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갈치 풀 스토리
자갈치 풀 스토리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 승인 2008.12.24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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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수산업의 현주소 ⑧

자갈치 아지매의 억척스러움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이거 모두 오천 원에 가져 가이소, 오천 원!”
고무장화에 고무앞치마, 그리고 고무장갑에 팔굽에는 토시로 중무장한 ‘자갈치 아지매’가 두 마리 꽁치를 더 집어 든다. 좌판대 위에는 바닥이 봉곳한 플라스틱 받침대로 꽁치가 수북이 담겨 있는데, 사겠다면 덤으로 두 마리를 더 얹어 주겠다는 뜻이다.
아지매 눈길은 시종 좌판대 앞에 멈추어 선 청바지 차림의 중년 가정주부에게 쏠려 있다. 해거름이 지난 어둑어둑한 때다.
“마, 떨이나 하고 고만 집에 갈래요.”
그러니 제발 귀가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것이다. 아지매의 적극적이면서도 애절한 공세에 그만 발목이 잡힌 가정주부가 마지못해 눈으로 마릿수를 헤아려 본다. 모두 열두 마리다.
“이거 싱싱하요?”
가정주부가 새삼 묻는다.
“아이고, 그라몬예!”
그러면서 아지매는 받침대 위의 꽁치 두세 마리 뒤집어 보이고는 손바닥으로 떠 올린 다라이의 물을 찰박찰박 끼얹기까지 한다. 그러자 꽁치가 조금 윤기를 더한다.
“떠러미라캄서! 마, 삼천 원에 주이소.”
가정주부의 어이없는 후려치기다.
“아이구! 그기 말이나 되능교?”
아지매가 가볍게 쏜다. 그것도 하나의 전략이다. 아지매의 그 한 마디로 가정주부는 더 이상 가격 제시를 못 한다. 대신 덤이나 더 얻자는 마음으로 바뀐다.
“그라몬 두어 마리 더 얹어 주소.”
“아이고야……”
말은 그렇지만, 아지매의 손은 벌써 좌판대 밑으로 향하고 있다. 다시 올라온 장갑 낀 손에는 꽁치 한 마리가 더 쥐어져 있다. 그러니까 처음의 열두 마리를 합쳐 모두 열다섯 마리가 된다.

 

 

 자갈치 아지매의 하루벌이는?

 가정주부의 손에는 벌써 돈이 쥐어져 있었다. 그것을 본 아지매는 더 묻지 않고 익숙한 솜씨로 생물을 다듬기 시작한다. 양쪽으로 뒤집어가며 목덜미에 반 깊이로 칼자국을 낸 다음 가만히 머리 부분을 잡아당기자 내장까지 따라 나온다. 아지매가 대강 헹구어 낸 고기 토막을 비닐봉지에 담고는 설설 소금을 뿌린 다음 봉지 채 서너 번 들썩거린다. 소금을 골고루 묻히기 위해서다.

 만 원짜리 한 장을 받은 아지매는 앞치마 주머니에서 반으로 접은 돈뭉치 가운데 오천 원짜리 한 장을 뽑아내어 가정주부에게 건넨다. 그것으로 거래는 끝났다. 오후 서너 시 무렵, 아지매는 상자당 1만5,000 원씩을 주고 모두 세 상자의 냉동꽁치를 받아 왔다. 한 상자에 1백 마리씩 들었으니, 마리당 150원이 원가다. 아지매는 꽁꽁 얼어붙은 냉동물을 정성껏 떼어낸 다음, 처음에는 열 마리씩 나누어 5,000 원씩에 팔았다. 원가와 비교하면, 그 새 값이 세 배로 껑충 뛰었다. 해거름까지는 웬만해서 덤을 주지 않았다. 그래도 손님들은 불만이 없었다.

 그러나 파장을 앞둔 저녁 6시가 넘어서면 문제는 달라진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생물을 남겨서는 안 된다. 끝까지 처분 못한 몇 마리는 부득불 소금을 칠 수밖에 없다. 이미 생선으로는 상품가치를 잃고 있기 때문이다.

 꽁치 봉지를 든 가정주부가 저만치로 사라지자, 아지매는 오늘의 이문(利文)을 어림쳐 본다. 꽁치 판매액만 12만 원 가량 된다. 점심은 배달로 콩국수를 시켜 먹었으니, 그걸 빼고도 7만 원은 너끈히 남았다. 아지매는 꽁치 말고도 고등어며 가자미 등도 함께 취급하고 있다.

