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정신으로 지켜온 삼해상사 김광중 회장의 가업 잇기 제1부
장인정신으로 지켜온 삼해상사 김광중 회장의 가업 잇기 제1부
  • 김광중 삼해상사주식회사 회장
  • 승인 2008.12.26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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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 39년 삼해상사 김광중 회장의 자전적 수기

 

 한국 김 유통의 대부(代父) - 장인정신으로 지켜온
 삼해상사 김광중 회장의 가업 잇기
 - 제 1부 - 

 


우리나라 건해산물 업계의 대부로 알려져온 (주)삼해상사 김광중(金光重) 회장의 가업잇기 과정을 ‘있는 그대로’ 싣기로 한다. 성공한 수산기업인으로, 맛김 생산의 창시자로, 건해산물 유통업계의 대부로 정평이 나 있는 김 회장의 김(海苔) 사랑, 가업승계의 속사정을 생생하게 밝힌다. 김 수출 1천만불 시대를 최초로 열어젖힌 김의 대부(代父) 김광중! 대(代)를 이어온 삼해상사 명가김은 이제 대한민국을 넘고 일본을 넘어 전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연간 1조원의 김 시장에서 새로운 한류상품으로 떠오르고 있는 명가김이 세계 김 시장으로의 힘찬 도약을 시작했다.

 

 

한국 맛김의 역사를 창조한 김광중 회장
삼해상사의 대를 이은 김덕술 대표

 

 

 

 

 

 

 

  기업승계 10계명(企業承繼 十誡銘)

 정해년(丁亥年)새해가 밝았다. 지난해에는 각종 재해와 경제여건의 악화로 우리 수산계는 심각한 불황에 시달려 왔다. 원유가격의 폭등, 엔·달러환율의 급락, 서민경제의 극심한 침체 등으로 수산업의 존립기반마저 흔들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기업에 대한 상속증여세가 최고 50%까지 치솟아 가업(家業)으로 명맥을 유지해 왔던 견실한 수산회사마저 맥이 끊길 위기에 봉착해 있는 것이 우리 수산계와 중소기업계의 현실이다. 

 

                                                 1. 최소 5년 전부터 준비하라
                                                 2. 후계자에게 노하우를 전수하라
                                                 3. 주요 거래처 방문 때 후계자와 동행하라
                                                 4. 후계자를 도와주는 전문팀을 만들어라
                                                 5. CEO모임에 후계자가 가입하도록 하라
                                                 6. 절세(節稅) 방안을 모색하라
                                                 7. 상속재산 배분을 명확히 하라. 
                                                 8. 내부통제제도를 정비하라. 
                                                 9. 자신의 은퇴계획을 충실히 세워라. 
                                                10. 승계 뒤에는 한발 물러서라.
                                                       <기업승계 10계명>

 

 사훈(社訓)은 정도(正道)

 올해로 우리 회사가 창업한지 만 39년째가 되는 해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무려 4번이나 강산이 변하는 세월동안 회사를 지켜온 셈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기업체 수명이 길어야 30년이라는데, 이제 그 고비도 넘겼으니 이제는 어떻게 이를 수성하고 대를 이어서 발전시켜나가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깊이 사고하고 이에 대한 대책과 계획을 수립해 왔다. 이처럼 중요한 시점을 맞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 수산업계와 수산물 유통사업자에게 자그마한 도움이라도 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이 글을 남기고자 한다.

 우리 회사의 사훈은 「正道」이고 「公正去來」, 「流通報國」, 「福利增進」을 경영지표로 삼고 있다. 우리 회사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몇 가지 있다. 바로 직원 채용시 학력, 지연, 연령제한, 친인척 등을 철저하게 배제 한다는 것이 없는 것이다. 반면에 존재하는 것은 자녀들의 학비를 지원하고 이익이 발생하면 종업원에게 그 일부를 배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창업동기

 본인이 장사를 처음 시작한 것은 중학교 2학년(당시 나이 16세)으로 당시 6·25사변으로 학교는 휴학 중이었다. 그 당시 길거리에 노점을 차려놓고 양초, 성냥, 장갑, 담배, 엿 등을 팔기 시작한 것이 장사에 발길을 들여놓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당시 피난행렬이 지나가는 길목에서는 무엇이든지 불티나게 팔렸다. 아마도 사업에 대한 관심이 그 때부터 싹텄는지도 모르겠다. 학교는 농림학교 축산과를 거쳐 법과대학을 나와 고등고시를 보았으나 여러 차례 낙방의 고배를 마셔야 했고 울며 겨자 먹기로 시급한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해 취직을 생각 할 수밖에 없었다.

