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의 결단은 의무이다
지도자의 결단은 의무이다
  • 이준후 시인/산업은행 부장
  • 승인 2015.12.31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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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후 시인/산업은행 부장
고종황제는 어떤 왕이었을까요. 우리는 고종을 어떤 국가지도자로 기억해야 할까요. 고종은 1873년 12월부터 1907년 7월까지 자그마치 43년 7개월 동안 왕위에 있었습니다. 그 시기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1905년 2월에 일본의 선공으로 시작된 러일전쟁은 그해 9월 미국의 중재로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본의 승리로 끝납니다. 러일전쟁이 끝나고 2개월 후,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 천황의 부름을 받고 황궁으로 들어가 특명과 함께 친서를 받습니다. 특명은 특사로서 조선, 대한제국에 가라는 것이었고 친서는 메이지 천황이 고종황제에게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이토가 조선에 온다는 소식은 이토가 일본을 출발도 하기 전에 고종의 귀에 들어왔습니다. 고종은 크게 긴장했습니다. 당시 이토는 일본의 대표적인 정치가이자 외교가였습니다. 청나라의 이홍장,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과 함께 ‘근세의 4걸’로 불리던 세계적인 인물이었습니다. 11월 8일 이토는 부산에 도착해 다음날 대한제국 황실이 마련한 궁정열차를 타고 경성에 도착했습니다. 고종황제는 이토를 극도로 환대했습니다. 이토의 방문목적이 너무 궁금했던 것입니다.

고종은 이때 이토를 만난 것이 두 번째였습니다. 거물 정치인 이토는 조선을 거의 오지 않았습니다. 고종이 러일전쟁 직전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서 엄정중립을 선언하자 일본은 무력을 동원해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체결합니다. 5개 중요 국사에 일본의 고문을 받는, 반보호국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당연히 조선 전역에서 거센 반발이 일어났고, 일본은 반발이 의병으로 발전할까 걱정했습니다. 의병은 일본이 가장 무서워하는 부분입니다. 그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이토가 특파대사로 왔던 것입니다. 러일전쟁 발발 직후인 1904년 3월의 일입니다.

접견에서 이토는 천황의 친서를 전달했습니다. 친서의 요지는 ‘두 제국간의 결합을 한층 공고히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토는 친서에 대한 답을 요구하면서 비공식 단독회담을 요청합니다. 단독회담은 10월 15일, 양측의 통역만 배석한 채 단둘이 만났습니다.

이토는 대화술에 능했습니다. 외교는 국력을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그의 대화협상력은 탁월했고 약자에게 냉혹했습니다.

이토는 이 자리에서 ‘두 제국간의 결합을 한층 공고하게 하는’ 구체적 방안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보호조약 초안’이었습니다. ‘초안’에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의 박탈뿐만 아니라 통감을 둔다는 내용까지 있었습니다. 통감이 설치되면 고종황제의 통치권은 사실상 통감에게 넘어가는 것입니다. 고종은 이 제안을 거절했을까요. 약자의 처지라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일본은 청나라와 싸워 이겼고 대국 러시아와도 전쟁에서 이겼습니다.

고종은 ‘일이 중대함에 속한다. 짐은 지금 스스로 이를 재결할 수 없다. 정부 신료에게 자순하고 일반 인민의 의향도 살필 필요가 있다’고 언급함으로써 우회적으로 거절의사를 보입니다. 이에 대해 이토는 말합니다. “폐하께서 정부 신료에게 자순함은 당연하오시며 외신도 결코 오늘로 결재하심을 청하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일반 인민의 의향을 살핀다는 것은 기괴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귀국은 헌법 정치도 아니며 만기 모두 다 폐하의 친재로 결정하는 소위 군주전제국이 아닙니까?”라고 따지는 추궁이 날카롭습니다. 날카롭다기 보다는 죄인 추궁하듯이 무섭습니다. 일국의 황제에게 말입니다.

오후 3시에 시작된 이날의 고종과 이토의 단독회담은 오후 7시가 되어서야 끝났습니다. 3일 후인 18일 새벽, 결국 외무대신 박제순과 일본공사 하야시 사이에 을사조약이 조인됐습니다.

고종황제와 메이지천황은 둘 다 1852년생으로 동갑입니다. 고종이 한 달 정도 먼저 태어났으므로 굳이 따지면 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존의 자리에 오른 것도 고종이 먼저였습니다. 고종은 12살이던 1863년 왕위에 올랐고 메이지는 16살이던 1867년 천황 자리에 올랐습니다. 혼인도 고종이 먼저였습니다. 고종황제는 15살에 명성황후 민씨와 혼인했고 메이지 천황은 17살에 결혼했습니다. 즉위 초반 고종황제는 개인적인 경륜이나 조건에서 전혀 뒤지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4년 먼저 왕위에 오르고 2년 먼저 혼인했으므로 국정이나 세상물정에 먼저 눈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종이 즉위한 1863년 당시 조선왕조는 일본보다 그렇게 국력이 약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 고종황제가 어쩌다가 40여년 후에 천황의 특사에게 협박까지 당하는 처지가 되었을까요. 이토와 단독회담은 일단 격이 맞지 않습니다. 그리고 말이 회담이지 일방적인 협박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고종은 급변하는 당시의 시대상황을 소홀히 했습니다. 19세기 중반의 동북아시아는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로 재편되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고종은 늦게나마 변화의 흐름을 인식하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려고 노력했지만 결단력이 부족했습니다. 지도력의 한계를 보였고 결단의 기회에는 왕권보호 쪽으로 물러서기 일쑤였습니다. 성찰의 부족과 결단력의 한계는 약육강식의 시대에 결국 망국의 길로 연결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도자의 통찰과 결단력 부족은 이렇게 엄청난 결과를 초래합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도 만만치 않습니다. 국운 재상승의 길로 갈 것인가 아니면 장기 침체와 하락의 길로 갈 것인가, 지도자의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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