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양 개척사> 제2부 한국 조선사업 개척사 ⑥
<오대양 개척사> 제2부 한국 조선사업 개척사 ⑥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 승인 2010.07.06 10: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선장작가 천금성의 기획다큐멘터리

24

조선 선조대왕 25년이던 1592년 5월 7일, 거제도 장승포 앞바다 옥포만(玉浦灣)에는 왜선(倭船) 50여 척이 닻을 놓고 있었고, 왜해군(倭海軍)은 ‘훈도시(ふんどし)’ 바람으로 섬 마을을 돌아다니며 마음껏 노략질을 자행하고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맨 먼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제1군을 부산에 상륙시키면서 조선반도를 쑥대밭으로 만들기 시작한 이른바 임진왜란(壬辰倭亂) 발발일(4월 14일)로부터 아직 채 한 달이 안 된 시점이었다. 하지만 그 무렵 왜 선봉군은 이미 추풍령을 넘어서고 있었고, 이제 열흘 남짓이면 한양을 함락한 다음 그대로 북진을 감행, 미구에는 평양과 함경도까지도 완전 장악할 계제에 있었다.
다만, 비록 패하기는 하였지만 경상도 우수사이던 원균(元均)의 처절한 저항으로 파죽지세로 북진 중이던 육상군과는 달리, 왜 함선들은 부산포에서 거제도까지의 겨우 60여 마일 해역만 장악하고 있었다.
그 무렵 전라도 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의 조선함대가 왜선을 격파하기 위해 원균의 잔여 함선을 합류시킨 가운데 사천(泗川) 앞바다 당포(唐浦)에 이르러 있었는데, 그 숫자가 왜선을 능가하는 90여 척이나 되었다. 그러나 선종(船種) 별로 보면 주력선인 판옥선(板屋船)은 24척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소형 함선인 협선(挾船) 15척과 고기잡이배 정도인 포작선(捕作船) 46척이어서 그저 숫자놀이에 불과할 뿐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이순신 제독(提督)’의 화려한 탄생을 알리는 계기였으며, 그 해전이야말로 임진왜란을 통틀어 조선수군이 거둔 최초의 대해첩(大海捷)으로 기록되기에 이른다.
이순신 좌수사가 함선과 병력을 집결시킨 다음 노략질에 분주한 왜군을 치기 위해 거제도를 향해 여수 앞바다를 출발한 것은 5월 4일 일출 전이었고, 그 사흘 후인 7일 새벽에는 옥포만이 건너다보이는 거제도 남쪽 갈곶 앞바다에 당도해 있었다.
그 순간 왜선의 동태 파악을 위해 정찰을 나갔던 척후장(斥候將) 김완(金浣)에게서 보고가 왔다.
“좌수사(左水使) 님, 지금 왜군들은 노략질에 정신이 없습니다.”
드디어 이순신 좌수사는 공격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간파했다. 새벽이 오면서 노략질에 나선 왜군들이 배로 돌아오는 순간이 절호의 공격 시점이기 때문이었다.
곧 은밀히 기동을 시작한 조선 함선은 일자진(一字陣)으로 옥포만을 봉쇄하였고, 날이 밝으면서 해변으로 왜군의 그림자가 얼른거리기 시작하자 철갑선(鐵甲船)인 ‘거북선’을 앞세운 함선들은 일제히 화통(火筒)을 쏘아대며 공격을 감행하니 미처 닻도 건져 올리지 못한 왜군은 그저 도망치기에 바빴다.
그 전투에서 조선군은 순식간에 왜선 26척을 격침시켰고, 18척을 나포하면서 무려 4,000명의 전사자를 내는 큰 전과를 올렸으며, 도주하는 적선마저도 끝까지 추격하여 마산 앞바다에서 5척을, 그리고 통영 앞바다에서 11척을 격침시킴으로써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왜장이 지휘하던 왜선은 모두 경상도 남쪽 바다에서 수장(水葬)되는 비극적 제물(祭物)이 되고 말았다.
바로 그 해전(옥포)에 이어 사천·당포 해전(2차)과 한산섬 해전(3차) 및 부산 해전(4차)으로 이어지는 ‘임란 4대 해첩(海捷)’을 기록하면서 이순신 좌수사를 오늘날 역사에서 ‘불멸의 제독’으로 일컬어지게 된 것이었다.

