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기회, 귀어 이야기 (23) <우리진수산> 진영국 대표
새로운 기회, 귀어 이야기 (23) <우리진수산> 진영국 대표
  • 김보연 기자
  • 승인 2017.03.08 14: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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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포바다에서
TWO JOB 뛰며 새 길 개척

▲ 진영국 대표, 아내와 함께_ 뒤에 보이는 후포바다가 내외가 비빌 언덕이다.

 

귀어 전 거주지역: 경기도
귀어지: 경북 울진군
귀어 전 직업: 자동차 정비업체 부장
귀어년도: 2014 년
나이: 46세
귀어초기자본: 3억 원
(본인 자본: 2 억 4,500 억 원, 대출금: 1 억 원)
현재소득: 1억 3,000 만 원 안팎

 
 별 보람 없던 도시생활

 스스로를 아직 ‘견습 수산인’이라고 표현하는 대게 전문 판매장 <우리진수산> 진영국 대표는 “최초로 가졌던 직업이 견습 정비공이었다. 두 번째 인생을 펼쳐갈 어촌에서의 첫 사업이니 당연히 ‘견습 수산인’이라야 옳다”고 주장한다.

 
평온한 표정으로 잔잔하게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놓는 진 대표지만, 모든 일이 말투만큼 쉽게 풀렸을 리 만무하다. 오히려 사방팔방 진창이었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그는 “9년 전 어느 날 밤, 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차장 밖에 스치듯 지나치는 아파트 창마다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고 우여곡절 많은 인생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는다. “‘식구들이 모두 둘러앉아 TV를 보고 있겠지’ 생각하며 부러워했다”는 진영국 대표는 “막상 내가 집에 도착하면 아이들은 이미 잠자리에 들었겠지. 온 가족이 오순도순 둘러앉아 저녁밥을 먹는 모습은 내게 드라마 속에서나 등장하는 풍경이 된지 오래구나라는 회의감이 몰려왔다”고 회상하듯 읊조렸다.

 이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든 진 대표는 지나온 세월을 뒤돌아보게 된다.

 계획없이 별안간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고향, 낯설기만 했던 서울, 만만치 않았던 첫 직장생활. 당시로서는 드물지 않은 가족사다. 그날 밤의 이런 기억들이 귀어·귀촌의 실질적 계기가 됐다.

 그 가족사를 간략해본다. 누구에게나 불상사는 뜻하지 않을 때 들이닥친다. 부친이 일으킨 추돌사고도 그랬다. 

▲ 진영국 대표가 새벽 산보 코스로 자주 들리는 후포수협 위판장
 고향인 전북 전주 일대를 영업권으로 삼고 제철과일 ‘밭떼기’ 도매와 비수기 때면 비누 등 유지 도매업을 하며 부지런히 살아온 부친이었기에 충격은 더 컸다. 트럭 짐칸 가득 고창 수박을 싣고 서둘러 전주로 오던 길, 우중에 그것도 하필 보험 만기일이 사흘쯤 지난 줄도 모르고 있다가 아차하는 순간 벌어진 일이었다. 집 팔고 차 팔아 뒷감당을 했으나, 남은 건 단돈 오백만원. 그걸 총재산 삼아 온 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옮겨와야 했던 부친의 마음은 어떠했겠는가. 88올림픽으로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 일색이던 무렵, 무궁화 열차 칸에 오글오글 모여 앉은 가족들에겐 한숨만 가득했던 기억을 그는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진영국 대표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농업고등학교도 그 길로 끝. 진 대표의 학력이 농고 중퇴인 이유다.

 그가 서울에서 산다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당시 중학생이던 여동생을 빼곤 모두 돈을 벌어야 했다. 부모님과 형은 물론, 자신까지 벌어도 빠듯했던 서울 살림. ‘정비사 모집. 견습생 환영’, 여드름투성이 소년 진영국은 그 ‘환영’이란 문구에 홀리듯 제 발로 카센터의 문을 두드렸다. 견습 딱지가 떼어지기 전까지는 출퇴근 차비와 밥값 정도만 인심쓰듯 건네주던 시절, 그는 ‘내가 이 서울 땅에 아버지 소원대로 문패를 꼭 걸어드리겠다’고 작정을 했다.

 온갖 사연도 많은 진 대표지만, 그 작정대로 됐다. 8년 만에 화곡동 까치산역 부근에 부친 명의의 빌라를 마련해드린 것이다.