 김순남(金順南) 씨. 올해로 쉰여덟. 그러니 영판 환갑을 앞둔 아지매다. 거제도 출신인 아지매는 지금까지 이곳 자갈치에서 꼭 30년을 생의 터전으로 삼아 왔다. 그 동안 먹고 산 것은 별도로 치더라도, 셋이나 되는 자식들을 모두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장하다. 자갈치에는 주순남 아지매 같은 억척여성이 300명은 된다.

 

 도떼기시장과 쌍벽 이룬 자갈치시장

 자갈치 터는 원래 용미산(龍尾山)이라 일컬어지던, 지금 롯데월드 신축공사가 한창인 구 시청 앞 영도다리께서부터 보수천 하구까지 주먹만큼 한 자갈이 깔려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갈처(處)’라 불렀는데, 투박한 경상도 말투가 ‘처’를 ‘치’로 바뀌었다는 게 어느 향토연구가의 주장이다. 또 일설(一說)로는 농어과 바닷물고기인 ‘자갈치’란 생선이 이곳에서 활어(活魚)로 많이 취급되었다고 해서 그걸 딴 것이라고도 하나 설득력은 별로 없다.

 그 자갈밭이 일제시대 때인 1920년대 중반에 ‘남빈시장’으로 개설되면서 시장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8·15 이후 연안 고기잡이배들이 꼬여들면서 수산물 집산지로 가닥을 잡았고, 시장 기능도 겸하게 되었다.

 이후 6·25전쟁으로 피난민들이 몰려들면서 신창동(新昌洞)의 ‘도떼기시장(국제시장)’과 더불어 자갈치시장은 극도의 번영을 구가했다. 두 시장은 여명(黎明)을 앞질러 이미 문을 열고 있었다. 두 시장은 서민 생활의 근거지였다. 특히 거의 알몸으로 피난을 오다시피 한 이북 출신들은 생존을 위한 막가는 심경으로 시장을 누빈 끝에 그로부터 수삼 년도 안 되어 수복(收復)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 새 터를 잡을 만큼 돈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그만큼 자갈치시장은 이웃 도떼기시장과 더불어 우리나라 상업의 현대화를 선도한 서민들의 굳건한 삶의 터전이었다.

 특히 자갈치시장보다 조금 늦게, 8·15와 더불어 귀환동포(歸還同胞)들의 생활 근거지가 된 도떼기시장은 처음에는 ‘자유시장’이라는 이름으로 태동하였는데(1948년), 자갈치와 마찬가지로 피난민이 몰려들면서 규모가 커지자 법인체인 ‘국제시장번영회’ 설립을 계기로 오늘 보는 것처럼 점포수가 1천5백여 개를 훨씬 넘는 재래(在來) 스타일의 ‘국제시장’으로 발전했다.

 반면 자갈치시장 인근은 휴전 성립 이후까지 휑한 공터였다. 특히 지금의 농협 남포동점이 위치한 일대는 미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곳 PX로부터 밀반출(密搬出)된 C-레이션을 비롯한 온갖 잡화물(雜貨物)이 흘러들면서 지금까지도 유효한 ‘깡통시장’이 별도의 권역(圈域)을 형성하였는데, 그렇게 따지고 보면 어언 반세기 이상의 연륜을 과시하고 있는 셈이다.

 그 무렵 어느 날, 미군부대 마당으로 한 대의 헬리콥터가 착륙하였는데, 하늘을 나는 비행기만 올려다보았지 가까이에서는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던지라, 사방에서 몰려든 구경꾼들로 남포동(南浦洞) 일대는 순식간에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사람들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돈 다발을 주우려는 듯이 새카맣게 몰려들었는데, 어느 몸이 불편한 할머니 하나도 ‘아이구나! 살아생전에 비행기를 다 구경하다니!’- 그러면서 군중 사이를 비집으며 겁도 없이 내달리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렇게 운집한 근대(近代) 이전의 한국인들을 보고, 미군 조종사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추측컨대, 아마도 틀림없이, 오늘날 우리가 저 아프리카 콩고 내륙의 원주민을 바라보는 그런 요상한 눈빛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보면 우리가 지금 떵떵거리며 사는 것도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님이 분명하다.

