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양 개척사> 제2부 한국 조선사업 개척사 ⑦
<오대양 개척사> 제2부 한국 조선사업 개척사 ⑦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 승인 2010.08.16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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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작가 천금성의 기획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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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소(造船所)는 배를 짓는 곳이다. 나중 배는 물에 띄워져 스크루가 물을 차내는 만큼 앞으로 나아가고, 키를 돌리는 만큼 뱃머리가 돌아간다. 스크루 회전수를 높이면 속력은 빨라지고, 키를 크게 꺾으면 뱃머리도 크게 또 빨리 돌아간다. 그렇게 차근차근 항로를 밟아 필경에는 목적지(항구)에 도착한다.
  하지만 배를 짓는 일은 전적으로 주택이나 빌딩을 짓는 건축업과는 다르다. 빌딩이나 창고는 단단한 땅에다 건물을 올려 세우는 것으로 끝나지만, 배는 지은 다음 반드시 물에 띄워야 한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물 위에서 배를 지을 수는 없다. 반드시 바닥이 견고한 육지에서 선체(船體)를 번듯하게 꾸민 다음 비로소 물에 띄우는 것이다. 이 과정을 진수(進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건설업으로 반생을 살아온 정주영은 처음부터 배 짓기를 집짓기 이상으로 치부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일군 현대건설은 종합 건설회사다. 그러니까 기계와 전기 등 모든 분야에 통달한 기술자도 많고, 장비도 많다. 그 역량을 총동원하면 까짓것 배쯤이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그러면서 그는 고도의 정밀함과 과학적 전문성을 요하는 고리 원자력발전소 등을 독자적으로 건설해낸 실적을 앞세웠다. 그 발전소야말로 철근과 시멘트로 단단히 다진 대형 탱크 속에다 전기를 일으키는 터빈을 집어넣은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 견해가 틀리는 건 아니다. 하지만 배라는 것은 다 짓고 난 다음 진수라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점을 크게 고려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해냈다.
  가령 몇 톤급 소형 목선을 물에 띄우는 것은 경사진 곳에다 몇 개의 통나무를 나열하고 그 위에 선체를 올리는 것만으로 가능하다. 또 몇백톤급 강선이라도 레일 위에 올려놓으면 아주 쉽게 바다로 미끄러진다.
  하지만 그리스의 리바노스 선주로부터 주문을 받은 26만톤급 선박이라면 문제는 확 달라진다. ‘무지무지하게 큰 배’라는 뜻의 VLCC는 통나무를 받칠 수도, 레일 위에 올릴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처럼 배가 대형이다 보니 장착되는 온갖 장비나 기계 역시 클 수밖에 없다. 가령 선체의 추진을 담당하는 메인 엔진(주기관)만 하더라도 그 하나가 3층 높이의 시골 중학교 교사(校舍) 이상의 규모이니 하는 말이다.
  그 거대한 배를 짓기 위해서는 배를 통째 수용할 수 있는 엄청난 넓이의 드라이 도크(Dry Dock)가 있어야 한다. 쉽게 말해 올림픽 수영장 크기의 열 배도 넘는 초대형 풀장이다.
  바다를 낀 풀장은 처음부터 해수면보다 더 깊게 굴착하여 조성된다. 그리하여 나중 선체가 완성되는 대로 갑문을 열어 바닷물을 채우면서 비로소 물에 띄우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예사 풀장으로 보면 곤란하다. 풀장은 그저 물만 채우는 것으로 그치지만, 도크는 그곳에서 온갖 선체 조립작업을 수행하여야 하므로 곳곳에 배관이며 전기배선 등의 시설이 벽면 가득 채워져 있다.
