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의 길 버리고 망자(亡者)의 길로 간 치자(治者)
군주의 길 버리고 망자(亡者)의 길로 간 치자(治者)
  • 이준후 시인/BCT 감사
  • 승인 2016.11.28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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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민동(富民洞)과 관중의 부민부국(富民富國)

부산에 부민동富民洞이라는 동네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동명洞名이 지역의 특징 등에서 유래하는데 특이하게도 이념성 이름입니다. 백성을 부유하게 한다는 富民은 부민부국富民富國에서 파생합니다. 이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초반에 활약한 관중管仲의 대표적인 정치사상입니다. 관중은 유명한 고사성어故事成語인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주인공입니다.

춘추전국시대는 역사상 가장 길었던 난세亂世였습니다. 그 기간이 500년을 넘었습니다. 천하를 두고 패권을 다투었으니 매일 전쟁이고 곳곳이 전쟁터였습니다. 강한 군사만이 강국의 조건이었습니다. 각 제후들은 군사를 모으고 강한 무기를 만드는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뛰어난 장수를 찾는데 또한 혈안이었습니다.

그때 관중이 富民을 역설했습니다. 관중은 제나라 환공을 도와 패업을 이룬 사람입니다. 관중은 부민의 개념을 富國의 중심에 두었습니다. 관중은 전쟁의 승패는 경제력에 의해 결정된다고 역설했습니다.

관중은 저서 <관자> ‘치국’편에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백성이 농사를 지으면 농토가 개간되고 농토가 개간되면 곡식이 많아지고, 곡식이 많아지면 나라가 부유해지고 나라가 부유하면 군사가 강해지고, 군사가 강해지면 전쟁에서 승리하고 전쟁에서 승리하면 영토가 넓어진다.”

부민을 통한 부국강병의 논리가 정리되어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부국강병을 유지하기 위해 민생의 안정에 힘쓰고 생산을 지속적으로 늘려야 한다는 요지입니다. 부민부국을 치국의 근본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는 철기가 농사와 무기에 이용되기 시작하는 시기였습니다. 철제 농기구의 사용으로 농업생산이 대폭 증가하였고 농산물 생산의 잉여로 상공업도 발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의 대부분의 사상가들은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규제하는 중농억상重農抑商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관중은 상공을 농업 못지않게 중시하는 농상병중農商竝重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상업의 중요성을 강조한 최초의 사상가입니다. 관중을 상가商家의 효시로 보는 근거입니다.

관중의 상업중시는 후일 여불위呂不韋같은 대상인을 낳게 하였고 통일 진秦나라를 탄생시킵니다. 진시황秦始皇의 천하통일은 실은 관중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관중의 부민사상은 당대의 제나라 환공을 패자의 위치로 올려놓았을 뿐만 아니라 후대의 법가法家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법가의 중심인물은 통일 전의 秦나라 상앙商鞅입니다. 진나라 통일의 초석을 놓은 인물이지요. 상앙은 농사지으며 싸우는 농전農戰을 통해 가장 미개未開했던 서쪽 진나라를 가장 부강한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당시 농경은 촌락공동체의 집단노동에 의한 공동생산이었습니다. 상앙은 이를 농민과 노비들의 개인노동으로 바꾸었습니다. 공동사회주의 생산방식에서 개인자본주의 생산방식으로 바꾼 셈입니다. 또 일정한 토지를 분배받은 뒤 경작지와 휴경지로 나누어 경작토록 했습니다. 농사와 길쌈을 결합한 일부일처의 가정이 생산의 기본단위가 되었습니다. 이를 호戶라 했습니다.

모든 남자는 농사를 짓고 여자는 길쌈을 해야 하는 법규를 제정했습니다. 이로 인해 생산의 비약적인 증대를 가져왔습니다. 이러한 조치가 가져온 효과는 엄청났습니다. 진나라 장정들은 전쟁이 나면 부귀에 참여할 기회가 생겼다고 서로 축하했습니다. 싸움에서 이기면 땅이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결사적으로 싸웠고 싸우면 이겼습니다. 덕분에 국고수입도 늘어났습니다. 상앙은 농한기를 이용해 백성들을 더욱더 훈련시켰고 모두가 용감한 전사가 되었습니다. 진나라가 최강의 병력을 보유하고 결국에 천하를 통일한 배경입니다.

富民은 공자孔子도 강조했던 논리입니다. 공자는 관중 사후死後 100년쯤에 태어났습니다. 춘추시대 말기쯤에 해당합니다. 공자는 55세에 천하유세를 시작합니다. 장장 13년에 걸치는 유세는 위나라부터 시작합니다. 위나라는 중원 한가운데 있는 나라로 상업이 매우 발달해 있었습니다. 거리의 인파를 보고 공자가 감탄합니다. “사람이 참 많구나.” 말을 몰던 제자가 묻습니다. “백성이 이리 많으면 어찌해야 합니까?” “우선 부유하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부유해지면 또 무엇을 해야 합니까?” “가르쳐야 한다.”

공자는 선부후교先富後敎를 주장했습니다.

부민 없이 부국은 없습니다.

부민부국, 그럼 그 이후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관중은 <관자> ‘목민’편에서 ‘예의염치禮義廉恥 문화국가’를 제시합니다. 부끄러움을 알고 예의를 지키는 문화를 가진 사회를 말합니다. 그래서 ‘의식衣食이 족足해야 예절禮節을 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공자도 선부후교를 말했습니다. 後敎, 무엇을 가르친다는 것일까요. ‘예의염치’를 말합니다. 부끄러움을 알고 예의를 지키는 군자, 공자가 바라는 인간상입니다. 군자가 치자治者되는 세상을 공자는 갈망했던 것입니다. 관중과 공자는 시대는 다르지만 같은 논리를 주장하고 세상에 적용하려고 했습니다. 관중은 성공했고 공자는 실패했습니다.

부민의 군주를 왕자王者라 합니다. 왕자는 만백성을 부유하게 만들고 망자亡者는 군주 개인의 창고를 부유하게 합니다. 제자백가의 한 사람인 순자의 말입니다.

지금 이 나라에 治者 뒤에 숨어서 개인의 창고를 부유하게 한 자들이 있습니다. 치자는 이를 예방하고 단죄하기는커녕 속아주고 도와주었습니다. 예의염치를 모르는 자도 문제이지만 王者의 길을 버리고 亡者의 길로 가버린 治者, 부끄러움의 끝에 서 있습니다.

무엇보다, 富民을 할 시기에 기민饑民의 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시국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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