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해녀’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등재되나
‘제주해녀’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등재되나
  • 박종면 기자
  • 승인 2016.08.01 17: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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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보전해야 할 독특한 자원 ‘제주해녀문화’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등재 여부 3개월 뒤 판가름

ⓒ박종면


스스로 수산자원 관리…70세도 젊은 나이
11월 인류 유산 인정 위해 제주도 더 적극 나서야

세계인이 찾는 신비의 섬 제주도는 돌, 바람과 여자가 많은 삼다(三多)의 섬이다. 그래서인지 상대적으로 수가 적은 남자보다 여성의 활동이 더 두드러져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제주도는 한 때 귀양지였다. 멀리 뭍에서 유배온 가장(남자)은 주로 책을 읽고 부인이 생계를 책임지는 일을 하다 보니 여성이 물질, 밭일, 집안일 등 가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제주 여성은 강인하게 묘사되거나 인식되곤 한다. 제주 여성이 강인하게 여겨지는 것은 해녀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잠녀(潛女), 잠수(潛嫂) 혹은 좀녜로도 불린 해녀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제주해녀의 존재는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 권19 고구려본기, 문자왕 13년(503년)에 처음으로 문자로 기록됐다. 또한, 1702년(숙종 28년) 제주목사 겸 병마수군절제사 이형상이 제주도 각 고을을 순시하며 거행했던 여러 행사 장면을 기록한 채색 화첩인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에는 물소중이(어깨끈이 한쪽만 달린 원피스 형태의 물옷)를 입고 물질하는 제주해녀의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전해진다.

조선 영조 때의 문신 신광수의 <석북집(石北集, 1765)> 중 ‘잠녀가(潛女歌)’에는 조선시대 해녀의 삶이 나타나 있다.

-상략- (탐라의 여자들이) 혼인해서도 물질을 하니 부모는 그 덕에 의식 걱정 없다고 자랑한다. -중략- 여자들 바닷가에 나와 갈구리 하나, 채롱 하나, 뒤웅박 하나로 벌거숭이에 조그만 잠방이를 입고 -중략- 물을 당기며 이리저리 타고 노니 오리가 물속에서 자맥질하는 듯 다만 뒤웅박만 물 위에 둥둥 떴구나. 갑자기 푸른 물 위로 솟아올라 허리에 맨 뒤웅박 끈을 급히 끌어올리고 한때 긴 휘파람으로 숨을 토해내니 그 소리 매우 생생하여 수궁까지 스며든다. 인생이 일을 하되 하필이면 잠녀이리. -하략- ‘잠녀가’ 중에서

하필이면 잠녀?

신광수는 그의 문집에서 해녀를 묘사하면서 “인생이 일을 하되 하필이면 잠녀이리”라며 안타까워했다. 그 이유는 그녀들의 ‘장비’ 때문이었을 것이라. 장비라 해봐야 문장에 나오는 것처럼 갈구리 하나, 채롱 하나, 뒤웅박 하나에 작은 잠방이(짧게 만든 홑바지), 즉 제대로 된 물옷도 입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잠수복(고무옷)이 보급된 것은 1970년대에 이르러서다. 그러나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그녀들이 물 속에서 숨을 참아야 했기 때문에 “하필이면 잠녀이리” 라며 혀를 찼을 것이다.

우주선을 타고 달나라에 가고, 로봇이 인간의 일을 대신하고, 인간의 사고를 넘어서는 인공지능 알파고가 개발된 최첨단 과학 혁명의 시대인 요즘에도 해녀들은 호흡을 도와주는 장치 하나 없이 나잠(裸潛)어업에 임한다. 다음은 구전으로 내려오는 <해녀노래>의 일부분이다.