  배를 짓는 사업을 하겠다고 덜컥 팔소매를 걷어붙였지만, 막상 시작하고 보니 예삿일이 아니었다. 초대형 도크를 조성하는 일이야말로 난공사 중의 난공사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대형 크레인을 도크 위에 설치하는 작업 역시 초고층 빌딩을 축조하는 이상의 정성과 기술이 요구되었다. 우리가 흔히 사진에서 보는 골리앗 크레인 상단 ‘가로 수평대’에 씌어진 ‘HYUNDAI’라는 글자 키가 자그만치 8m에 이르니 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 장에서 우리는 현대조선소 건설 초기, 대형 드라이 도크 조성작업과 골리앗 크레인 설치작업 등에 얽힌 이야기를 듣는 것도 매우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바로 그 공사야말로 미래 한국 조선산업이 세계 최고로 부상하는 가장 기초적인 첫 걸음마였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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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크 조성을 위한 작업은 한파가 휘몰아치기 시작한 1971년 12월 시작되었다. 하루라도 빨리 지반을 굴착하여 깊고 널따란 구덩이를 만들어야 내년 3월로 잡힌 기공식도 구색을 갖출 것이었다.
  처음에는 길이 500m, 너비 80m, 깊이 12m 규모의 구덩이를 파낼 작정이었다. 그러면 당초 목표한 대로 100만톤급 규모의 도크가 만들어질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길이를 재보니 양쪽 끝단이 바다에 닿아 도크가 아닌 운하(運河)가 될 판이었다. 부득이 길이를 100m 줄이기로 하였고(400m), 나중 추가로 조성할 제 2도크를 500m로 만들기로 했다. 우리가 지금 보는 울산 현대조선소의 2도크가 1도크보다 큰 것은 그 같은 사연 때문이었다.
  1도크 조성지는 지반이 모두 암반이었다. 때문에 공사 진척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맨날 굴착기 굉음과 다이너마이트 폭파음이 전하만을 메아리쳤다. 작업속도는 느렸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손해만 본 것은 아니었다. 굴착으로 나온 암반 조각은 곧 조성 작업에 들어갈 방파제 축조와 2도크 부지 확보를 위한 매립토로 쓰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공정은 단순명료하였으나 그렇다고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바닥이나 벽을 입히는 콘크리트도 철판 이상의 강도를 가져야 했고, 지반 역시 균일한 역학적 부하(力學的負荷)를 견뎌낼 수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도크가 바닷물로 가득 차는 순간 고르지 않은 하중(荷重)을 견디지 못해 균열이 생기면서 낭패가 난다. 하지만 그 문제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2도크와 달리 1도크는 지반이 암반인 데다가, 작업원 모두 평생토록 콘크리트를 버무리며 자라온 현대건설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작업은 해를 넘겨서도 계속됐다. 그런데 작업이 막바지에 이른 72년 7월, 폭우가 쏟아졌다. 장마는 지난달부터 이어지고 있었으나, 한여름 들면서 기상이 야료를 부린 것이었다. 시간당 200mm가 넘는 엄청난 폭우였다.
  폭우로 공사장은 온통 물바다가 되었다. 그리고 주변 빗물이 모두 구덩이로 몰려들었다. 순식간에 10미터 깊이로 파인 구덩이는 커다란 호수를 방불케 했다. 그 양이 수십억 톤이었다.
  하루 종일 퍼부어댄 폭우는 다음날에야 겨우 그쳤다. 당장 할 일은 구덩이를 가득 채운 물을 빼내는 일이었다. 수십 대의 양수기를 동원하여 물을 모두 빼내는 데만 꼬박 사흘이 걸렸다.
  도대체 하늘의 조화인 폭우를 무슨 재주로 막아낼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정주영은 그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지 않은 것도 문제라고 생각했다. 비로소 ‘종합적인 대비책’을 강구하기 시작한 것도 그 덕분이었다. 아무리 분야가 다른 별도의 작업이라도 반드시 연계성은 있다. 체계적이면서 조직적인 작업이 손실을 방지하고 공기를 단축한다는 진리를 터득케 한 것이었다.
