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기회, 귀어 이야기 (22) 경남 창원시 김봉진 씨
새로운 기회, 귀어 이야기 (22) 경남 창원시 김봉진 씨
  • 장은희 기자
  • 승인 2017.02.13 14: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패셔니스타 청년
바닷물에 젖은 작업복을 입다

 

▲ 김봉진 씨
귀어 전 거주 지역 : 경남
귀어지 : 경남 창원시
귀어 전 직업 : 옷 가게 운영
귀어연도 : 2011년
나이 : 36세
귀어초기자본 : 귀어귀촌 창업자금 2억원 
               (양식장 0.2헥타르, 홍합 자동채취기 구입 등)
연간 순수익 : 약 7~8,000만원

패션의 거리에서 바다로 향하다
최신 유행을 선도하며 패셔니스타로 불리던 청년이 바닷물에 젖은 작업복을 입고 양식장에 서있다. 공간도 달라지고 분야도 달라졌고 그 모습은 더더욱 달라졌지만 또 다른 유행을 선도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바로 청년들의 귀어귀촌이다.

스물 네 살의 김봉진 씨는 어린 나이에 마산 번화가에 옷가게를 차렸다. 타고난 감각에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 대학재학 시절부터 김 씨는 패셔니스타로 통했다. 그에 못지 않게 멋쟁이로 유명하던 여자친구(현재 아내)와의 동업이었다.

패션감각 하나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던 김봉진 씨의 옷가게는 손님들로 성황을 이뤘다. 김씨가 동대문 등에서 옷을 고르고 물건을 받아 밤길을 달려오면 여자친구는 매장안에 보기 좋게 옷을 진영하고 한낮부터 늦은 밤까지 판매를 했다.

좁은 가게 안은 항상 북새통이었다. 하루에 100만원 안팎의 고액매출을 올리는 날들도 있었으니 그야말로 불티나게 팔리는 나날이었다. ‘돈을 쓸 시간이 없어서 모두 저금할 수 밖에 없었다’는 김 씨의 날이 이 시절의 영광이 어느정도였는지 짐작케한다.

또한 이때에 돈을 허투루 쓰지 않고 모아 둔 것이 다행이라고 말한다. 당시 가게가 잘되면서 점포를 더 늘릴 것인지 고민했지만 그 대신에 시내에 부동산에 투자했던 것이다. 스물 넷에 가게를 차리고 스물 여덟에 자기 집까지 마련한 김 씨는 같은 해에 여자친구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세상은 계속 변했다. 옷가게로 발품을 팔며 쇼핑을 하던 사람들이 더 이상 번화가로 나오지 않고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 쇼핑몰에서 클릭만으로 옷에서 화장품, 생활용품까지 모두 구매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김봉진 씨는 ‘물건 보는 눈은 있었지만 세상 보는 눈은 없었다’고 후회했지만 변화의 물결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거기에 이런 저런 악재가 겹쳐 가게 세를 내지 못할 지경에 이르고 그는 서른 하나, 가게의 문을 닫기로 결정한다.

▲ 귀어귀촌 창업자금으로 구입한 홍합 자동채취기로 작업 중인 김봉진 씨. 현재 양식장은 거의 김 씨 혼자 작업하고 있는데, 수하연을 올려 채취기에 돌리면 홍합이 낱개로 분리되고 세척과 수염(족사)제거까지 된다고 하니 그의 둘도 없는 파트너이다.

마을 어른들을 동료이자 스승으로
오랜시간 해오던 옷가게를 접고 김 씨가 향한 곳은 바다였다. 그의 전공인 건축과도 첫 직업이자 직장이었던 패션과도 관련이 없는 바다. 사실 이 전부터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처가식구들이 귀어귀촌을 권유해왔다. 그리고 아내와 고민 끝에 장인이 돌아가시면서 처가에서 손떼고 있던 홍합양식과 껍질을 까내고 홍합살만 추려내는 박신작업장을 이어가기로 한 것이다.

동대문 새벽 시장을 매일 같이 드나들던 부부는 2011년, 구산면 수정리 앞바다 ‘작업바지(뗏목)’으로 출근을 시작했다. 이전에 처가에서 어업을 해왔으나 부부가 마을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했다. 마을 어른들은 동료이자 스승이었으므로 먼저 다가가 머리를 숙였다.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하고 살갑게 굴었다. 그것은 젊은이로 당연한 자세라 여겼다.
 
처가에서 이어받은 채취선 겸용 어선, 작업바지 두척 등이 있었으나 일을 익히고 양식장을 일궈나가는 것은 오롯이 김봉진 씨가 해야하는 일이었다. 어업에 있어서 가장 좋은 스승은 마을의 선배 어업인들이었고 그들이 오랜시간 다져온 기술과 노하우를 배우기 위해서는 먼저 마을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가까워져야했다. 그래야만 하나라도 더 배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김봉진 씨가 바다에 자리를 잡고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홍합살을 발라내는 박신작업이었다. 작업바지 한 척은 바다 위 양식장 홍합채취장으로 사용하고 한 척은 해안박신작업장으로 사용했다.