 귀어·귀촌 이후의 행복한 삶

▲ 진영국 대표의 기댈 언덕 큰처남인 정두화 번영회장은 후포 마당발이다
 견습 정비공 때부터 ‘기술자 체질’이란 소리를 들은 그는 각박한 도시생활 중에도 ‘주말 처가행’을 감행했다. 주변에서 워낙 효녀소리를 듣던 아내가 청했고, 아내 말을 귀담아 들었다가 최소한 주말엔 쉴 수 있는 직급으로 승진하자 결행한 일이었다.

 이에 진영국 대표는 “바쁘게 사느라 연애다운 연애조차 못해봤으니 주말이라도 신혼 기분 내보자며 여행 겸 다녔던 것인데, 그 길을 오가며 귀어·귀촌에 대한 의견 조율과 대책을 상의하게 됐다”며 “주말 처가행 덕에 후포에 새 삶터를 닦게 된 것이다. 아이들도 대찬성이었다”고 말했다.

 그 이후 진행은 일사천리였다. 진 대표는 어촌에 살자면 회뜨기 등 일식요리 정도는 배워야 한다며 요리학원까지 다녔고, 지금까지 실질적인 도움이 되고 있다. 기본적 수산지식은 큰 처남을 통해 익혔고, 영덕군 수산기술센터(현 경북어업기술센터)에서 귀어·귀촌 관련 교육을 받으면서 자신감을 얻었다.

 도시 출신 귀어·귀촌을 꿈꾸는 이들이 어려워하는 살림집 문제도 큰 처남 내외 덕분에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한편, 그는 <우리진수산> 대표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백암대게마트에서 보낸다. 큰 처남 내외가 운영하는 대게와 회 전문점이다. 스스로가 사장이자, 월 200만 원을 받는 월급쟁이라니 중산층의 희망사항 ‘TWO JOB’의 꿈을 후포 어촌에서 이뤄낸 셈이랄까.

 진영국 대표는 월급쟁이로 대게, 홍게도 삶아내고, 물회용 오징어 회도 썰어 손님상에 올리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웃으며 말한다.

▲ 진영국 대표가 투잡 장소인 백암대게회마트 수족관에서 단체손님들이 주문한 홍게를 꺼내고 있다.
 이튿날, <우리진수산> 작업장을 보여주겠다며 차를 몰던 진 대표는 해안에 설치된 오징어 덕장을 보더니 브레이크를 밟는다. 덕장에 오징어 거는 작업 중인 사람들에게 허리를 접으며 ‘배꼽인사’부터 한다. 세 분의 어르신들이 건조작업 중인데, 서로 얼굴을 아는 사이인 모양이다.

 가뜩이나 웃는 상인데, 표정이 한층 밝아 보인다. 그에게 반건조 오징어 중 부러 좋은 놈만 챙겨서 넘겨준다. 이번엔 찻길 건너 번듯한 가공공장으로 발길을 옮긴다. 이곳도 오징어 건조작업 중인 건 마찬가지다. 

 손을 재게 움직이는 인부들에게도 목소리를 높여 아는 척을 하니 그제야 손길을 멈추며 마냥 반긴다.

▲ 작업장 가던 길 후포6리 해안에서 오징어 건조 작업 중인 마을 어민들과 대화를 나누는 진영국 대표
 이리 세 곳을 거쳐서야 도착한 후포 6리. ‘박곡’이라고도 불리는 해안에 <우리진수산> 작업장이 들어서 있다. 알토란같은 1억 원을 들여 일단 전세로 마련한 창고형 작업장. 뒤엔 단독주택까지 딸려 있어 본격 가동하면 직원들 숙소로 이용할 계획으로 지은 것이었다.

 여러 가지 포부는 크지만, 넓다 싶은 실내에 냉동고만 덜렁 세 대뿐, 게다가 두 대는 먼지만 뒤집어 쓴 채 뒤편에서 운전대기 중이다. 한 대만 열심히 돌아갔다.

 그럼에도 이를 바라보는 진영국 대표의 표정은 마냥 흐뭇한지 눈웃음을 친다. 아쉬울 것도, 모자랄 것도 없다.

 도심생활에 염증을 느껴 귀어하게 된 그에게는 후포바다에서 투잡을 뛰며 새 길을 개척한 것도, 마음의 여유를 느낄 수 있는 지금의 삶도 마냥 즐겁고 행복하기 때문이다. 웃음이 선한 진영국 대표의 내일이 궁금해진다. <글= 김보연 기자, 자료협조=한국어촌어항협회 귀어귀촌종합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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