  그 같은 난관 끝에 1도크는 공사를 시작한 지 꼭 1년만인 72년 12월에 1차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다시 1년이 지난 다음에야 도크의 하이라이트인 수문(水門) 설치가 완성되었으며, 그 때부터 비로소 리바노스 선주의 1호선 ‘애틀랜틱 배런’ 호의 본격 건조작업이 도크 안에서 이루어지게 된 것이었다.
  골리앗 크레인의 위용 역시 경이 그 자체였다. 높이 82m, 폭 1백40m에 최대 인양 능력 4백50톤의 매머드 규모였다. 당시 서독과 일본·벨기에·영국·스웨덴 등 5개국 조선소만 보유한 최신형이었다. 지주(支柱)는 초속 50m의 강풍도 견뎌낼 수 있도록 설계되었고, 내부에 장착된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면 꼭대기까지 단 1분 만에 올라갈 수 있었다.
  크레인은 서독 주코(JUCHO) 사 제품이었다. 도입할 때 두 개 지주와 가로수평대는 분리되어 있었다. 축구 골대처럼 생긴 거대한 구조물을 생짜배기로 운반할 수 없어서였다.
  설치작업은 현대건설 기계부가 맡았는데, 완전히 일으켜 세우는데만 꼬박 8개월이 걸렸다. 처음 두 개의 지주는 간신히 일으켜 세웠으나 가로수평대가 문제였다. 그것을 고공 82m 높이의 지주 꼭대기까지 끌어 올린 다음 ‘?’ 형태로 단단히 연결해야 비로소 제몫을 할 것이었다.
  당시 국내에는 그만한 중량물을 1백40m 지주 꼭대기까지 들어 올릴 장비가 없었다. 서독 제작사도 그 방안을 갖고 있지 못 했다. 궁리 끝에 자동차 타이어를 교체할 때 사용하는 소형 잭업(jack-up)을 사용하기로 했다. 가로수평대 밑에다 30개의 잭업을 일렬로 나열한 다음 동시에 작동시키는 아주 원시적인 방법이었다. 만약 한 개라도 어긋나면 무슨 사단이 벌어질지 모를 판이었다. 서독 기술자들은 내처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러나 정주영은 그대로 밀어붙였다. 인도일은 다가오는데, 더 머뭇거릴 형편이 아니어서였다.
  첫날 가로수평대는 땅에서 겨우 15cm 들어 올려졌다. 그런 다음 단단한 목재로 밑을 받쳤다. 그런 식이라면 최소 석 달은 더 걸릴 판이었다. 그러나 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작업은 주야로 계속됐다. 그리고 40여 일 후, 현대조선소 간판이자 장비 가운데 가장 고가품(高價 ; 당시 26억 원)인 골리앗 크레인은 73년 6월 드디어 제 모습을 찾았다.

  그 무렵 선주에게 배를 인도하기로 한 날짜(74년 7월)는 이제 앞으로 불과 1년 반 남짓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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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바노스 선주가 주문한 ‘대서양 남작(男爵)’과 ‘대서양 남작부인(男爵夫人)이라는 뜻의 1호선 ‘애틀랜틱 배런’과 2호선 ‘애틀랜틱 배러니스’의 진수식은 74년 2월 15일 동시에 치러졌다. 당초에는 하루 전날을 잡았으나 강풍이 휘몰아치는 악천후로 늦춰졌다.
  신조선 마무리 작업인 의장공사(艤裝工事)를 제외하고 거의 완성 단계인 1호선은 2도크에서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조선소 기공식을 치르고 2년3개월이 흐른 때였고, 지난 해 건조에 착수하고(3월 20일) 꼭 11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야말로 무서운 추진이자 기록적인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그 배를 2도크에서 빼내어 건너 전하만 안벽으로 옮겨 접안(接岸)시키면 그것으로 진수 과정은 끝날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도크 앞바다는 준설(浚渫)도 완료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대로 배를 끌어내다가는 곧장 좌초가 되거나 선저가 긁힐 형편이었다. 진수를 하루 앞두고 밤새도록 해저를 파내고 나서야 겨우 길이 뚫렸다. 현대가 두 척 배의 진수를 서두른 것은 전년도 상반기부터 유조선 주문이 잇따라 한시라도 빨리 도크를 비워야 했기 때문이었다.
