 해 동쪽 브리스톨 만 영해 가까이로 접근토록 해 입국허가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종무소식이었다. 워싱턴의 양해와는 달리 알래스카 주정부가 한국에 대해 연어를 팔 수 없다고 거절한 때문이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알래스카 주지사 대답은 이러했다.

 “금년 연어잡이는 너무 흉어였소. 때문에 우리 가공업체가 필요로 하는 주지사가 말한 원료 조달에도 바상이 걸려 있소”

 알래스카 주지사가 말한 연어불황은 전혀 사실과 다른 것이었다. 그래서 노재동 이사는 앵커리지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직접 현장에서 확인했었는데, 연어 자원은 알래스카 공장에 조달하고도 남을 만큼 풍어를 이루고 있다’고 반박했다.

 사태가 그렇게 된 것은, 당시 알래스카에서는 주지사 선거를 앞두고 있어서 선거 국면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서는(알래스카 연어잡이 어민의 호감을 사기 위해서는) 한국선의 입어를 막는 게 급선무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한국이 연어를 사겠다고 나선 것은 그것을 기회로 은근슬쩍 연어잡이에 나설 수작이라고 단정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렇게 한국선의 연어잡이는 한바탕 꿈으로 끝났고, 어부지리를 기대하던 일본 역시 그 꿈을 영원히 접지 않으면 안 됐다.

 결국 제대로 고기잡이도 하지 못 하고, 연어구매 계획도 불발로 끝나자 정부 주도 하에 출범한 태양수산마저 빚더미에 올라앉으면서 끝내 은행관리 체제로 넘어가는 비운에 처하고 만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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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6년 부산수대 실습선인 백경 호를 시발로 3차에 걸친 삼양수산과 대규모 선단인 태양수산의 도전이 모두 실패로 끝나면서 한국의 북양어업은 그것으로 종언을 고할 상황이었다.

 거기에 서광(曙光)을 찾아낸 것이 앞서 말한 한국수산개발공사 소속, 1,400톤급 ‘제 602강화’ 호였다. 1966년, 어업차관형식으로 프랑스로부터 도입한 그 배는 사이드트롤이 아닌, 선미(船尾) 슬립웨이로 그물을 풀고 거둬 올리는 한국 최초의 스턴 트롤선이었다.

 지금도 어업강국인 아이슬란드나 노르웨이 등지에서는 배 현측에서 투망과 양망을 하는 사이드트롤 방식을 적용하고 있지만, 갑판작업을 하는 어부 입장에서 보면 스턴 트롤 방식이 매우 유용했다. 일찍이(1954년) 미국에서 창안된 스턴 트롤은 이후 유럽의 여러 나라로 확대·보급됐는데, 일본도 기술자들을 대서 구라파로 파견해 그 방식을 습득했던 것이다.

 602강화 호는 한국으로 오는 도중 대서양 모로코 인근에서 시험조업을 실시했다. 그러나 어획이 신통치 않았 파마나 운하를 거쳐 태평양으로 건너와서는 북위 50도 이북의 베링 해로 진입한 다음 그물을 던져 넣었더니 바로 그곳에서 엄청난 양의 명태가 그물 가득 들어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 한국의 북양어업에 불을 지피는 결정적 계기였던 것이다. 두어 시간 예망한 다음 그물을 올리고 보면 단 한 방에 1,000상자도 넘는 대어였으니 그 감격이 얼마일까. 고기 값이야 연어에 비할 바 아니지만, 우선 미국의 까다로운 간섭도 없는데다가 비록 수출 품목은 아니지만, 국민에게 아주 싼 값으로 단백질을 제공한다는 그 한 가지만으로도 북양어장은 그야말로 황금을 건져 올리는 노다지에 진배없었던 것이다. 그 소식을 듣고 대림수산과 한성기업 및 진양수산이 서둘러 북양으로 진출했는데, 그로부터 10년 후인 1977년 미국과 당시 러시아가 200해리 경제수역을 선포하기까지 한국의 북양 트롤선단은 역사상 최대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것이다. 가령 1976년 한 해 동안 고려원양의 2만 5,000톤급 공모선 ‘유신’ 호를 포함한 9척의 대선단말고도 신라교역·남양사·오양수산·구일산업 등 대소 15개사 소속선 21척 등 도합 30척이 북양의 캄차카와 베링 해에서 매년 50만 톤 이상의 명태를 잡은 게 그 증거인 것이다.

 한국 북양어업의 기세가 한 풀 꺾이게 된 단초는 어자원 보호를 핑계로 세계 각 연안국이 경쟁적으로 벌인 200해리 경제수역 선포 말고도, 미국 루이지애나 주 출신 브로우(Breaux) 하원의원이 제안한 ‘브로우 법’(1980년 4월)과 워싱턴 주 출신 매그너슨(Magnuson) 상원의
원이 알래스카 출신 의원들과 함께 의회 어업소분과위(漁業小分科委)를 통과시킨 이른바 ‘매그너슨 법’(1980년 5월)이었다.

