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기회, 귀어 이야기 ⑤ 전남 해남군 장승용 씨
새로운 기회, 귀어 이야기 ⑤ 전남 해남군 장승용 씨
  • 장은희 기자
  • 승인 2015.09.02 16: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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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양식의 매력에 빠진 어불도의 맥가이버


▲ 전남 해남군 장승용 씨

귀어 전 거주지역 : 전남 광양
귀어지 : 전남 해남
귀어 전 직업 : 광양제철소 일용직
귀어 결심동기 : 힘든 외지생활, 가업 승계
귀어연도 : 2010년
나이 : 41세
귀어 초기자금 : 없음
연간수익 : 9,000만원~1억 1,000만원
사업규모 : (보유어선) 7.93톤
                  (양식장) 김 양식 1줄 당 110m×90줄



지친 도시생활을 등 뒤로 고향을 찾다

도시생활은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하게만 보이지만 이면은 그렇지 않다. 많은 이들이 일에, 사람에 치이며 쌓이는 스트레스 속에 마음도 몸도 지쳐간다. 장승용 씨 역시 그랬다.

해남 땅 끝 어불도에서 청소년 시기를 보낸 장승용 씨는 20살 때부터 도시에서 생활했다. 서울 영등포에서 작은아버지가 운영하는 주점에서 일을 하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는 곧 결혼을 했지만 이혼의 아픔을 경험해야 했고, 주점도 문을 닫아 새로운 일을 찾아야 했다.

일자리를 찾던 장 씨는 경남 거제의 조선소가 돈벌이가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2008년 조선소에 취업했다. 그는 조선소에 일하며 기술을 배울 생각이었으나, 고된 일에 그만두는 사람이 많아 신참에게는 기술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성실함을 보였고 이를 인정 받아 기술을 배워 목포에 있는 조선소로 자리를 옮겼다.

이 또한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광양제철소의 자회사에 1,000만원만 주면 돈 잘버는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에 속아 사기를 당했다”고 말했다. 이 후 장 씨는 일용직을 전전하게 된다.

장 씨는 이때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심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일용직이었지만 로비를 많이 해야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며 월급의 몇 퍼센트를 꼬박꼬박 로비에 써야하는 것도 부담이었지만, 성격이 활달한 편임에도 계속해서 윗사람들에게 아부하는 생활이 반복되자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는 쉽게 일을 그만 둘 수 없었다. 베트남 여성과 새로운 가정을 꾸려 2009년 첫 아이까지 생긴 그에게는 가장이라는 막중한 책임감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그는 입원을 해야할 정도로 심각한 위궤양을 앓을 정도로 도시생활에 몸도 마음도 녹초가 돼있었다.

이때 장 씨의 아버지가 고향에서 같이 살자는 반가운 제안을 해온다. 그는 도시생활을 선망했던 아내의 반대 속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고 2010년 가족들과 고향인 어불도로 내려오게 된다.


청년회장으로 동분서주, 어촌계 일원으로 인정받아

아버지가 오랜기간 운영해온 양식장을 나눠받아 시작한 그의 귀어생활은 다른 이들보다 순탄해보이지만, 그속에는 스스로 청년회장을 맡아 어불도의 맥가이버로 활약한 노력이 숨어있었다.

장승용 씨는 “아무래도 아버지가 계셔서 초기 정착에 이점이 있었던 점은 맞지만, 주거지를 마련하고, 나의 이름으로 양식장을 꾸려 넓혀가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했다”며 “귀어 후 2년간은 어려움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아버지가 있는 고향이었지만, 20살 이후 도시에서만 지낸 그는 어촌계의 일원이 되기 위해 동네의 궂을 일을 도맡아 어불도를 동분서주했다. 조선소에서 일하며 배운 용접기술이 큰 도움이 됐다. 장 씨는 마을의 배수리를 무료로 해주는 등 마을 일을 도와가며 주민들의 호감을 얻었고 귀어 3년 만에 자신의 이름으로 양식장을 운영하게 됐다.