김 씨가 마을 어업인들이 캐낸 홍합을 받아 뗏목 작업장에 가져오고 이웃 아주머니와 할머니들이 한 마리씩 손칼로 껍질을 벌려 살을 발라내는 작업이다. 박신작업장에서 그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커다란 통에 물을 끓이는 것이다. 이 물은 작업 중에 시린 손을 녹일 수 있는 보온수로 쓰인다. 불조절을 하고 나면 주변 마을을 돌면서 아주머니들을 차에 태워 작업장으로 향한다.

물론 천막 뗏목 안에는 미리 그날 작업할 홍합이 준비돼 있어야한다. 그날 작업한 만큼 무게를 재서 작업량에 따라 계산을 하는 만큼, 지체없이 작업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일을 함께하는 아주머니들에게 김봉진 씨는 잘생긴 젊은 사장으로 불린다. 할 수 있는 한 수고비를 더 챙겨주고 끼니마다 따뜻한 밥을 챙겨주려는 그의 마음이 통한 것이다.

▲ 해안박신작업장에서는 이웃 아주머니와 할머니들이 홍합을 한 마리씩 손칼로 껍질을 벌려 살을 발라내는 작업을 한다. 그날 그날 작업한 만큼 무게를 재서 작업량에 따라 계산이 되므로 아주머니들이 오기전에 작업할 홍합이 미리 준비돼 있어야 한다. 김봉진 씨는 손을 녹일 수 있는 물을 덥히고 따뜻한 밥을 챙긴다. 그런 그의 마음이 통해 함께 일하는 아주머니들에게 김 씨는 잘 생긴 젊은 사장으로 통한다.

바다를 향한 새로운 꿈의 시작
홍합양식에 대한 모든 것은 현장에서 직접 몸을 움직여가며 배웠다. 작업 후 아주머니들의 귀가시간 전까지가 그의 수업시간, 홍합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교실이 됐다. 홍합수확철이면 채취기로 자동 채취한 홍합을 운반하는 일부터 선박 바닥 정리까지 일을 도우며 틈이 나는대로 양식에 대해 물어보고 배워갔다.

▲ 지금의 양식장에서 매년 채취하는 홍합은 모두 3줄, 임대한 양식장에서 5줄로 총 8줄이며 평균생산량은 30kg들이 7~800망정도.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는 본격적인 홍합채취 시기로 이 때는 아내도 박신작업에 손을 보태야 할 정도로 바쁘다. 고된 작업들이 이어지는 나날이지만 도시생활과는 다른 즐거움이 있다는 김봉진 씨. 패션의 트렌드를 이끌던 청년이 어촌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길 기대해본다.
그렇게 몸으로 배운 홍합 양식. 귀어귀촌 창업지원금으로 마련한 그의 소유 홍합양식장 0.2헥타르는 아직 충분한 규모는 아니다. 김 씨는 구입하고자 하는 양식장을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새벽 바다를 오갈때마다 눈도장을 찍고 있는 양식장은 1헥타르에 4억원 규모로 자금이 마련되어도 판매하는 양식장이 있어야한다는 점에서 기약이 없는 것도 사실. 본 양성장과 종패장이 별도로 마련돼 있어야 수확이 끝난 어장에 충분한 공간을 줘가며 새로운 양식 수하연을 내릴 수 있다니 김 씨로서는 욕심이 날 수밖에 없다.

현재의 양식장은 거의 김봉진 씨가 혼자 작업을 하고 있다. 수하연을 올려 채취기에 돌리면 홍합이 낱개로 분리되고 세척과 수염(족사)까지 제거된다. 2헥타르 이상이 되어야 바다사업이라 할 만한 규모가 되며 다른 일손이 필요한 물량이 나온다고 한다. 1헥타르이면 10줄, 이 중 한 줄을 거두면 아주머니 일곱 명이 2주일 간 박신작업을 할 수 있는 물량이 나오는데 그 값이 400만원 정도라는 것.

지금의 양식장에서 매년 채취하는 홍합은 모두 3줄, 임대한 양식장에서 5줄로 총 8줄이며 평균생산량은 30kg들이 7~800망정도로 대략 1억 2,000만원 물량이다. 채취작업은 오후 12시까지 선주문을 받아 작업량을 결정한다.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는 본격적인 홍합채취 시기로 이 때는 아내도 박신작업에 손을 보태야 할 정도로 바쁘다.

고된 작업들이 이어지는 나날이지만 그래도 빠른 변화 속에 정신적으로 지쳤던 도시생활과는 다른 즐거움이 있다는 김봉진 씨. 패션의 트렌드를 이끌던 청년이 어촌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길 기대해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