25

“음, 바로 여기야.”
지금으로부터 418년 전, 50여 척의 왜 함선과 1만여 명의 해군을 전멸시킨 대해전의 승첩지(勝捷地)인 옥포만 답사를 끝낸 남궁련 사장의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바로 그 잔잔한 음성이야말로 울산의 현대조선소에 이어 세계 두 번째 규모가 될 ‘옥포조선소’ 태동(胎動)을 알리는 역사적 선언이었다.
하지만 ‘옥포’의 입지 선정은 정주영의 ‘현대’와는 달리 사업 주체자인 남궁련 사장보다도 오히려 한국을 조선산업의 중추적 국가로 도약시키려는 정부의 의지와 그 추진에 근거한다.
정부는 옥포조선소 사업 주체자로 해운공사 남궁 사장을 선정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모두 일임하지 않고 우선 조선소의 입지선정에서부터 그 규모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기본방향 설정을 거의 주도하고 있었던 때문이다. 그리하여 정부는 100만톤급 초대형 선박을 건조해낼 마땅한 조선소 부지라면 작은 간만의 차에 충분한 수심을 가져야 하고, 풍랑 등 자연의 영향을 적게 받으면서 최소한 50만 평 이상의 부지를 확보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하며, 거기에 각종 원부자재의 공급지가 가까운 거리에 있어야 한다고 못 박고 있었다.
남궁 사장은 정부가 요구하는 그 같은 까다로운 조건에 적합한 후보지를 찾아내기 위해 자신이 일찍이 견문한 각국의 유명 조선소를 참고로 적정 후보지를 찾아 남해안 일대를 샅샅이 훑었다. 그리고 드디어 1973년 3월, 충무공이 왜선을 격파한 역사적 승전장(勝戰場)인 옥포만을 찾아냈던 것이다.
남궁 사장의 보고를 받은 정부도 적극 동조했다. 그 광대한 옥포만의 아주리와 아양리 두 마을이야말로 정부가 바라던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고도 남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해 10월 11일,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관계 장관과 지역 주민들이 운집한 가운데 역사적 기공식이 거행되었다.
그러나 옥포조선소 기반을 조성하는 공사는 한 마디로 지형적인 환경에 일대 변모를 가하는 토목전쟁에 다름 아니었다. 우선 부지 한복판을 관통하는 아주천(鵝洲川) 개울을 외곽으로 옮기는 이설작업과 마을 뒤편에 솟아 있던 해발 70여 미터의 당등산(堂嶝山)을 송두리째 깎아내어 평지로 만드는 일이었다. 그 두 가지 토목공사를 하는 데만 꼬박 1년 반이 소요되었다. 때문에 기공식을 하고 2년이 되어서도 전체공정의 3% 정도만 진척되었을 뿐이다.
그나마도 다행인 것은 주민들의 적극적인 호응과 동참 의사였다. 요즈음 같으면 환경단체들이 나서서 조선소를 건립하면 오염 등으로 해양 생태계를 망친다느니 자연경관을 해친다느니 하면서 아주 결사적으로 반대 시위에 나설 터이지만, 당시 주민들은 일거리가 생겨나므로 생계에 보탬이 된다는 믿음에다 정부의 의욕적인 중화학공업 육성책에 적극 호응하여 스스로 어망을 거두고 대대로 살아온 집을 포기하는 등 그 환영의 정도가 오히려 놀라울 지경이었던 것이다.
당시 아주리와 아양리 두 마을에는 3백84세대에 2천50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는데, 남궁 사장이 모두 입주할 수 있는 대단위 주거단지를 조성하여 무상 제공하겠다고 선언하여 환영을 받았고, 실제로 장승포읍 능포리 옥수동 언덕배기 3만8000여 평 대지에다 3백85세대 분의 번듯한 현대식 가옥을 지어 분양하였다.
그와 함께 남궁 사장은 이주민 모두에게 농토와 가옥은 물론, 농작물 재배와 어업권 등 기왕의 생활권에다 심지어는 해조(海藻)를 따던 어민들에게는 그들의 터전인 해안 바위까지도 소유권을 인정하여 충분한 보상을 해준 때문에 더욱 절대적인 지지를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26

