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기회, 귀어 이야기 ⑲ 전남 신안군 모현학 씨
새로운 기회, 귀어 이야기 ⑲ 전남 신안군 모현학 씨
  • 장은희 기자
  • 승인 2016.11.01 16: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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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밤바다에서 되찾은 일상의 평안



▲ 전남 신안군 모현학 씨. <자료협조=한국어촌어항협회 귀어귀촌종합센터>

귀어 전 거주 지역 : 대구
귀어지 : 신안군 압해도
귀어 전 직업 : 건축업체 직원
귀어연도 : 2013년
나이 : 36세
귀어 초기자본 : 1,800만원 (0.4톤 어선, 연승기와 어구)
연간소득 : 월 평균 4~500만원



지친 몸과 마음으로 고향에 돌아오다

어린 나이부터 시작한 자영업. 압해도에서 자라 목포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군 제대를 하면서 평택에서 주류도매상을 직접 운영하기 시작한 모현학 씨는 어려움 속에서도 타지에서 10여년의 시간을 견뎌냈다.

처음으로 시작한 주류도매상은 주 거래처가 술집이라는 업종 특성상 주인이 자주 바뀌어 물건값을 떼이는 경우가 많을 수 밖에 없었다. 일이 이렇다보니 일과의 반나절을 돈을 받으러 찾아 다녀야하는 정도였고 돈과 사람에 치이며 지쳐만 갔다 그래도 10년을 참아냈다. 접어야 한다는 생각에도 미련이 남았던 것이다.

결혼은 새로운 전환점이었다. 결혼과 동시에 대구로 내려가 음식점을 차리고 부부가 단둘이 운영하며 밥도 팔고, 고기도 팔고, 술도 팔았지만 이 역시 녹록치 않았고 1년을 넘기고 문을 닫게 됐다.

다시 시작한 일은 대구 건축 관련 중소기업에서의 직장생활. 1년여동안 현장을 돌아다니며 일을 이어갔지만 오랜 외지생활에 고향에 대한 생각이 더 간절해질 뿐이었다.

모현학 씨의 고향은 전남 신안군 압해도. 그는 그곳에서 친구들과 칠게를 잡아 방파제 틈에 미끼로 넣고 낙지를 잡고, 바다와 갯벌을 누비며 어린시절을 보냈다.

아내도 외지생활에 지쳐있던 차, 모 씨가 먼저 고향 압해도로 귀향을 하고 자리를 잡은 후에 아내와 아이가 건너와 같이 지내기로 결정하게 됐다.

▲ 고향으로 귀어할 수 있다는 것은 가까운 곳에 많은 스승이 있다는 장점이 있다. 모현학 씨는 친지는 물론이고 직접 마을의 선수들을 찾아다니며 낙지 연승을 배웠다. <자료협조=한국어촌어항협회 귀어귀촌종합센터>

낙지연승어업으로 밤바다에 뛰어들다

귀어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없던 상황. 일단 여기저기 교육도 받아보고 부업 겸 농사를 지을까라는 생각도 해봤지만 작은 규모의 농사는 귀어귀촌의 답이 될 수 없었다.

결론은 낙지연승어업. 부모님 집에서 거주하니 생활비가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0.4톤 배에 엔진을 앉히고 연승양망기 설치, 미끼 마련까지 초기 비용으로 약 1,800만원이 소요됐다. 고향에서 귀어생활을 시작함으로써 귀어의 큰 장벽중 하나인 초기비용을 적게 투자하고 어업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낙지연승과 김양식을 주업으로 하고 싶었으나 주변 바다에 공간이 없었다. 수십년간 김양식을 해온 어르신들이 아직 김발 6~700대를 막아놓으니 하고싶어도 할수가 없다는 설명이다. 김양식 터가 생기면 귀어귀촌 정책자금으로 운영해 볼 계획이다.

고향에서 귀어를 시작하면서 또 한가지 좋은 점은 기술을 가르쳐 줄 선배들이 가까이에 있다는 것이다. 부친은 물론 낙지연승 30년 경력의 삼촌이 든든한 스승이 되어주었으며 모 씨 스스로도 선수라고 소문난 마을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일을 배웠다.

갯마을에서 어려서부터 갯일을 보고 도우며 자랐지만 낙지연승을 본격적으로 업으로 삼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압해도 조천마을 연승어업인들의 출어시간은 보통 오후 서너시, 바다에 나가 자리를 잡으면 일단 잠을 청한다. 조업이 새벽까지 이어지니 바다 위에서 쉬어야만 일정을 이어갈 수 있다. 새벽 여섯시나 되어 집에 들어와 눈을 붙일 수 있고 일어나서 연승 미끼 채우는 일 등 일거리가 있고 다시 오후에는 조업이 시작되니 바다 위에서 잠을 잘 수 밖에.

