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경제학
눈물의 경제학
  • 이준후(시인, 산업은행 제주지점장)
  • 승인 2010.09.01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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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독일연설 기념비’가 올 12월 10일 세워질 거라고 한다. 박정희대통령의 ‘독일연설’은 무엇이고 ‘12월 10일’은 무엇일까.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4년 12월 10일 독일 북서부 뒤스부르크 시(市) 함보른 광산(鑛山)을 방문했다. 그곳 시민회관에는 1년 전, 그러니까 1963년 11월 이곳에 온 광부와 간호사들이 소식을 듣고 모였다. 당시 언론보도에 의하면 정장을 차려 입은 파독 광부 300여명과 한복을 입은 간호원 30여명이 긴장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들의 손에는 태극기가 들려 있었다. 대통령이 코트 차림으로 강당에 들어선 시각은 이날 오전 10시 40분쯤. 뤼브케 서독 대통령과의 만남, 에르하르트 수상과의 회담 등 주요 일정이 끝난 뒤였다. 박 대통령을 뒤에는 한복 차림을 한 육영수 여사 등이 따랐다. 파독 광부와 간호원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환영했고, 박 대통령 내외도 손을 흔들어 답례했다.

화환 증정 등에 이어 애국가가 연주되기 시작했다. 우렁차게 시작된 노래는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구절에서부터 목멘 소리가 나오기 시작하더니, 마지막 구절인 ‘대한사람 대한으로...’에선 아예 흐느낌으로 변했다. 설움의 눈물이었다. 박 대통령 내외도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회사측의 환영사가 있은 뒤 박 대통령이 격려사를 시작했다.

 “여러분, 만리타향에서 이렇게 상봉하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대통령의 준비된 연설은 여기서 몇 구절 더 나가지 못했다. 이 구석 저 구석의 흐느낌이 통곡으로 변해갔기 때문이다. 그러자 박정희는 연설원고를 옆으로 밀쳐버렸다. “광원 여러분, 간호원 여러분, 가족이나 고향생각에 괴로움이 많을 줄 알지만…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하여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결국 대통령은 연설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본인도 울어버렸기 때문이다.

파고다 담배 500갑을 선물하고 기숙사를 둘러본 박 대통령이 승용차로 향하자 일부 파독 광부는 악수를 청했다. 다른 일부 광부는 뤼브케 서독대통령의 의전실장 아놀드 쉐이퍼 앞에서 무릎을 꿇고 ‘대한민국을 살려 달라’?고 절을 하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차에 오르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울먹이는 소리를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만세! 만세! 대한민국 만세!.... 차가 사라질 때까지 계속 됐다. 그것은 절망의 끝자락에서 부르는 광부들의 노래였다.


 경제개발에는 돈이 있어야 했다. 1963년 9월말 국가의 달러보유고는 고작 1억 달러도 되지 않는 9,300만 달러에 불과했다. 5개년계획을 세워 놓았으나, 추진할 자금이 없었다. 군사정부를 탐탁하지 않게 여기는 미국은 무상원조를 받는 국가에게 차관을 줄 수 없다고 주장했고, 일본은 국교가 없는 나라와 차관협정을 맺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벼랑에 선 격이었다. 대통령의 서독방문은 공식적 이유가 무엇이건 차관을 얻어내기 위한 방문이었다는 게, 더 솔직하고 절실한 사정이었다.

차관지원 약속은 박 대통령이 방독하기 전에 양국 실무협상에서 어느 정도 논의가 됐지만, 박 대통령은 뤼브케 서독대통령과 에르하르트 수상, 서독 하원 방문 때마다 거듭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1억 5,900만 마르크(약 4,000만 달러)의 차관지원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그것으로 차관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남은 문제는 누가 지급 보증을 서느냐 하는 것이었다. 한국에 지급 보증을 서 줄 나라는 전 세계 아무 곳에도 없었다. 차관을 제공하겠다는 결정은 보았지만 지급보증 문제로 차관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까지 몰린 박정희 대통령이 궁여지책으로 마지막 방안을 독일에 내 놓은 것. 바로 그것이 독일에 광부 5,000명과 간호사 2,000명을 파견하는 것이었다. 즉 우리의 광부와 간호사들이 받는 3년간의 급여를 독일의 유수 은행인 코메르츠 뱅크에 매달 강제 예치하는 담보 형식으로 지급보증 문제의 해결을 보았던 것이다.

 애국가를 부르며 흐느끼던 광부들도 사실은 100대1의 경쟁을 뚫고 선발된 사람들이었다. 63년 파독(派獨) 광부 500명 모집에 4만 6,000명이 몰려들었다. 상당수가 대학졸업자와 중퇴자들이었다. 당시 남한 인구 2,400만 명에 정부공식 통계에 나타난 실업자 숫자만도 250만 명이 넘었다. 이런 시절이니 매월 600마르크(160달러)의 직장에 지원자가 밀려드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이들은 루르탄광 지하 1,000m와 3,000m 사이 막장에서 1m 파들어 갈 때마다 4~5마르크를 받았다.

그 돈으로 대한민국의 경제개발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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