  진수식은 15일 새벽 1시, 야밤중에 시작되었다. 현대조선소가 출범하고 최초로 선을 보이는 만큼 정주영 회장도 현장에 나와 있었다. 아니 도크 바깥에서 진수 광경을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신조선의 조타실에 들어가 있었다. 정 회장이 신조선의 조타륜(操舵輪) 앞에 버티고 선 것은 배를 지휘할 어엿한 ‘도크 마스터(Dock Master)’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현장에는 몇 명의 도크 관계자가 있었으나 그들 모두 대형선을 몰아본 적이 없었다. (정식 선장은 나중 배가 인도된 뒤에 그리스인으로 임명될 터였다)
  드디어 수문이 열리고 도크 안으로 바닷물이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바닷물은 차츰차츰 수위를 높여갔으나 배는 꿈쩍도 않았다. 그 순간 정 회장은 과연 이 거대한 무쇠 덩어리가 뜨기나 할 것인가, 하는 뜬끔없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정주영 저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에서).
  바닷물이 도크의 반 너머를 채웠어도 배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정 회장 손바닥은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그 때서야 건설업과 조선업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깨우쳤다고 한다. 말 그대로 피를 말리는 순간순간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수위가 도크의 3분의 2쯤 차올랐을 순간, 거대한 선체가 움찔했다. 그렇게 잠시 멈칫거리는가 싶더니 곧 선수부가 벌떡 고개를 치켜들면서 요동치기 시작했다.
  “로프를 단단히 죄어라!”
  도크 마스터를 자청하고 나선 정 회장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반시간 쯤 후 드디어 거대한 선체가 물에 떴다. 길이 3백45m에 폭 52m, 높이 27m의 거대한 무쇠 덩어리가 당당하게 진수에 성공한 것이었다. 현장에 운집한 사원들 모두 손뼉을 치며 감격의 기쁨을 나누었다.
  1호선을 직접 지휘하여 무사히 안벽에 계류시킨 다음 정 회장은 부두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소리쳐 도크 관계자들을 면박했다고 한다.
  “못난 놈들 같으니라구! 모두 시골로 가 농사나 지어!”
  두 배의 명명식(命名式)은 그로부터 4개월 뒤인 6월 28일 거행되었다. 그 동안 1호선은 안벽에 계류한 채 주기관을 비롯한 모든 기계 부품에 대한 정밀검사와 시험 과정을 거쳤다.
  명명식을 앞두었을 때 1호선은 엔진을 갖추어 자력(自力)으로 기동 가능하였으나 2호선은 아직 스크루도 장착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2호선은 꽁무니의 스크루 샤프트 구멍을 용접으로 막는 임시방편으로 도크에서 빼낸 다음 식장인 전하만 1호 안벽으로 옮겨졌었다. 따라서 아직도 선체 외판에 페인팅 작업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다만 물 위에 뜬 부분에만 1차 도료(塗料)인 붉은색 녹 방지 페인트만 칠해져 있었다.
  오전 11시 정각, 텔레비전으로 전국에 생중계되는 가운데 명명식이 거행되었다.
  그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치하했다.
  “여기에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적 기념물이 웅자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현대조선 전 사원들의 일치된 단결과 노고의 결실입니다. 그리고 오늘 명명식은 한국 중화학공업의 발전을 기약하는 선언이자 도약하는 국력의 상징입니다.”