1973년 5월, 정부의 중화학공업 중흥계획에 의거한 옥포조선소의 출발은 자못 역동적이었다. 그 3개월 후인 8월, 미국의 ‘수출입은행’과 ‘모건 개런티사(MGT)’와는 각각 3,240만$와 5,040만$(합계 8,280만$)의 외자도입 인가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고, 거기에 내자(內資) 2,000만$를 더하면 모두 1억280만$의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으므로 자금 문제도 다 해결된 상황이었다. 따라서 남궁 사장은 그 텃밭을 일구어 미구 대한민국을 ‘조선대국(造船大國)’으로 우뚝 올라서게 하려는 원대한 꿈과 야망은 한 점 착오 없이 모두 달성되게 되어 있었다.
곧 꿈의 청사진이 만들어졌다. 거기에 기술용역을 맡은 영국의 ‘애플도어(APPLEDORE)’와 ‘T. F. 번스(NURNS)’로부터의 자문에 근거하여 옥포만을 다만 선박건조와 수리에만 만족할 게 아니라 내친 김에 다양한 산업 플랜트까지 복합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초대형 다목적 조선소를 건립하기로 확정했다. 그 내용을 보면, 시추선과 같은 해저탐사 장비 및 해상 구조물은 물론이고, 이미 세계적으로 환경 문제를 유발하기 시작한 시멘트 공장, 화학비료 공장, 암모니아 공장을 포함한 원자력발전소와 해상 호텔 등, 설령 예기치 않은 세계적 경제불황이 도래하더라도 능히 극복해낼 수 있는 멀티기능의 조선소를 만들기로 한 게 그것이다.
그 계획에 따라 당초 100만톤급으로 설계한 드라이 도크 규모도 150만톤으로 늘려 잡으면서 길이 1,100m, 너비 131m, 깊이 13.5m로 확대하였는데, 그렇게 되면 당초 목표로 한 연간 100만톤 건조능력의 아홉 배인 900만톤으로 증대되면서, 당시 세계제일이라던 일본의 ‘고야끼 도크(990m)’보다 100m 이상이나 길고, 울산의 현대(500m)보다도 두 배나 되는 초대형 도크가 생겨날 판이었다.
그 상황에서 애석하게도 1차 오일쇼크가 터져 나왔다. 그 여파는 모든 것을 송두리째 원점으로 돌렸다. 우선 약정까지 한 미국으로부터의 외화가 기한인 1976년 3월을 넘어서까지 도입되지 않았다.
그 시련은 곧 남궁 사장의 좌절과 굴욕으로 이어진다. 외자도입이 무산되자 조선공사는 부득이 사업 규모를 축소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1,100m이던 도크 길이를 그 절반인 530m로 축소시킨 데 이어 준공일자도 당초의 1975년 말에서 3년도 더 넘긴 78년 이후로 미룬 게 그것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기초공사는 착착 진행되고 있어서, 77년 10월 조선소 건설에 시용할 자재를 공급할 조립공장을 완공한 데 이어 직업훈련소와 기숙사 및 본관건물 등의 건축공사가 속속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까지 투입된 공사비는 공사 자체자금 150억 원에 정부(산업은행) 지원금 170억 원등 320억 원이었으며, 이제 막 시작한 핵심시설인 900톤급 골리앗 크레인을 비롯한 기타 공장들을 완성하려면 아직도 1,000억 원의 자금이 더 조달되어야 했다. 바로 그 대목에서 정부는 더 이상 지원이 어려워 옥포조선소 건립사업을 일단 중단하기로 결정하였고, 1978년 8월 31일 경제장관회의에서 김우중의 ‘대우그룹’에게 사업권 일체를 넘기기에 이른 것이었다.
세계 최대 조선소 건설에 인생의 모든 것을 걸었던 남궁 사장은 대우그룹으로 배턴이 넘겨지자 그 아쉬움을 이렇게 달랬다.

- 참으로 회한과 굴곡이 많았던 지난 5년여 성상이었습니다. 나는 한사코 옥포만을 세계 조선산업의 메카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여건이 너무 나빴습니다. 그 동안 설계도면을 뜯어 고치기도 몇 차례이며, 공기가 지연되기는 또 몇몇 해입니까? 그 모두가 무정한 오일쇼크와 그에 따른 세계 조선시장의 요동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누가 뭐래도 옥포 쉽야드는 신생 대한민국의 것이며, 반드시 열매를 맺어 조국의 미래 중공업 발전에 큰 기여를 하게 되리라 확신합니다.……

그 후 남궁 사장은 영도 봉래동의 ‘대한조선공사’로 돌아가 경영합리화를 위한 마지막 대업에 전력하면서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진다.