이여싸나 이여싸나/ 우리 부모 날 낳을 적에/ 해도 달도 없을 적에/ 나를 낳아 놓았는가/ 어떤 사람 팔자 좋아/ 고대광실 높은 집에/ 긴 담뱃대 물고 앉아/ 사랑방에 잠을 자리/ 해녀 팔잔 무슨 팔자라/ 혼백상자(魂帛箱子) 등에 지고/ 푸른 물 속을 오락가락

원문은 제주 방언인데 부모에 대한 원망, 물질의 고단함과 설움이 함께 녹아있다. 그만큼 해녀의 삶이 힘들고 어려운 것임을 말하는 것이리라.

육체적으로 힘들 뿐만 아니라 물속에서 여러 번 겪게되는 수압의 변화로 청력장애를 겪는 경우도 적지 않다. 체력이 떨어지거나 심기능 장애가 일어나기 쉬운 고령자 중에는 물질 도중 심장마비로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다.

50년 만에 해녀 80% 감소

이런 역경에도 불구하고 제주해녀는 강인하다. 출산 직전까지도 물질을 나가는 게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출산 3일 만에 바다에 뛰어드는 경우도 있고, 어린 아기를 배의 돛대에 묶어두고 물질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 고단함 때문인지 해녀의 수는 급격히 줄고 있다. 1965년에 2만 3,000명에 달했던 현역 제주해녀의 수는 제주특별자치도 조사결과 2015년 말 현재 4,377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50년 만에 1/5 수준으로 급감한 것이다.

최근 수치와 비교해도 2013년도 4,507명에 비해 불과 2년 사이 130명이 줄었다.

이처럼 해녀가 크게 감소하는 것은 사망 등 자연감소와 함께 고령, 질병 등으로 더 이상 물질을 하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신규 해녀가 활발하게 보충되지 않는 이유가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농촌사회에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아 인구가 감소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나고 들고의 비율이 균형을 이뤄야 해녀문화가 유지 계승될 텐데 나기만 하고 들지 않는 현상이 심각하다는 얘기다.

일본해녀 ‘아마’와는 비교가 안 될 독특한 제주해녀문화의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등재 여부가 3개월 뒤 11월 28일부터 에티오피아에서 열리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보호 제11차 정부 간 위원회에서 결정된다. ⓒ박종면

반 이상이 70~90대

현역 제주해녀를 연령별로 보면 ▷30대 10명(0.23%) ▷40대 53명(1.21%) ▷50대 563명(12.56%) ▷60대 1,411명(32.24%) ▷70대 1,853명(42.33) ▷80대 이상 487명(12.13%)이다.

청·장년층이 차츰 줄어들고 70대 이상이 반 이상(53.46%) 을 훌쩍 넘겨 고령화가 심각하다. 최고령 해녀는 우도면 오봉어촌계 이봉숙(94) 할머니로 간간이 할망바당(얕은 물)에 들어가는 수준이다.

이처럼 고령화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다보니, 각종 안전사고도 계속 발생하고 있다. 1980년대만 해도 5~6년에 1명 정도 어업 중 사망 사고가 발생했는데, 최근 수 년 사이 연간 3~4명이 사고를 당하는 형편이다.

제주도 최연소 해녀는 제주시 추자면 예초어촌계 정소영 씨(31)다. 젊은 해녀가 귀하다는 것은 어촌 인구 감소와도 관련이 있지만 무엇보다 새로 진입하려는 젊은 여성이 적기 때문이다. 이는 산업사회로 넘어오면서 다양한 일자리가 만들어지고 뭍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 영향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원인은 젊은 여성들이 힘든 물질을 기피하기 때문이다.

과거 제주해녀들은 10세 전후로 물질을 시작해 할머니가 되어서도 그 작업을 계속했다. 하지만 이건 말 그대로 과거 이야기일 뿐이다. 현재는 10대는 물론이고 20대 해녀조차 전무한 실정이다. 그나마 빨리 진입하는 예는 30대 초반이다. 이마저도 많지 않다. 30대 제주해녀는 10명에 불과하다.