장 씨는 “양식장을 꾸리기 위한 수면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어촌계에 가입해야하는데, 5년 거주, 배와 자가 보유 등 동네마다 자치법이 다르다”며 “이곳은 보통 어촌계 가입에 5~10년이 걸리는데 고생 끝에 3년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일원이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12살때부터 아버지와 배를 타고 나가 일을 도와온 장승용 씨에게 김 양식은 삶의 일부였다. 장 씨는 “당시에는 식구들끼리 일하고 벌어서 먹고 살았으니, 학교다닐 때는 주말마다 도와드리고 공익근무 중에도 휴가때도 언제나 아버지 일을 도와왔다”며 “아버지의 노하우는 계속 보고 체득해 온 것이라 빨리 습득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귀어 3년차에 접어들며 생산량도 소득도 늘었으나 장씨는 이에 머무르지 않았다. 오랫동안 양식을 해온 어업인들이 안전한 길만을 택한다면 장 씨는 새로운 길을 찾기로 한 것이다. 그는 “국립수산과학원, 전남해양수산과학원에서 새로운 종자를 받아 기르며 품종 개량에 노력을 기울이면서, 이제는 독자적인 양식 노하우를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하고 있다”며 “집집마다 각자의 양식 노하우가 있는데 한정된 양식장 안에서 각자의 기술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전했다.

그는 ‘앞으로 10년’이라는 생각으로 김 양식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10년만 하고 그만 두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노력을 하고 성과를 얻고자 하는 것”이라는 것이 김 양식인으로 자리 잡은 장승용 씨의 포부이다.

▲ 아버지가 오랜기간 운영해온 양식장을 나눠받아 시작한 그의 귀어생활은 다른 이들보다 순탄해보이지만, 그속에는 스스로 청년회장을 맡아 어불도의 맥가이버로 활약한 노력이 숨어있었다.

귀어, 결심했다면 바로 뛰어들어라

장승용 씨는 “며칠 전에 한 친구가 ‘스트레스 받아 죽겠다’며 하소연을 하는데 ‘왜 스트레스를 받느냐’고 되물은 적이 있다”며 “귀어한 이후 도시에서 겪던 스트레소에서 해방되고 몸도 건강해져 30대와 힘겨루기를 해도지지 않을 정도”라고 어촌생활의 즐거움을 전했다.

장 씨와 15살 차이가 나는 아내는 도시에서 편하게 지내고 싶다고 귀어를 반대했으나 지금은 어촌에서만 누릴수 있는 여유로운 생활에 만족감을 느끼고 있다. 그는 “도시에 있을 때는 벌이도 나쁘지 않았고, 씀씀이가 헤프지 않았는데 항상 부족함을 느꼈다”며 “어촌에서는 경제적으로도 생활측면에서도 더 누릴 것이 많다”고 말했다.

“귀어 초반에는 선크림을 바르고 햇빛을 가리고 다니다가 작년부터는 편하게 햇빛을 받으며 다니는데 피부가 그을리기는 했지만 되려 건강해진 기분”이라고 말하는 그에게는 바다생활의 여유로움이 보였다.

6살과 5살. 어린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그는 동네에 초등학교는 있지만 어린이집이 없어 아침 8시에 배를 타고 나가 선착장에서 기다리던 어린이집 차에 아이를 태워보내고, 다시 4시에 데리고 온다. 어촌 생활의 애로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정도는 감수 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의 마을에는 전체 75가구에 장 씨보다 나이가 적은 인원이 40여명에 달할 정도로 귀어인구가 많은 편이나, 대부분 가업을 이어가는 형태이다. 장 씨는 “김 양식의 특성상 양식을 하기 위한 수면을 얻기 어려워, 연고가 있는 이들이 많이 찾고 있다”고 설명했다. 바다는 제한적이고 몇 대째 가업을 이어오던 이들이 자리를 내어주기는 쉽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에도 김 양식에는 매력이 있다고 어필한다. 그는 “적은 초기 투자로 1년 안에 소득을 얻을 수 있다”며 “겨울에 자라는 김은 주로 여름에 발생하는 태풍 등의 자연재해를 피해갈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라고 꼽았다. 이어, “김 양식의 특수성이 가지는 장벽에도 분명히 빈틈은 있다”고 덧붙였다.

장승용 씨는 특히 김 양식을 염두하고 있는 귀어 희망자들에게 “많은 것을 따지며 오래 생각하는 것보다, 기본 계획이 세워졌다면 일단 뛰어들라”고 조언했다. “제한적인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갖은 방법을 동원해 찾아들고 있는 현재, 2~3년만 지나면 이제는 양식을 펼 자리가 없을 수도 있다”는 설명이다. 또한 몸은 고되지만 노력한 만큼 수익으로 돌아온다며, 직접 부딛혀 배워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귀어에 대해 신중한 조언을 건내면서도, 열성적으로 김양식의 매력을 이야기 하는 장승용 씨 에게 한 사람의 김양식인으로 자부심이 느껴졌다. <자료협조=국립수산과학원 귀어귀촌종합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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