 좋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이후 입사한 회사는 소공동에 위치한 삼덕물산(주)으로 비료와 시멘트, 양모 등을 수입하고 농수산물을 수출하는 회사였다. 이곳에서 영업을 담당하게 되었다. 처음 시작하는 일이라 걱정이 앞서기도 했지만 그 계통에 조예가 깊은 훌륭한 사장님을 만난 덕택에 영업에 대한 기초부터 튼튼하게 배워 경험과 노하우를 쌓게 되었다. 당시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 나면서부터 뭐든 잘 하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배우는 것’이라는 각오로 열심히 노력했다.

 경리를 알기 위해 야간에 경리학원을 다녔으며 삼복더위에 기차 의자 밑에 누워서 출장을 다니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위험한 일, 힘든 일은 내가 도맡아서 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나는 보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회사의 일이지만 특별히 내 일처럼 최선을 다 한 이유는 나도 언젠가는 독립을 할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남보다 무엇이든 더 많이, 더 잘 알아야 한다는 강한 집념 때문이었다.

 특히, 창업을 결심하고 불철주야 열심히 노력 한 이유는 작고하신 아버님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님의 큰 가르침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고 名家김과 31년 전통의 삼해상사주식회사가 존재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느 날 결혼을 앞두고 아버님께 인사를 드리고자 찾아뵈었다가 “이제부터 우리 집안 살림은 네가 맡아서 하라”는 엄명을 받게 됐다. 8남매 중 차남이었지만 대학을 나온 자식이라고는 본인뿐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라는 대답을 뒤로하고 물러 나왔지만 앞이 캄캄했다. 하지만 아버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10년을 목표로 창업계획을 세우기 시작했고, 이를 위해 생활의 기본이 되는 의식주(衣食住)문제를 해결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결혼 1년 만에 무허가 집(대지 30평, 건평 18평)이지만 내 집을 마련했고 5년 만에 1,200평의 논도 구입했다. 봉급생활자가 집과 식생활이 해결되니 새로운 힘과 배짱이 생기는 것 같았다. 또 한편으로는 창업을 결심하는데 큰 힘이 되기도 했다.

 창업

 당시 한국 경제의 중심부는 서울의 소공동과 명동이었다. 다행히 회사가 소공동에 위치해 있어서 경제 전반에 걸쳐 많은 사람을 접하고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었다. 따라서 소공동 바닥에서 무역업이나 그에 버금가는 영업활동을 시작할 수도 있었으나 자금력도 부족하고 인맥도 없는 현 상황을 면밀히 분석한 끝에 농수산물도매시장에 뛰어들기로 했다. 시장에 뛰어든다는 것은 정말 힘들고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이라는 것을 훤히 알고 있었지만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패(百戰不敗)라는 말이 있듯이 나는 내 위치를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내릴 수 있는 결론이었다.

 이유는 우선 금력과 권력이 없었고, 주위에 특별한 인맥도 없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당시 도매 시장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이나 그곳 출신들은 하나같이 그 사업을 기피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당사자는 물론이고 자신들의 2세(二世)에게 그 사업만은 절대로 대물림시키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특히, 그 당시만 해도 농수산물시장에는 제대로 된 직장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모인 오합지졸과 같은 집단이었기 때문에 나와 같이 외부에서 국제적인 유통 감각과 예행연습을 경험하고 참여하는 사람에게는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던 것이다.

 그래도 현장경험과 사람 사이의 지면(知面)이 큰 몫을 차지하기 때문에 처음 시작 당시에는 현장경험이 있는 사람을 채용해서 영업을 맡기고 경리는 내가 맡아 관리하면서 점진적으로 시장의 현장 영업을 배우고 거래 선을 확보하며 신용을 쌓아 가는데 총력을 다 했다.