10대에 발을 들여놓았던 제주해녀 어머니들의 끈질긴 생명력은 욕심을 버리고 자신의 호흡을 따르는 데서 나온다 할 수 있다. 이들은 스쿠버(scuba)들과 달리 공기통을 메지 않고 숨을 참을 수 있을 동안만 물속에 들어가 빗창 등의 도구를 사용해 소라, 전복, 성게, 해삼, 해조류, 홍합, 문어, 우뭇가사리 등을 채취한 뒤 부상(浮上)하는 작업을 5시간가량 반복한다.

ⓒ박종면
자연에 순응하며

해녀들은 숨을 쉬기 위해 ‘테왁’에 의지한다. 테왁은 수면 위에서 잠시 쉬며 숨을 고르는 숨비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해주는 부표(浮標)다. 이들이 잠수복을 착용하고 들어가는 곳은 수심 10m 내외의 연안 어장이다. 해녀들이 공기통을 메지 않는 이유는 수산자원 관리 차원이라고 보면 된다. 자원 남획을 방지겠다는 의지가 다분히 반영된 것이다.

가령 공기통에 의지해 해저를 종횡무진하는 스킨스쿠버에게 수산물 채취를 허용한다고 가정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까? 수산자원 고갈은 불을 보듯 뻔한 얘기다. 물질(物質)에 욕심내지 않고 몸이 허락하는 만큼만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도록 해녀 스스로 통제하고 가꾸며 관리해 왔기에 지금까지 어장이 파괴되지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해녀들은 소라 산란기 때 소라 채취를 금하는 것을 비롯, 6~8월 여름철에는 스스로 물질을 쉰다. 수산자원을 보호하겠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전복 종묘를 키워 ‘바당밭’에 방류해 스스로 자원을 만들기도 한다.

수산자원을 고갈시키지 않고 관리하는 환경 친화적 어업 방식은 ‘자원관리의 실천’이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바다에서 만난 해녀들은 바다를 개척하면서도 자연 친화적으로 물질을 해왔다는 자부심을 갖는다.

해녀들은 추운 겨울에도 물질을 나간다. 하지만 그들의 작업은 한 달 평균 10~15일 정도에 머무른다. 나머지는 농업 혹은 집안일에 할애한다. 자연의 이치에 따라 자연이 허락하는 물때와 날씨에만 물질을 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해녀들은 공기통 없이 본인의 호흡량 만큼인 1~2분간 정도만 어업을 계속 하므로 그 채취량에는 한계가 있다.

지속 가능한 수산업 위해

제주시 우도면 비양도에서 만난 고순임 해녀는 “공기통을 메고 물속에 들어가면 좋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공기통은 안 돼. 수산물 다 없어져!”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이렇듯 아름다운 해녀문화가 계승 발전되어야 함은 당연한 일이지만 앞서 기술한대로 해녀의 수는 심각한 수준으로 줄고 있다. <나의 문화 유산답사기> 제주 편에서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해녀는 곧 없어질 직업이지만 그들이 몇 백 년 살아왔던 역사는 자산”이라고 했다. 사실 지금 추세대로라면 20년 이내에 우리나라에서 해녀를 보기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런 위기감으로 제주해녀문화를 보존하기 위한 움직임이 일고 있다. 지난해 12월 한국 전통문화를 지키기 위한 국민들의 관심으로 제주해녀는 해양수산부 국가중요 어업유산 1호로 지정됐다. 또 지난 2014년 3월 문화재청은 유네스코(UNESCO)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 등재를 신청했으며, 2015년 3월에는 추가로 문구수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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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공동체 문화 형성

제주해녀가 국가중요어업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었던 주된 이유는 맨몸으로 잠수해 해산물을 직업적으로 채취하면서 불턱(해녀들이 옷을 갈아입거나 쉬던 장소), 해신당(어업과 종사자들을 수호하는 신을 모시는 당), 잠수도구 등의 독특한 해녀문화를 발전시켜온 전통 생태적 어업시스템이라는 것이다.

