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은 어떻게 제주에 유배 오게 되었을까
광해군은 어떻게 제주에 유배 오게 되었을까
  • 이준후/시인, 산업은행 제주지점장
  • 승인 2010.07.06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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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多, 三無의 고장 제주도에 '유배'를 테마로 한 길이 생긴다. 일명 ‘유배길’이다.
올레길 조성으로 톡톡하게 관광효과를 보고 있는 제주도는 '제주유배문화 스토리텔링사업단'을 구성하고 2012년까지 제주 유배길 코스를 개발하기로 했다. 특히 제주에 유배 온 광해군의 드라마틱한 생애를 콘텐츠로 개발하고 재조명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런데, 광해군은 어떻게 제주도에 유배를 오게 되었을까.

광해군은 1623년 3월 14일 새벽 황해도 평산 부사 이 귀와 경기도 장단 부사 이 서가 몰고 온 군사 1,400명에게 어이없는 기습을 당해 손 한 번 쓰지 못하고 폐위되었다. 인조반정이 그것이다.

反正軍이 창덕궁으로 밀려오자 광해군은 내시의 등에 업혀 창덕궁 북쪽 담을 넘어 탈출했다. 광해군은 창졸간에 의관 안국선의 집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곧 궁으로 끌려 와 인목대비가 퍼붓는 갖은 모욕과 저주를 당했다. 반정군은 그래도 廢母殺弟라는 광해군의 패륜을 반정의 명분으로 삼았기에 인조의 숙부인 광해군을 죽이지는 않았다. 대신 폐위 당한 광해군과 왕비, 그의 아들 왕세자 부부는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유배된 광해군에게 불행은 계속되었다. 1623년 5월 위리안치[圍籬安置]된 廢世子는 다리미와 큰 가위를 이용해서 울타리 밑에 땅굴을 파고 도주를 시도하다가 발각되었다. 땅굴을 통해 밖으로 나가는 것은 성공했는데 순찰 도는 포졸에게 발각된 것이다. 보고를 받은 인조는 한 달 뒤 사촌 동생인 폐세자에게 자진(自盡)을 명했다. 폐세자는 지시대로 목을 매고 자살했다.

폐세자빈 박씨의 운명 역시 가혹했다. 그녀는 폐세자가 탈출할 때 나무에 올라가 집밖의 동정을 살폈는데 집 밖으로 나간 폐세자가 몇 걸음 못가서 체포되는 장면을 보자 충격을 받고 나무에서 떨어져 기절했다. 그녀는 식음을 전폐하고 몸져누워 있다가 사흘 뒤 스스로 목을 매 이미 죽은 목숨이던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떴다.

아들 부부를 잃은 충격으로 광해군의 아내 廢妃 유씨 역시 그해 10월 세상을 하직했다.

아내와 자식 내외를 잃은 광해군에게는 출가외인일 수밖에 없는 딸을 빼놓고는 혈혈단신의 외로운 신세가 되었다. 광해군은 15년간의 재위기간보다 더 긴 19년간의 유배 세월을 굴욕과 외로움 속에서 살았다.

광해군은 10년의 세월을 강화도에서 살았다. 이괄의 난 때 한양으로 몰려온 이 괄의 군대를 피해 일시 충청도 태안으로 피신하기도 한 광해군은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강화도 옆 교동도로 이동 구금되었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불과 얼마 지나지 않은 1637년(인조 15) 5월, 교동도로 옮겨진 광해군은 다시 먼 제주도로 이배(移配)되었다. 강화도와 교동도에서 15년, 이제 먼 곳으로 가는 광해군에게 인조는 솜옷 한 벌을 보내 성의 표시를 했다고 한다.

1637년 6월 6일, 광해군의 유배선은 제주 어등포(구좌읍 행원리)로 입항하였다. 포구에서 하루를 보낸 광해는 제주로 들어와 제주 서성(西城)안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는데, “두문(杜門)하여 자물쇠로 봉한 후 도사(都事) 등 5인은 서울로 올라갔고 속오(束伍) 유진군(留鎭軍) 중에서 30명이 윤번으로 수직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광해군은 제주에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외부의 출입과는 엄격히 통제된 생활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광해군은 귀양살이 19년, 제주 땅에 유배된 지 4년 만인 1641년(인조 19) 7월 1일 예순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뜨는데, 그는 “내가 죽으면 어머니(공빈 김씨) 무덤 발치에 묻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공빈 김씨는 선조의 후궁으로 임해군과 광해군을 낳고 광해군이 아직 어렸을 때 25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광해군의 生母다.

조선왕조실록의 인조 19년 7월 10일자 기록은 광해군이 죽자 목사 이시방이 즉시 ‘열쇠를 부수고’ 문을 열고 들어가 예(禮)로 염빈(殮殯)하였다고 적고 있다. 소식을 들은 인조는 7일간의 소찬으로 조의를 표하고 예조참의를 보내 초상 치르는 것을 맡아보게 하였다. 그리고는 예조의 건의대로 ‘연산의 경우와 같이 왕자의 예로서, 그의 외손이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광해군의 묘는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에 있다. 그의 유언대로 생모 공빈 김씨의 묘와 함께.

기록은 광해군의 패륜과 失政을 그득하게 적고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명·청 교체기의 실리외교와 대동법 시행 등을 두고 개혁군주였다는 재조명이 散見된다.

어쨌든, 파란만장했던 광해군의 유배길이 관광문화상품으로 환생한다니 심사 적잖이 착잡하다. 그러나 역사야말로 가장 좋은 관광상품인 것을. 생각건대 관광상품의 經濟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역사문화라는 人文으로 나아가서 이참에 광해군에 대한 재평가를 始動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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