27

신생 ‘대우조선공업주식회사’는 1978년 9월 25일에 설립되었다. 그리고 그 사흘 후인 28일, 회사 측에서는 김우중 회장과 홍인기 사장, 관계에서는 조병규 경남도지사 등 관계자와 아직도 조선소 건립에 기대를 버리지 않은 주민 1,000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조촐한 창립기념식을 가졌고, 10월 1일 정부로부터 사업인가를 받아내면서 서울에다 본사를, 옥포에는 현장사무소를, 그리고 부산에다가는 출장소를 마련하는 등 관련 직제와 업무분장 규정도 확정했다.
그 동안 정부와 대우그룹은 옥포조선소를 당초 남궁 사장이 설정한 대로, 신조선 건조를 비롯한 수리조선, 플랜트 및 산업기계 등을 복합적으로 생산하는 ‘종합기계공업단지’로 만들기로 합의하였고, 이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정부(산업은행) 측과 대우그룹이 공동출자로 운영한다는 방침도 확인했다.
김우중의 대우조선은 처음부터 가히 역동적인 면모를 과시했다. 남궁 사장 시절 이미 제거작업이 끝난 당등산 대지를 포함한 80만 평과 당등산을 허물면서 나온 토사와 암석으로 새로이 축조한 해안 매립지 40만 평 등 총 120만 평의 광활한 부지 곳곳에는 힘찬 불도저의 캐터필러 소리와 각종 자재를 실어 나르는 덤프트럭으로 우렁찬 굉음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임직원 모두 유니폼 왼쪽 어깻죽지에다 ‘나는 옥포건설의 기수다’라는 구호를 쓴 반달형 헝겊을 꿰매고 있었는데,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김우중 회장이 창안한 그 하나만으로도 얼마든지 장밋빛 앞날을 예감할 수 있었다.
그 동안 대우조선소는 몇 차례 조직개편을 거치기는 하였으나, 다음 해인 79년 4월 옥포 건설본부가 정식 출범하면서 한창 건설 중인 훈련소 건물 앞에서 미래 세계 최고 조선소의 견인차 역할을 할 130여 명의 훈련생 입소식을 거행하였고, 당초 200여 명이던 직원 수도 연말에는 1,000여 명으로 증가해 있었다.
그런 중에도 남궁 사장 시절의 기능공들은 조선소 기반시설 마련에 여념이 없었는데, 5월에는 동력 공급원인 주변전실이, 6월에는 하역 크레인이, 7월에는 소조립공장이, 그리고 10월 초에는 하역안벽과 강재(鋼材) 하치장이 잇달아 준공되었다.
이듬해(1980년)는 더욱 경이로운 변모가 이루어졌다. 1973년의 1차에 이어, 79년의 2차 오일쇼크로 원유가가 3배나 치솟아 인플레의 가속화, 석유대금 지불에 따른 외화 보유액 감소, 국제수지 악화 등의 이른바 3중고(三重苦)에 시달리면서도(80년 한국은 -5.2%의 성장을 기록했다) 서울에 두고 있던 본사를 옥포 현장으로 이전하면서 3월에는 1도크에 500톤급 집 크레인(Jip Crane) 1기에다 50톤급 집 크레인을 설치하였으며, 8월에는 산소공장, 아세틸렌 공장, 시험측정실을 준공한 데 이어 10월에는 1도크 게이트(水門)에 이어 각급 공장이 잇달아 완공되었다.
그리고 다시 81년 중반께, 지금껏 8년을 끌어온 1도크 완공에 이어 그 위에 900톤 하중의 골리앗 크레인이 세워졌다.
1도크는 가히 대우조선소의 간판이자 핵심시설이었다. 전체 면적이 21,000평으로, 동대문 축구장의 7.5배나 되는 크기였으니 말이다.
게이트 역시 장관이었다. 그것은 기왕의 올리고 내리는 식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한 척의 독립적인 선박 형태를 띠고 있었으며, 거기에 175마력의 자체 추진기능까지 갖추고 있어서 얼마든지 혼자서 도크를 막거나 또 열 수 있었다. 거기에 시간당 600㎥의 바닷물을 빼낼 수 있는 두 대의 대형 펌프까지 설치하고 있었으니, 그 위용만으로 당장 제1도크로부터 산뜻하면서 육중한 새 진수선(進水船)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옥포만의 아슬아슬한 탄생 스토리는 잠시 접어두고, 1972년 3월 23일 울산 전하만에서 역사적 기공식을 가진 현대조선소로 되돌아가 세계의 조선업계가 이구동성으로 명명(命名)한 ‘정주영식 조선공법(造船工法)’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28