 동업해산

 동업으로 사업을 운영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임이 분명하다. 처음 시작할 때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서 많은 계획들을 세우지만 사업이 잘 되거나 잘못 될 때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인데 우리의 경우는 전자에 해당하는 경우였다. 사업이 한참 성장가도를 달리다보니 동업보다는 각자가 따로 하는 편이 더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시작한지 4년 만에 동업을 해산할 것을 제안해서 부득이 단독 직영체제로 사업을 이끌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인수한 지 3년 만에 전체시장에서 세금을 일등으로 많이 내게 되었고, 1975년에는 일본으로부터 반송된 수출용 김 70만속을 독점입찰 판매함으로써 전국 김 업계를 천하통일하게 되었다. 삼해상사의 이름이 유명하게 된 계기가 바로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업태의 변신(맛김개발, 판매, 광고 선전)

 처음 시작한 사업은 위탁 판매업이었다. 농수산물은 대부분 빠른 시간 안에 유통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생산자가 도매시장 위탁업자에게 위탁하여 판매하게 되는데, 위탁판매업은 5%내외의 수수료를 받는 일종의 복덕방과 같은 서비스업으로서 큰 자본이 필요하지 않은 사업이었다.

 다만 전문성과 신용이 필요할 뿐이었다. 부동산중계업은 단순한 중계업이기 때문에 법률상 권리의무가 매매 당사자 간에 생기지만, 위탁업은 모든 권리의무가 매매당사자간에는 발생하지 않고 위탁업자를 중심으로 매도인과 위탁업자, 그리고 매수인과 위탁업자 간에 발생한다하는 점이 다르다.

 따라서 거래선 쟁탈전을 위해서는 치열한 생존경쟁을 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므로 이를 탈피하기 위해서는 업태의 일부를 바꾸어 변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를 위한 1차 변신으로 자금을 마련해 비수기에 물량을 비축하기 시작했고 비축을 위해 화입공장과 창고를 구입했다. 2차로는 원료상태의 김을 판매하던 것을 가공해서 부가가치를 높여 팔면 소득이 배가 된다는 점에 착안하여 맛김개발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이를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88서울올림픽이었다. 88년도에 우리나라에서 역사적인 올림픽 행사가 개최되는데 맛김을 통해 이 특수경기에 편승해 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일식집 등에서 술안주로 일본식 조미김이 조금 선보였을 뿐이었고 가정에서는 재래식으로 직접 김을 사다가 소금과 기름을 발라 구워서 먹는 형편이었다. 또 여름철에는 습기로 인하여 김을 못 먹는 것으로 알고 있었고 주부들은 아이들 도시락 반찬 때문에 무척 힘들어 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러한 제반여건을 검토한 결과 충분히 시장성이 있다고 보고 공장을 구입하고 일본에서 기계와 기술을 도입, 생산을 시작했다. 그러나 소비자에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막연했다. 실제로 제품이 생산되었으나 팔리지 않고, 백화점이나 유통업체에서는 진열조차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공원들이 출근을 해도 할 일이 없어서 공장 유리창이나 닦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장으로서 일거리를 제공하지 못하는 것은 월급을 제때에 못주는 것 이상으로 고통스러웠다. 고심 끝에 공장 식구들을 모아놓고 회의도하면서 좋은 아이디어를 찾아  보았으나 그다지 신통한 방안이 나오지 않았다.

 최고책임자로서의 결단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왜 맛김이 우리나라에서는 잘 팔리지 않는지, 그 원인을 분석해 들어갔다. 그 결과 첫 번째 원인으로 일본식 맛김은 우리네 식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고, 둘째는 이 상품에 대한 홍보가 부족한 때문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일본식조미김 생산방법을 지양하고 순 한국식으로 기름과 소금을 발라 굽는 방법을 창안했다.

 그리고 이를 홍보하기 위하여 백화점과 대형 슈퍼가 가까운 초등학교 앞에 가서 무료 증정행사를 실시했다. 홍보활동을 시작한지 며칠 지나지 않아 거짓말처럼 본사 전화통이 불이 날 정도로 주문량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건어물 소매상들에게는 필수적인 구색상품으로 삼해맛김이 김 업계에서 유사 이래 최고의 히트상품으로 기록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렇게 김 소비가 증가되면서 생산자와 소비자에게 일손을 덜어주는 편익을 제공하게 되었고 기계 산업과 포장산업 육성에도 기여했을 뿐 아니라 김 가공 산업이라는 새로운 산업의 창출로 고용증대에도 크게 이바지하게 되었다. 1차 년도에 기계 1라인으로 시작하여 2차 년도에는 3라인, 3차 년도에는 제2공장을 구입하고 4개 라인을 증살함으로써 총 7개 라인으로까지 규모를 늘리게 되었다.

2007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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