  뒤이어 이날의 하이라이트인 두 배에 대한 명명식이 있었다.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1호선을 ‘애틀랜틱 배런’이라 명명했고, 영국 쉘 석유회사 맥파젠 회장 영애(令愛)가 2호선을 ‘애틀랜틱 배러니스’라 이름 붙였다. 순간 우렁찬 뱃고동 소리와 함께 하늘로 수많은 풍선이 떠올랐고, 비둘기가 허공을 날았다.
  식이 끝난 다음 선주인 리바노스 회장도 감격을 피력했다.
  “내 생애를 통틀어 가장 잘 만들어진 멋진 배입니다.”
  그 날 신조선 선내를 두루 살펴본 다음 박 대통령은 ‘조선입국(造船立國)’이라는 낯선 글을 휘호(揮毫)로 남겼는데, 대리석에 각인되어 지금껏 본관 앞을 지키고 있는 그 뜻은 ‘조선 사업이야말로 나라를 일으키고 부흥시키는 기틀’이라는 함축된 의미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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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가 탄생하기까지의 가장 중요한 절차와 과정인 진수식과 명명식은 순조롭게 치렀지만, 그것으로 모든 게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의장공사를 포함한 모든 작업을 마무리한 다음 실제로 바다로 몰고 나가 시운전(試運轉)이라는 평가 단계에서 합격점을 받아야 비로소 선주에게 인도되는 것이었다. 영국 선급협회(船級協會)인 로이드(LLOYD)의 전문 감독관이 몇 명이나 검사에 참여하는 그 시운전에서 엔진을 풀가동하였을 순간의 최고속력과 비상조타 시의 회두반경(回頭半徑) 등의 수치가 비로소 밝혀지는데, 그 수치야말로 배의 기능과 능력을 증거하는 평생의 성능표(成能表)가 되는 것이었다.
  시운전은 명명식이 있고 3개월도 더 지난 10월 5일 울산 앞바다 동해상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날 시운전 결과 합격점을 받으면 열흘 후인 15일 약속한 대로 선주인 리바노스 회장에게 곧바로 인도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반갑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주기관을 비롯한 여러 기계가 적색등(赤色燈)을 깜박였다. 이상이 있다는 메시지였다. 다시 배를 안벽으로 끌고 와 종합적인 점검에 들어갔다. 특히 주기관이 말썽이었다. 엔진의 과열(過熱)을 제어하는 터빈 계통이 원활하지 않았다. 그 모두가 경험이나 전문성 부족에 기인한 것이었다. 특히 터빈 계통의 미비점을 보완하는 데만 한 달 이상 걸렸다.
  그리고 드디어 로이드 선급협회로부터 합격통지를 받은 것은 11월 27일의 일이었고, 다음날 새벽 2시 반경 한반도 영해를 벗어난 동해상에서 선주에게 넘겨졌다. 회고해 보면 1971년 10월 중순, 리바노스 선주로부터 건조 주문을 받고 꼬박 3개년 하고도 1개월 만에 이루어진 대역사(大役事)였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77년 11월, 정주영 회장은 ‘인간개발원’이 주최한 ‘경영자 특강’에서 시종 감격에 찬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 ……현대조선소가 남긴 발자취는 모두 세계기록으로 남을 만큼 기적적이었습니다. 도크를 짓는 것도, 또 배를 만드는 것도 모두 그랬습니다. 조선소 만드는 것부터 그랬습니다. 5만분의 1 축척의 전하만 지도 한 장과 거북선이 그려진 화폐 한 장, 그리고 영국 스코트리스고우 조선소로부터 얻어낸 선박설계도면 한 장을 들고 선주를 찾아 나선 순간부터 땅을 파기 시작하여 꼭 2년 3개월 만의 일이었습니다.……조선소를 조성하는 그 짧은 기간 동안 리바노스에게서 주문 받은 대형선 두 척을 동시 건조하는 가운데 한편에서는 드라이 도크를 파고 방파제를 쌓으며 안벽을 만들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14만 평 규모의 공장을 지으면서 3천 명의 근로자가 기거할 주택까지 지었습니다. 특히 최대 건조능력 70만톤을 자랑하는 국제 규모의 조선소를 2년 남짓에 만들어냈습니다. 