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항 ‘개항’은 1407년이다
부산항 ‘개항’은 1407년이다
  • 이준후 시인/BCT 감사
  • 승인 2017.04.03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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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후 시인/BCT 감사

 ‘부산항 개항 141주년 기념식’이 지난 2월 28일 열렸습니다.

 

 민간단체에서 소박하게 진행하던 것을 부산시와 공공기관이 공동으로 주관해 많은 시민과 단체가 부산항 발전을 기원하는 자리로 발전한 것입니다. 올해가 개항141주년이니 역산하면 개항일은 1876년입니다. 강화도 조약의 결과였습니다. 강화도조약 체결은 운양호(雲楊號, 운요호)사건으로 시작됩니다.

 1875년 9월 20일, 강화도의 초지진은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에 휩싸였습니다. 영국에서 사들인 일본의 신식전함 운요호는 대포를 장비하고 1㎞ 밖에서 조준 사격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맞서는 초지진에는 최대사거리 700m에 명중률도 낮은 구식 홍이포뿐이었습니다. 이 운요호는 해안 측량을 내세우며 나가사키에서 출항, 먼저 부산에 입항해 위력 시위를 하고나서 강화도에 들이닥쳤습니다. 보트를 내려 상륙을 시도하자 초지진 조선 수비병들은 당연히 위협사격을 했는데, 그때부터 일방적인 포격이 시작됐습니다. 단시간 내에 초지진을 쑥밭으로 만든 운요호는 유유히 남하하며 인천 영종도까지 유린한 후 의기양양하게 나가사키로 귀항했습니다.

 1876년 1월부터 인천(제물포)에서 협상이 시작됐지만 실은 일본의 일방적인 요구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의 모양새였습니다. 국제협상에 무지한데다 일본의 무력 시위가 있었습니다. 다소 조정된 조약안이 2월 15일에 조선 조정에 회부됐고 조정은 숙의 끝에 이를 수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전문 외 12조의 조항을 가진 내용 중에 부산항을 비롯해 2개의 항구 개항에 관한 내용이 있습니다.

 이후 동년 8월에 ‘조일수호조규부록’과 ‘조일무역규칙을, 1883년에 ‘조일통상장정’을 체결해 ‘강화도조약’은 완결됐습니다. 범죄인 처벌에서 속인주의를 채택해 치외법권을 인정하고 관세권을 포기한 전형적인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특히 미곡류의 수출입을 인정, 쌀이 일본으로 수출될 수 있게 돼 조선의 식량 사정을 통제할 수 있게 됐을 뿐 아니라 물가마저 마음대로 주무르게 됐습니다. 당시 조선과 일본 양국은 만성적인 쌀부족상태에 있었습니다.

 1876년 2월 부산항 개항에 이어 1880년 원산항,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됐습니다. 개항 후 일본은 조선의 쌀부터 실어갔습니다. 조선에는 일본 공산품을 팔려는 일본 상인들이 건너왔습니다. 일본인들은 이미 건설돼 있던 초량왜관에 집단거류지를 만들어 살았고, 거류지는 11만 평에서 급기야 500만 평까지 확대했습니다. 일본 상인들은 조선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무역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은 부산을 대륙 침략에 필요한 기반시설을 갖춘 근대도시로 만들어 갔습니다.

 인천항은 1983년에 ‘개항’됐습니다. 인천시는 개항 100주년인 1983년 ‘인천 개항 100주년 기념탑’을 세웠습니다. 기념탑은 11억여 원을 들여 만들었으며 높이 33m, 깊이 9m의 규모에 선박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민들과 시민단체들은 2001년부터 “기념탑이 인천의 개항 역사를 왜곡하고 일제의 굴욕적인 문호 개방과 침략의 상징물”이라며 철거를 요구했습니다. 일제에 의한 개항은 수치이지 기념할 일이 아니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결국 인천시는 2003년 이 탑을 철거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부산항 개항은 1407년(조선태종 7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조선은 고려 말부터 전국적으로 출몰하던 왜구의 침략을 근본적으로 막기 위해 군사를 동원한 강경책과 항구를 개방해 무역을 하게 하는 온건책을 사용했습니다. 강경책은 대마도 정벌이었습니다. 1389년(고려 창왕) 박위(朴)가 병선 100척을 이끌고 대마도를 공격해 왜선 300척을 불사르고 노사태(盧舍殆)를 진멸해 고려의 민간인 포로 남녀 100여 명을 찾아왔습니다. 1396년(태조)에는 김사형(金士衡)으로 하여금 대마도를 정벌케 했습니다. 1419년(세종)에 다시 대마도를 정벌했습니다. 세종은 이종무를 삼군도체찰사로 삼아 대마도를 공격해 큰 타격을 줬습니다.

 온건책으로 1407년(태종 7년) 부산포와 내이포(또는 제포, 지금의 진해)를 개방했습니다. 이어 1426년(세종 8년) 염포(지금의 울산)를 개방하고 왜관(倭館)을 설치했습니다. 이 곳에서만 교역을 허락하고 교린(交隣) 차원에서 면세(免稅)의 혜택을 줬습니다.

 그러나 이후에도 일본은 교역 확대를 요구하며 자주 폭동을 일으켜 교역이 중단됐습니다. 특히 1510년에 ‘삼포왜란’이 일어났습니다. 1510년 4월 내이포를 위시해 삼포에 거주하던 왜인 5,000여 명이 성을 포위하고 민가에 불을 질렀습니다. 폭동을 진압한 뒤 조정은 삼포에 거주하고 있던 모든 왜인들을 추방하고 일본과의 통교를 중단했습니다. 이후 조선은 대마도주의 간청으로 외교관계를 재개하고 내이포만을 개항하게 됩니다. 교역축소에 불만을 품은 일본은 1544년 통영 사량진을 약탈하고 1555년에는 남해안 일대를 대규모로 약탈하는 사건을 일으킵니다. 사량진왜변, 을묘왜변이라 합니다. 결정적으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양국의 관계는 완전히 파탄나게 됩니다.

 임진란 이후 일본이 꾸준히 통교요구를 해오고 특히 도쿠가와 막부가 적극적인 태도로 국교 회복을 요청합니다. 조선 조정에서는 찬·반 양론이 대두됐으나 1609년(광해군 1년) 강화조약을 맺습니다. 이에 부산포를 개항했으며 근대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부산항은 근대적 ‘개항’ 이후 발전하기 시작해 지금에 이르러 글로벌 항구로 성장했습니다.
과거 성장을 돌아보고 미래 발전을 기약하는 행사는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1876년 ‘개항’을 기념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부산항 개항은 1407년에 시작된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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