 그 두 법안은 곧 미국의 200해리 영해 내에서 조업하는 외국선들을 대상으로 쿼터제(어획할당제)를 적용하는 계기가 됐는데, 그렇게 외국선들의 어획량을 감소시켜 나감으로써 궁극적으로 어자원을 보호하는 것과 함께 자국 어업을 활성화시키고 진작시키겠다는 의도였다. 당시 미국의 북태평양 200해리 경제수역 내에는 한국을 비롯한 일본·러시아·폴란드·아이슬란드 및 중국 등이 아주 경쟁적으로 조업에 임하고 있었는데, 그법의 제정으로 각 국은 한순간에 된서리를 맞게 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미국은 특히 한국선에 대해 1979년을 100(약 12만톤)으로 잡고, 81년도부터는 79년의 80%(약 10만톤)를, 그 다음 해인 82년에는 70%(약 8만 3,000톤)를, 그렇게 매년 어획량을 줄여나가 그 5년 후인 1985년부터는 겨우 10% 선약(약 3만톤)으로 축소시키도록 해 끝내 한국의 북양어업이 그만 종언을 고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어획 쿼터제의 도입이야말로 한국의 북양어업을 쇠퇴시킨 주범이지만, 그에 못지 않게 과다한 입어료의 요구도 문제였다.

 쿼터량에 묶여 마음껏 고기를 잡지도 못 하면서, 미국의 200해리 내에서 조업하기 위해서는 허가수수료 이외에 별도의 어획수수료까지를 요구했는데, 1979년의 경우 두 수수료 총액이 120만 달러를 넘었으니 도대체 무슨 재주로 수지를 맞출 수 있었을 것인가.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 북양 트롤어업은 겨우 몇 척의 트롤선이 오로지 러시아의 제한된 쿼터제에 의지해 매년 2만톤 남짓한 어획으로 그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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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태평양 명태 트롤 조업

 북양어업말고도 앞서의 수개공 트롤선에 의한 대서양 조업도 눈여겨 볼 대목의 하나다. 북양에서의 주 어종은 명태였으나, 서북부 아프리카 대륙의 모로코와 모리타니아 인근은 문어와 오징어 및 돔 어종이 절반을 넘었고, 기타 고가 저서어족이 골고루 섞여 있는 매우 양질의 어장이었다.

 

 수개공은 앞서 말한 602강화 로에 의한 시험조업이 실패로 끝났음에도 굴하지 않고 곧 동형의 601강화 호를 비롯해 220톤급 2척과 135톤급 4척 등 모구 7척을 투입해 어장조사를 겸한 조업을 계속토록 했다. 그 결과 총 2,000여 톤의 어획을 달성해 거기에 고무된 한국 수산회사들은 아주 경쟁적으로 배를 대서양으로 보내면서 불과 3년 후인 1970년도에는 도합 95척에 이를 만큼 카나리아 군도의 라스팔마스는 태극기 깃발로 나부끼면서 대서양 트롤시대를 개막했던 것이다.

 그 같은 호황은 서북부 아프리카 연안국인 모리타니아와 모로코가 200해리 경제수역 선포에 따라 조업을 규제하면서 슬금슬금 입어료를 받아내기 시작한 70년대 종반까지 이어졌다.

 한국 수산업이 악전고투하게 된 연유는 무엇보다도 우리 어장이 없다는 데 있었다. 화려한 대서양 트롤 시대의 개막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활로를 트지 못한 것은 1976년 2월 사하라 어장의 75%에 해당하는 바다가 한국과 비수교국(非修交國)인 모리타니아에 귀속된 데 연유한다. 그 결과로 한국은 기득권조차 인정받지 못 하고 어장에서 쫓겨나는 설움을 맛봤던 것이다.
 
 원해 사하라 해역은 스페인 령(領)에 속했으나, 2차 대전 이후 아프리카 국가들의 지속적인 영유권 반환 요구에 포기하고 말았다.

 사하라 사막은 말 그대로 황무지에다 버려진 땅이었으나 그곳에는 인광석(燐鑛石)이 세계 총량의 80%인 100억 톤 이상이 매장되어 있다는 보고가 있던 참이라 그 다툼이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사하라 사막의 얼마만큼을 어느 나라가 차지하느냐에 따라 인근 연안의 어장 면적도 결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여 오랜 다툼 끝에 1976년 모리타니아가 75%를, 모로코가 25%를 각각 분할 점유하게 되면서 그만 한국선은 사하라 어장에서도 쫓겨나게 된 것이었다.

 당시 우리 정부 당국이 한 조치나 대응은 참으로 눈물겨운 것이었다. 정부를 대신한 당시 한국원양어업협회 박원빈(朴原彬) 회장은 한창 사하라 분할 문제로 예민해 있던 75년 모로코를 방문해 양군 간의 협력 방안을 모색했으나, 모로코 역시 자국 경제발전에 전념하던 때여서, 연 5만톤에 그치고 있던 정어리 생산량을 그 10배인 50만톤으로 끌어올릴 원대한 계획을 추진하고 있던 참이라 한국선의 입어를 허락하는 대신 자국 어선단의 조업 수행을 위한 기술지도와 어로장비의 지원 등을 강조하는 실정이어서 한국의 의도는 좌절될 수밖에 없
었던 것이다.