그 1차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다시 확장공사를 병행하여 그 1년 후에는 건조능력 100만톤의 3호 도크를 합쳐 총 2백40만톤의 건조능력을 확보하면서,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 조선소를 만들어냈습니다.……나는 현대가 세계에서 유례없이 조선소를 빨리 지을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5천년 문화민족의 전통과 저력을 가진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측량할 수 없는 정신력의 또 다른 표현일 것입니다. 그 민족적 저력과 정신력을 우리 현대의 2,000여 근로자는 무기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1년 3백65일을 단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았습니다. 아니 밤낮이 따로 없었다고 해야 옳습니다. 새벽에 일어난 사람들은 세면장을 찾을 여유도 없이 여기 저기 웅덩이에 고인 빗물로 대강대강 얼굴을 문지른 다음 작업장으로 나가 자정까지 일했고, 숙소로 돌아와서는 구두끈도 풀지 못한 채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 같은 일과를 하루 이틀도 아니고, 1년 3백65일을 내내 그랬습니다. 저 역시 대부분을 울산 현장에서 보냈습니다.……

  당시 현대 소속 근로자라면 모두 아는 일이지만, 73년 11월 어느 비바람 치던 날 정 회장은 새벽잠을 깨자마자 직접 지프를 몰고 현장으로 가다가 큰 바위를 피하려다 핸들을 잡은 채 수심 12미터의 바다에 빠졌다. 지프는 곧장 가라앉으며 차내로 물이 밀쳐 들어오기 시작했다. 웬만한 사람이면 그 충격만으로 정신을 잃고 만다. 그런데 그는 가라앉는 차 안에서 숨을 참으며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상황에서 발버둥을 쳐봐야 아무 소용없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얼른 차에서 빠져나가 작업 현장으로 달려가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더라는 것이다.
  윈도우 앞 시야는 포말로 들끓었고, 차 안은 밀치고 들어온 바닷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차체가 해저에 닿았는데, 그 순간을 기다려 도어를 밀었으나 강한 수압 때문에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른 쪽 문에 등을 기댄 채 있는 힘을 다해 구둣발로 걷어차자 문짝이 떨어져 나가면서 물이 왈칵 밀치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곧 수면으로 떠오른 그는 가까운 안벽을 향해 물을 가르기 시작했다.……(나중 그는 초소 경비원에 의해 구조되었다. 경비원은 지프의 헤드라이트가 갑자기 사라진 것을 보고 웬일인가 하고 부근을 살피고 있었다고 한다)
  좀체 믿기지 않는 이야기다. 그래서 이 글을 쓰는 동안 필자는 추측해 본다. 만약 신이 있다면, 무엇보다도 한국 조선산업의 개척이 시급하고 요긴한 만큼, 지금 그 대역사(大役事)를 주도하는 정주영이라는 불세출의 영웅을 결코 외면해서 안 된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그것이다.
  정 회장이 말한 당시의 현대조선소 건설 비화야말로 곧 이 나라 조선산업의 역사이자 개척사가 아닌가.
  이야기는 다시 거슬러, 현대보다도 늦게 ‘진로’ 소유의 ‘우진조선’과 ‘대성중공업’을 인수하면서 종합중공업의 면모와 체제를 갖춘 ‘삼성조선’으로 화두를 돌리기로 하자. 이 이야기 역시 사료적 가치 면에서나 흥미 면에서 매우 유익할 것이라 필자는 확신한다. 왜냐하면 현대 정주영과 삼성 이병철 두 분의 성격이나 발상이 피차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 만큼, 조선 산업에서도 반드시 그 면모가 다르게 나타날 것으로 믿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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