한국 역사상 최초가 되는 대규모 조선소 기공식을 가졌지만, 당시까지 현대조선소가 확보한 자산(資産)이라야 5,000여 명의 인력자원에다 한창 조성 중인 60만 평 부지가 전부였다. 거기에 현대건설이 사용하던 여남은 대의 불도저와 수십 대의 덤프트럭이 땅을 다지고 고르는 일에 투입되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배를 지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 다큐멘터리 전편을 통해 누누이 강조하여온 대로 조선산업은 엄청난 규모의 자금에다 시장과 기술(인력) 등 3박자를 갖추어야 하는 종합 기계공업이다. 그 가운데 어느 것 하나를 확보하려 해도 국내에서가 아닌 해외에서 모두 조달해야 한다는 까다로운 문제가 당시 한국경제가 갖고 있던 딜레마였다.
특히 가장 중요한 자금조달 면을 보면 당시 정주영 사장은 세계를 몇 바퀴나 돈 나머지 1971년에야 영국 버클레이은행을 간사로 하여 영국?서독?프랑스?스페인 등 4개국 차관단으로부터 4,500만 달러(한화 1백72억 원/당시 환율 399원)를 도입함으로써 비로소 조선소 기공식을 가질 수 있었다. 도입 조건은 3년 반 거치 후 7년에 걸쳐 연리 6∼7.5% 이율로 원리금을 분할, 상환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당초 최대 건조능력을 50만톤에서 70만톤으로 늘이는 바람에 1차공사 종료 때까지 2,920만 달러(1백17억 원)의 자금이 추가로 소요되었다. 당시 현대건설의 총자산인 1백35억 원의 2.14배, 자기자본금 41억 원의 7배에 달하는 엄청난 액수였다.
하지만 거기에 문제가 있었다. 조선소만 덩그렇게 만들었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일까. 아니었다. 무슨 방법으로든 당장이라도 얼마의 영업이익을 만들어내면서 외국으로부터 들여온 차관 원리금을 차질 없이 갚아나가는 일이 우선이었다. 바로 그 대목에서 ‘정주영 공법’이라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나온 것이었다.
다음은 작고(作故)한 정주영 회장(지금부터 직함이 사장에서 회장으로 격상된다)이 생전에 남긴 회고담으로, 1977년 11월 23일 ‘인간개발원’이 주최한 경영자 조찬회에서 한 특강 가운데 일부 내용이 된다.

- 어느 누구나 마찬가지지만, 조선사업을 하겠다면 먼저 조선소를 만들고, 그런 다음 배를 짓는 게 순서입니다. 그런데 우리 울산 현대조선소만 보더라도 완공하기까지 꼬박 3년이나 걸리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보면 조선소를 완공하자마자 빈털터리가 되기 십상이지요. 그 때부터 배를 만든다고 법석을 떨어봐야 무슨 소용 있습니까? 회사는 이미 엎어지고 난 다음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달리 생각했습니다. 조선소를 짓는 거나 배를 짓는 거나 다를 게 뭐가 있나요? 그렇다면 한쪽에서는 조선소를 짓고, 다른 곳에서는 필요한 것을 잘라다가 배를 만들면 되지 않나요? 그래서 나는 두 가지를 동시에 진행시키기로 한 것입니다. 가령 도크를 파내는 동안에는 리바노스로부터 수주한 1호선(‘애틀랜틱 배런(Atlantic Baron)’)은 야적장에서 부품이 조립되고 있었으며, 도크가 완성된 다음에야 비로소 도크로 끌어넣어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했단 말입니다.……