 궁여지책으로 한국은 모리타니아와 민간 차원의 어업협력(漁業協力)을 강구하게 되는데, 어렵사리 모리타니아 민간 사절단을 한국으로 초대해 융승한 대접을 한 끝에 겨우겨우 민간 합작회사인 ‘코마코프(COMACOP)’사(社)를 설립하고, 곧 2만톤의 쿼터까지 배정받으면서 일견 무난히 조업에 임할 것으로 기대되기도 했으나, 이후 모리타니아 정부는 망목(網目) 크기를 위반했거나 불법조업이라는 명목으로 배들을 나포하기 일쑤였고, 그로 인해 벌금을 물거나 억류되는 일이 항다반사여서 원만한 조업 수행이 어려웠던 것이다.

 그 결과로 모리타니아 어장으로 들어가기 위해 공동회사를 설립까지 한 대서양개발(주) 역시 1985년 해산되는 처지에 놓이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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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장이 없는 배는 무용지물이다. 북양에 이어 대서양 어장마저 잃게 되자, 한국은 세계지도를 펴 놓고 연안을 가진 나라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가 어업협력을 제의했다.

 1975년 1월, 이란과 협력을 체결한 세일수산이 그 해 연말 350톤급 트롤선 1척을 페르시아 만으로 투입한 게 그 하나의 사례였다. 그곳은 자원도 풍부했을 뿐 아니라 환경도 양호해 익년에는 11척으로 증가했고, 한창 때는 20척으로 불어나면서 매년 1만톤 가까운 어획을 올렸다. 도대체 얼마나 잡았던지, 사업 시행 3~4년 만에 자원이 고갈되는 사태를 당해 부득이 반수가 철수하기에 이르렀고, 그나마도 1979년 이란과 이라크 간의 전쟁 확대와 중동 전역의 정정불안 등으로 손을 털게 된 것이었다.

 이란과 마찬가지로 인도양의 파키스탄을 비롯, 인도·오만·바레인과의 제휴도 빠지지 않았으며, 심지어 오늘날 겁 없는 해적질로 세계인의 눈총을 받고 있는 동북부 아프리카 미개국인 소말리아 연안에서도 한국 트롤선들이 몇 년 동안이나 그물을 끌었으니 그 끈기와 지독함이 오죽한가.

▲ 꽁치 봉수망 조업

 거기에 1978년 남북수산(南北水産)의 5,000톤급 트롤 공모선 ‘남북’ 호의 남빙양 크릴 조업과 85년 대왕수산(大旺水産) 소속 300톤급 채낚기선 2척을 멀리 남대서양의 포클랜드 어장으로 보내면서 당시까지 어장을 지켜오고 있던 사례 또한 한국 수산인의 끈기이자 우리 수산업을 이끌어온 버팀목이었다.

 

 마지막으로, 한국선이 북양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당시까지 고군분투하고 있던 업종이 ‘꽁치 봉수망(棒受網) 어업’이었다. 고촉광(高燭光)의 집어등으로 꽁치 떼를 유인해 강력한 ‘피쉬 펌프(Fish Pump)’로 퍼올리는 식의 꽁치잡이는 1985년 대왕수산과 구일산업(久一産業)이 각각 2척(11·12대왕 호)과 1척(203오대양 호)을 북대서양으로 투입한 것이 그 시초다.

 예전부터 풍어를 이루던 한반도 동해에서 어자원이 고갈되자 두 회사는 일본 수산계가 연간 500여 척의 대선단을 북양에 내보내고 있음을 보고 지극히도 까다로운 그 조업에 용약 팔을 걷고 나선 것이었다. (그 뒤로 동원산업 및 연창물산과 해왕수산이 이에 참여했으며, 당시 10여 개 사 20여 척이 업에 종사했다)
 
 동해에서의 꽁치잡이는 70년대까지만 해도 매년 2만톤 가량을 어획했으나(일본은 그 10배인 20만톤이었음), 80년대 들면서 5,000톤에도 미치지 못 하자 한국인이 선호하는 통조림제조 원료의 조달에도 비상이 걸렸던 것이다.

 당시 꽁치 어장은 북위 35도 선에서 50도 사이의, 일본 열도 중허리에서 러시아의 캄카차 해에 이르는 북서태평양이었는데, 연중 조업이 가능했던 기간은 8월에서 10월까지의 3개월에 불과했지만, 한국선들은 5월 중순에 출어를 감행해 12월초까지 근 30여 개의 태풍을 만
나면서도 안전고투를 계속하면서 척당 1,500~2,000톤씩의 어획을 달성해왔다.

 하지만 엘니료 등의 영향으로 어장이 형성되지 않아 겨우 1,000톤 남짓으로 어기를 끌낼 참아라고 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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