또한 제주대학교 유철인 교수는 “제주해녀가 유산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은 제주해녀만의 독특한 공동체 문화를 형성 발전시켜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는 일본해녀(아마)와의 차별성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제주도는 제주해녀가 국가중요어업유산으로 지정됨에 따라 그동안 추진해오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에 탄력을 받게 됐다고 평가하면서 내년 유엔식량농업기구(FAO) 세계중요농업유산(GIAHS) 등재에도 도전할 뜻을 밝히고 있다.

제주해녀문화의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등재 여부는 오는 11월 28일~12월 2일 에티오피아에서 열리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보호 제11차 정부간 위원회에서 결정된다.

이와 관련, 제주지역에서는 지역 언론을 중심으로 ‘제주도가 제주해녀문화 유네스코등재에 너무 낙관한 나머지 국비 지원 등에 대한 신청도 없이 손놓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제주해녀박물관 강권용 학예사는 “현장실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해녀)보전정책을 인정하는 것이지 새롭게 보여줄 것은 없다”며 “그동안 (제주도가) 해왔던 해녀 무료진료, 어장보호정책, 해녀보존정책 등이 중요하지 색다른 건 없다”고 해명했다. 강 학예사는 “낙관은 하지 않지만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일본 해녀의 신청은 없는 상태임을 확인해주었다.

제주도 손놓고 있다?

무형문화유산 등재 효과는 그 무형문화의 가시성을 넓히는 것, 즉 무형문화가 소중한 가치가 있으며, 다음 세대에도 계승되도록 공동체가 노력해야 된다는 것을 알리는데 가장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해녀문화를 계승하기 위해 젊은 인재양성은 절대적 필수조건이다. 이 때문에 최근 제주도에는 한수풀해녀학교, 법환해녀학교 등 2개의 해녀학교가 설립됐다. 특히 지난해 5월 서귀포시와 법환어촌계가 설립한 법환해녀학교는 해녀양성과정 수료 후 어촌계에 배치돼 인턴과정을 거쳐 직업해녀로 정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지속 가능한 수산업을 위해 자연이 준 선물을 슬기롭게 이용해 온 제주해녀가 인류유산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을 지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제주해녀문화의 계승 발전에 대한 지속적 관심도 요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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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인터뷰> 대를 이어 물질하는 ‘젊은 해녀’ 박숙희 - 고려진 모녀

바다는 보물, 그리고 어머니

“쉬운 일이라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작년 4월에 정식으로 해녀가 된 구좌읍 평대리 하군(초보, 잠수능력에 따라 상·중·하군으로 나뉜다) 해녀 고려진(32) 씨의 말이다. 해녀 고령화로 그 수가 급격히 줄고 있는 시점에 혜성처럼 나타난 젊은 해녀 고려진 씨. 그녀는 어머니의 뒤를 이어 해녀가 되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해녀가 주는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 어머니 해녀 박숙희(63) 씨가 셋째 딸 고 씨에게 대를 이을 것을 권유했고 딸은 이내 수용했다. 고 씨는 제주대 체육학과를 나와 합기도 사범을 지낸 인재이자 두 아이의 엄마. 그가 하던 일을 접고 요즘 여성들이 외면하는 물질을 시작했다. 후회는 없단다. 힘든 일이기에 더 오기가 생기고 잘하고 싶다는 것. 그녀는 “어머니도, 어머니의 어머니도 다 했던 일이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어머니 박씨 또한 마찬가지. 어머니는 물질 도중 한 쪽 청력을 잃는 바람에 예전처럼 깊은 물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그런데도 물에 들어가면 힘이 난단다. 박 씨는 해녀문화 보존과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등재에 관심이 많다. 그녀는 구좌읍 해녀회장을 맡고 있으며 제주도 해녀문화 보존 및 전승위원으로도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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