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무는 을미년, 溫故而知新의 마음으로
저무는 을미년, 溫故而知新의 마음으로
  • 김동욱 본지 회장
  • 승인 2015.12.01 15: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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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욱 본지 회장
3대 부자도 없고 3대 거지도 없는 세상

통영에는 3대 부자도 없고 3대 거지도 없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재산을 지키기도 힘들지만 또한 가난하다고 늘 가난하게 살란 법이 없는 곳이 바로 통영이었다. 누구든지 부지런히 바다에 나가 그물을 던지면 돈을 모았고, 돈을 모아 어장아비가 되면 지체 높은 양반이 부럽지 않았다. 돈이면 뭐든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주의 문화가 그 어느 곳보다 먼저 유입된 곳이 통영이었다. 또한 돈의 위력에 봉건시대의 유물인 신분사회가 가장 먼저 붕괴된 지방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말하면 지방도시 가운데 근대화가 다른 지역에 비해 빨리 이뤄진 것인데,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건 풍부한 수산자원 덕분이었다. 전통적으로 이 지역에서 많이 잡히는 어류는 멸치, 고등어, 장어, 전갱이, 삼치 등 이다. 그리고 굴, 멍게도 많이 난다. 통영의 경제는 각종 경제지표와는 상관 없이, 어획량과 해산물의 출하정도에 따라 크게 달라졌다.

양지 바른 곳에 파릇파릇 상추나 쑥갓이 고개를 내미는 이른 봄이면 통영에서 뱃길로 1시간 거리인 욕지도에는 거대한 파시가 섰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이 섬은 대형선망어업의 전진기지로 봄부터 초여름까지 한번씩 선망어선들이 들어오면 섬 전체가 불야성을 이뤘다. 술집들이 많이 밀집되어 있는 자부포(자부랑께)는 그야말로 어장아비들이 뿌리는 돈으로 몇 달 내내 흥청거렸다. 날마다 싱싱한 생선회에 술을 돌리는 잔치가 줄을 이었다. 덕분에 통영은 경남 전체에서 술 소비량이 가장 많은 곳이었다. 그렇게 경제적으로 윤택하고 여유 있었으며 먹을거리가 풍성했던 통영이 어려워지기 시작한 건 90년대 중반부터였다. 그 1차적 원인은 심각한 기후변화로 해양생태계에 큰 변화가 생긴 데 있었다. 어종이 대폭 줄어든 것이다.

두번째 원인은 무분별한 남획이었다. 불법어업인 고데구리(소형선망)로 새끼 고기까지 잡아버렸다. 그 바람에 종자번식은 물론 기본 생태계까지 위협을 받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98년 11월에는 실무자들의 무지와 늑장대응으로 인해 한국에 절대적으로 불리한 신 한일어업협정까지 체결되었다.

신 한·일 어업회담의 실패담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 협정을 위해 일본은 1977년 미국과 소련이 200해리 어업보존수역을 시행할 때부터 철저히 연구하고 준비해왔다. 우선 일본은 같은 해인 77년 5월 배타적 경제수역(EEZ)을 선포했다. 배타적 경제수역이란 자국의 연안으로부터 200해리에 이르는 수역을 말한다.

그리고 이 수역안의 자원에 대해 독점적으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배타적 관할권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일본이 경제수역을 선포한 것은 한국 어선들이 자기네 앞바다에 드나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후 한·일간에는 어업분쟁이 잦았다. 일본이 홋가이도(북해도)주변 수역에서 조업하는 한국어선들에 규제조치를 취하기 시작하면서 생긴 다툼이었다. 결국 양국은 1965년에 체결한 한·일 어업협정을 파기하고 국제 환경에 걸맞는 새 한·일 어업협정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양국이 각자 배타적 관할권을 행사하는 어업전관수역을 설정하고 서로 겹치는 부분에 대해서는 공동조업을 할 수 있는 중간수역으로 정하자는 게 이 협정의 골자였다. 그런데 협상 과정에서 한국은 굉장히 불리한 조건에 사인하고 말았다.