 전쟁으로 초토화가 된 열악한 환경에서 미국이 보내준 밀가루가 없었다면 당시의 뭇 주민들이 지금의 북한처럼 상당수가 기아(飢餓)로 실려 가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은 반미(反美)를 외치고 있다. ‘좌파(左派)’라는 식의 점잖은 표현으로써가 아니라, 틀림없이 ‘골수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서민 삶에 윤기를 보탠 자갈치시장 

 자갈치시장은 처음에는 거개가 판자로 지은 가건물이었다. 그러다가 5·16혁명 직후, 군사정부가 가건물을 몽땅 철거한 다음, 그곳에다 말쑥한 3층짜리 건물을 지어 ‘자갈치 어패류처리장’이라는 이름의 종합어시장으로 탈바꿈시켰다(1974년).

 자갈치시장은 영도대교로부터 해안을 따라 서구 쪽 충무동(忠武洞)에 이르기까지 거의 1km 거리로 길게 늘어서 있는데, 건어물 코너를 시작으로 고래고기식당→어패류조합 건물→재래식 자갈치 본통→멍게·해삼·조개류 코너→곰장어 코너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시장을 뒤지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종류의 수산물도 틀림없이 찾아낼 수 있다.

 그러다가 1985년 화재가 발생하여 한꺼번에 200여 개의 점포가 소실되는 큰 참화를 입고 말았는데, 재차 그곳에다 현대식 건물을 지어 이번에는 ‘부산 어패류처리장’으로 이름을 바꾸어 재개장했다. 그러나 하루도 빠짐없이 연중 내내 물기로 질퍽거리는 시장 속성상 건물의 붕괴 우려와 함께 지반이 침하되기 시작하자 2003년 제2의 도약을 위한 신축공사를 강행하여 두 해 전인 2006년 8월 준공을 본 게 ‘갈매기 형상’을 한 지금의 ‘새자갈치시장’이다.

 항도 부산의 이미지인 ‘갈매기’의 준공과 함께 이제는 길을 막다시피 한 시장통도 말끔히 정비되었고, 더욱이 바다를 면한 곳에다가는 각종 편의시설을 갖춘 길이 1백40미터에 폭 16미터의 제법 널찍한 친수공간(親水空間)도 곧 완공될 예정이어서, 시원한 바닷바람을 쐬며 한 점 싱싱한 회(膾)를 음미하는 것도 별미 중의 별미일 게 분명하다.

 게다가 지난 달 9일에는 그 동안 단절되어 있던 서구 송도와 영도를 연결하는 전장(全長) 1.9km에 왕복4차선 규모의 ‘남항대교’가 개통되었다. 자갈치 아지매들은 남항 내항(內港)을 가로질러 수평선과 나란히 달리고 있는 웅장한 남항대교를 바라보면서, 새 명물이 하나 더 추가된 만큼 덕분에 사람들의 발길이 더욱 분주해지면서 시장경기도 조금 기지개를 켰으면 하고 있다. 그만큼 자갈치시장은 항도 부산의 역사적 상징물이자, 서민생활에 윤택을 주는 귀중한 터전임에 틀림없다.

 오래 전부터 자갈치시장은 해운대와 용두산공원과 함께 부산을 찾는 외국 관광객들이 반드시 둘러보는 투어코스 가운데 하나로 이름났다. 그리하여 ‘신동아시장’ 앞 버스길로는 연중 하루도 빠짐없이 줄지어선 관광버스들의 행렬로 줄을 잇고 있는데, 그 버스야말로 값싸고 싱싱한 자갈치의 ‘사시미’를 맛보기 위해 입국한 일본인 관광객들을 싣고 온 차량 무리인 것이다.

 “조기요, 조기! 한 무데기에 만 원만 주소!”
이번에는 어종을 바꾼 김순남 아지매의 쉰 목소리가 어둑어둑해진 시장통을 맴돌고 있다.
- 남은 조기는 말릴 수밖에 없네.
천천히 좌판대를 정리하는 아지매 손길이 바쁘다.
시간은 어느새 저녁 7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자갈치시장의 한 페이지 역사가 넘겨지고 있는 것이다. 

2008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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