정 회장의 회고에 따르면, 자신이 조선업자가 아닌 건설 전문가여서 그 같은 ‘발상의 비약(飛躍)’이 가능했다는 해석인 것이었다.
또 그 발상을 가능케 한 것은 선체를 조립하는 방식이 종전(2차 세계대전 전)의 리벳 방식(대갈못 고정식)에서 진일보한 블록용접 시스템을 진일보한 덕분이었다. 그것도 수십만 톤의 대형선이어서 더욱 그랬다. 워낙 덩치가 큰 때문에 어느 한곳에서 진행하기 어렵기 때문에 부득이 현장 여러 곳에서 나누어 각 블록을 만든 다음 그것을 차례차례 도크에서 꿰맞추기를 하는 방식이기 때문이었다.
아직까지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정 회장의 두둑한 뱃심과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실로 현대조선소 역사(<現代重工業史>) 갈피 갈피에서 허다히 목격된다. 그 하나가 1호선 마지막 공정(工程) 때인 75년 6월의 경이로운 현장 목격담이다.
바로 그 무렵 1호선의 선수부(船首部) 블럭이 완성되어 이제 바야흐로 도크로 옮긴 다음 선체에다 접목시킬 차제였다. 그러나 아직도 도크가 완공되기 전이어서 골리앗 크레인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니 중량이 50톤이나 되는 블록을 도크 바닥으로 옮길 재주가 없었다. 결국 골리앗 크레인이 완공되기까지 3개월을 더 기다리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면 공기단축은커녕 약속한 기일을 지키기도 어렵게 되어 있었다.
그 때 정 회장이 나타났다.
“뭐? 석 달씩이나?”
거대하면서도 크레오파트라의 콧잔등처럼 생긴 선수부 블록을 들여다보며 한참을 궁리하던 정 회장이 드디어 지휘를 시작했다.
“트레일러를 이리 몰고 와.”
현장 책임자들은 그 때까지도 영문을 몰랐다.
“불도저도 서너 대 필요해!”
그리고는 소형 리프트 서너 대로 블록을 트레일러에 실은 다음 도크에 급조한 경사로로 따라 내려가도록 했다.
“자, 붙들어!”
곡예를 하는 트레일러 뒤에서 서너 대의 불도저가 물고 늘어지라는 말이었다. 참으로 기이한 장면이었고, 그 연출자가 곧 정 회장이었다. 덕분에 작업은 한 시간 만에 아무 탈 없이 끝났고, 아울러 공기도 3개월을 너끈히 단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두바이 오일 터미널에 설치한 수십 톤의 재킷을 울산에서 아라비아 해까지 바지선으로 옮긴 기발한 대역사의 창안자요, 서산 간척지 공사 때 대형 유조선에 물을 채워 가라앉힘으로써 물막이에 성공한 바로 그 아이디어의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정작 애틀랜틱 배런 호 건조가 시작된 것은 기공식을 가진 지 꼭 1년이 지나서였다.
당시 국내 조선소가 건조한 선박 중 가장 큰 배로는 영도 조선공사가 만든 17,000톤급 화물선 하나가 모두였다. 그러니 26만톤에 달하는 VLCC는 듣도 보도 못한 꿈속의 배였다. 생애 최초로 배를 만들면서도 정 회장은 품질 면에서 모든 부분이 세계최고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최초의 작품이 세계시장에서 조악하다는 평가를 받는다면 어느 누구가 관심인들 보이겠는가. 실제로 두어 해 전 대만이 인도한 배가 별로라는 악평을 받은 끝에 그만 국제무대에서 뒷전으로 밀려나는 수모를 당한 적도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현대는 애틀랜틱 배런 호에 장착될 모든 기자재를 세계 최고품으로만 골라 썼다. 증기터빈은 스웨덴의 ‘스탈라벨’ 제품을, 보일러는 영국제, 대형 추진기와 파이프 및 항해계기는 일본제였다. 강판(鋼板) 역시 일본으로부터 들여왔는데, 오늘날 세계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포항제철(浦項製鐵)이 당시까지 선박 건조에 사용되는 중후판(中厚板)과 고인장강(高引張鋼) 등을 생산하지 못한 때문이었다.
난생 처음의 대역사였으니 시행착오가 없을 수 없었다. 대체적인 손실은 자재발주에서 나왔다. 용도의 선후에 따랐으면 덜하였을 텐데, 한꺼번에 수만 가지 자재가 밀고 들어왔으니 트럭이 다닐 길조차 없는 형편이었다. 그 손해가 엄청났다. 엄청난 가격으로 들여온 자재가 몇 달씩이나 잠을 자고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정 회장의 ‘통 큰 배포’가 회자되기 시작한다. 그는 불가피한 시행착오에 대하여는 지극히도 관대했다. 어느 누구의 잘못으로 아무리 큰 손해를 입었더라도 잘 하려다 생겨난 일이라면 전혀 문책하지 않았다. 덕분에 현장 책임자들은 얼마든지 자신감을 갖고 현업에 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