이는 협상에 참여한 한국 대표들이 어업에 무지한 탓도 있었다. 회담 관계자들이 ‘쌍끌이’ ‘외끌이’라는 용어조차 구분하지 못했으니 무엇을 양보하고 주장해야 할지 분간할 수 없었던 것이다. DJP 공조시대에 나눠먹기식 인사로 해양분야에 문외한인 충청도 출신의 김모씨를 해양수산부장관에 임명한 데서 비롯된 해프닝이었다. 그는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일본으로 출국하면서 “나까가와쇼이치 일본농림수산상과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사이기 때문에 협상은 낙관적”이라고 자신해 각 언론의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다. 국제사회에 국익이 걸려있는 중요한 사안을 놓고 누구보다 냉정하고 이성적이어야 할 정부책임자가 상대국 책임자와의 사적인 관계를 드러내며 자랑했으니 어찌 조롱거리가 되지않았겠는가. 게다가 협상결과라는 게 어업조건을 이전보다 유리한 쪽으로 개선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한국어장만 대폭 줄여놓는 꼴이 되고 말았다. 어민들로서는 화나고 분통할 일이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쿠릴열도 주변 수역에 대한 조업권을 상실할 처지에 놓인 것이었다. 이곳 수역은 꽁치 회유로여서 많은 어획고를 올려왔다. 국내 총소비량의 3분의 1을 이곳 어장에서 잡은 꽁치로 감당했다. 그런데 그 사이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모종의 협상이 있었던지 일본은 한국의 남쿠릴 조업 금지에 관한 일-러 합의 내용을 일본언론에 일제히 보도했다.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라면 이중외교도 서슴지 않는 러시아의 정치 성향을 백분 이용한 것이다. 그럼에도 해양수산부와 외교통상부는 아무 대책 없이 넋놓고 있었다. 일본 언론에 보도된 내용에 대해서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는 궁색한 변명만 늘어놓았다.

그리고 2001년 일본과 러시아가 외무차관급 협의를 갖고 한국의 꽁치 조업을 인정하지 않기로 기본 방침을 정하자 뒤늦게 대책 마련에 나섰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쿠릴열도 수역에서의 조업 불능으로 어민들은 연간 3천톤, 돈으로 환산하면 약1백70억원이 넘는 어획손실을 보게 되었다는 분석까지 나왔다.

바다목장화 - 기르는 어업에 길이 있다.

권현망어업과 장어통발어업은 도산 업체가 속출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다 적조까지 덮쳐 고성과 통영경제는 꽁꽁 얼어붙었다. IMF때보다 더 어려운 상황이다.

전국 어디보다 여유있고 윤택했던 통영과 같은 수산도시들이 지금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갈 길을 잃은 폐선과 적조로 배를 드러낸 물고기떼가 흔한 풍경이 된 바다, 죽어가는 바다를 다시 살려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어촌경제가 회생되기 어렵다. 바다를 살리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선행되어야 할 일은 ‘잡는 어업’에서 ‘기르는 어업’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내가 오래 전부터 바다목장화 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추진해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다는 더 이상 그물만 던지면 재화를 안겨주는 곳이 아니다. 그물을 던지기 전에 농지 정리하듯 포화 상태인 양식어장과 어선들을 정리하고, 바다 생태계를 건강하게 살려 놓아야 한다. 이미 90년대 초반부터 기획했고, 중반 이후 추진해오고 있는 그 일에 내 의정활동의 상당부분을 할애했었다. 그래서 아름다운 통영, 동양의 나폴리라는 명성에 걸맞는 지역으로 거듭나게 하고 싶었다. 그것이 내 마지막 소원이자 꿈이었고, 지금도 그 꿈이 이루어지고 있어서 보람을 느끼게 된다.

역사는 돌고 돈다. 과거를 알아야 새로운 지혜를 얻게되는 법이다. 온고지신의 마음으로 을미년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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