모현학 씨는 세시간정도의 꿀같은 시간을 보내고 일어나서는 저녁식사, 그리고 밤새 초승달 모양으로 진행방향을 만들며 배를 움직이며 깔아둔 연승채비를 끌어올리는 일의 반복이 바로 낙지 연승이라고 설명한다. 물때가 맞아 어획량이 괜찮을 때는 일출이 시작되기 전에 귀항하지만 해뜰 무렵까지 바다위에서 조업하는 일도 심심찮게 있다고 하니 만만하게 볼 일이 아니다.

▲ 어려서부터 낙지 잡는 것을 보고 자랐지만 생업으로 조업에 나서는 일은 쉽지 않다. 서너시에 바다를 떠나 일출 때가 되어서야 돌아와 얼마 자지 못하고 다시 미끼를 준비한다. 그럼에도 마음만은 편안하다는 모현학 씨이다. <자료협조=한국어촌어항협회 귀어귀촌종합센터>

수익보다 중요한 것은 편안해진 마음

쌀쌀한 가을 날씨에도 바다에 오르는 복장은 겨울 방한복 차림이다. 밤을 새고 뭍에서도 서늘한 새벽공기를 바닷바람 속에 배 위에서 견뎌내야하기 때문이다. 도시에서의 생활과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지만 모현학 씨는 그래도 고향으로 돌아와 벌이뿐만 아니라 마음이 편안해져 만족하고 있다고 말한다.

모현학 씨가 한달 평균 밤바다에 조업을 나가는 일수는 25일정도. 지난해에는 하루에 스무접에서 조금 빠지는 약 400마리의 낙지를 잡아 하룻밤에 160만원의 수익을 올리는 최고 기록을 세웠다. 모 씨는 연승에도 낙지가 잘잡히는 어장이 따로 있다는 어른들의 말이 맞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하루 최고 수익을 올리고 그가 가장 먼저 한 것이 낙지연승기를 앉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매일 밤 풍어를 기록할 수는 없다. 한겨울에는 날씨 탓에 평균 20일 정도밖에 연승을 놓을 수 있고 적게는 서너접 정도를 잡는 날도 있다. 그렇게 계산해도 하루 약 삼십만원정도의 수익. 도시에서는 사람과 돈에 치이는 나날들을 보내면서도 월 200만원을 벌기가 쉽지 않았다고 하니 적지 않은 돈이다.

모현학 씨는 어구 값, 기름값, 대출이자를 갚고도 뭍 생활이 부럽지 않게 지내고 있지만 무엇보다 좋은 점을 고향으로 돌아와서 마음이 편해진 것이라고 말한다. 아내가 멀미가 심해 부부조업이 어려운 점은 아쉬움. 모 씨 마을에는 부부가 함께 낙지연승을 하는 집들이 많은데 부부가 서로 다른 어장에 연승을 놓으면 남편이 적게 잡아도 아내가 많이 잡으면 되고, 아내가 적게 잡으면 남편이 많이 잡으면 되지 부담을 덜 수 있어 좋지 않겠냐는 설명이다.

과거에 낙지연승에 미끼로 많이 쓰던 칠게가 찾아보기 어려워졌다는 점도 안타까운 점이다. 어린시절의 압해도 갯벌에 흔하게 잡히던 칠게를 기억하는 모 씨이기에 더욱 그렇다.

최근에 압해도 낙시연승에 많이 쓰이는 미끼는 거의 중국 수입산 잡종 게. 종류와 크기가 다양하며 값이 싼데 비해 비교적 선도가 좋기 때문이다. 10년 전만 해도 갯벌에 철게를 쉽게 찾을 수 있었지만 요즘은 미끼로 쓸 수 있는 크기의 칠게를 잡기 어려워졌으니 마을으로 일원으로도 한 사람의 어업인으로도 모 씨는 안타까운 마음이다.

모현학 씨의 고향이자 이제는 새로운 삶을 꾸려가는 터전이 된 신안군 압해면 조천리 갯마을. 조금날 오전이면 마을은 아무도 없는 것 처럼 조용하다. 한 밤의 고된 조업을, 치열했던 밤바다를 증명하는 고요함. 그 고요함은 얼마가지 않아 다음 조업을 준비하는 분주한 손길로 깨진다. 그리고 바다에서 맞이하는 일출. 이제는 한사람의 낙지 연승인이 된 모현학 씨의 아침이 다만 단지 고됨으로 얼룩졌던 도시의 시간과 다른 것은 고향바다가 주는 위안이 아닐까. <자료협조=한국어촌어항협회 귀어귀촌종합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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