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무(蘇武)와 메르스 의병
소무(蘇武)와 메르스 의병
  • 이준후 시인/산업은행 부장
  • 승인 2015.06.29 10: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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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후 시인/산업은행 부장
옥처럼 푸른 호수 바이칼호, 그 곳에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소무(蘇武). 짐승 가죽을 몸에 걸치고 손에는 부절을 들고 호숫가에 홀로 서 있습니다. 치렁치렁한 백발은 머리 뒤로 묶었으나 바람에 흩날렸고 얼굴은 창백했으나 눈은 신비한 광채로 깊었습니다. 한(漢)나라의 중랑장이었던 소무는 지금 이곳 바이칼 호수에 유배되어 있는 것입니다.

기억도 가물가물합니다. 아마 15년은 족히 지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무제(武帝) 때, BC 100년의 일이었습니다. 무제는 전쟁을 준비하며 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흉노(匈奴)는 화해를 요청하며 포로로 잡고 있던 한나라의 사신을 송환하고자 했습니다. 한에서도 포로교환을 위한 사절을 파견했는데 그 대표가 바로 소무였습니다.

소임이 잘 끝나 귀국이 임박했는데, 바로 귀국 전날 일이 꼬이고 말았습니다. 흉노의 내분에 본의 아니게 끼어들게 된 것입니다. 내분 계획은 탄로나 실패했고 소무가 관여된 사실을 알게 된 선우는 격노하여 일행을 참하라고 명했습니다.

주변에서 만류하여 죽이는 대신 항복시키기로 했지만, 소무는 투항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습니다. 높은 작위와 큰 재부에도 전혀 회유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선우는 채찍을 가했습니다. 굴속에 처넣고 음식도 물도 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소무는 흩날리는 눈발과 바위에 낀 이끼로 목을 축이고 가죽옷을 씹으며 허기를 달랬습니다. 죽기는커녕 신선처럼 살아있는 소무를 보고 살피러 온 이들이 놀랐습니다.

선우는 회유를 포기하고 소무를 유배 보냅니다. 먼 북해(바이칼 호수)로 보내 양을 치게 한 것입니다. 호숫가는 추웠고 무엇보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양들이 새끼를 낳으면 고국으로 보내주겠다고 했습니다. 양들은 모두 숫양이었습니다. 결코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다짐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바람은 습기를 버리고 몸이 가벼워 화살처럼 빨랐고 벼린 칼처럼 매서웠습니다. 호수를 덮은 얼음 위로 눈이 내리고 쌓인 눈 위로 다시 눈이 내렸습니다. 바다 같은 호수는 가끔 하늘에 닿을 만큼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달빛 물든 숲에서 늑대 울음소리가 퍼져오면 양들은 두려움에 몸을 흔들며 낮은 울음소를 내곤 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쥐를 잡아먹으면서도 소무는 항상 황제의 표시인 부절을 세워놓고 양을 지켰습니다. 부절의 장식인 새털은 이미 다 닳아 없어졌습니다.

그 사이에 한나라와 흉노는 전쟁을 벌였고 이릉 장군이 이광리 장군을 도우려다 도리어 패하고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릉의 친구였던 사마천은 조정에서 이릉을 변하하다가 무제의 분노를 사 생식기가 잘리는 궁형(宮刑)에 처해졌습니다. 친구의 불행과 가족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릉은 흉노에 마음으로 투항했습니다. 선우는 딸을 주어 결혼시키며 이릉을 위로했습니다.

이릉이 바이칼 호수로 소무를 찾아왔습니다. 선우가 소무를 설득하라며 보낸 것입니다. 이릉이 술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예전 한(漢)에 있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두 사람이었습니다. 말없이 술잔만 오갔습니다.
10여년의 세월이 소무의 머릿속을 스쳐갔습니다. 고향의 산하와 조정의 친구들과 가족들…

이릉이 입을 엽니다. 아침이슬 같은 인생 아니겠습니까. 왜 이렇게 자신을 괴롭히십니까. 이릉이 소무에게 술잔을 건넵니다. 덧없는 인생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소무가 대답합니다. 저는 이미 죽은 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월이 더 흘렀습니다. 이릉은 때때로 사람을 보내 식품과 생필품을 보내 주었습니다. 소무를 만나고 싶은 마음과 피하고 싶은 마음이 이릉의 가슴속에서 치고받고 싸웠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이칼 호수를 방문하면서 이릉은 무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알려주었습니다. 소무는 한나라를 향해 며칠을 통곡하다가 피를 토했습니다. 북해 자작나무의 황금빛 이파리들이 심하게 흔들리면서 한없이 부서져 내렸습니다.

무제가 죽고 두 나라는 화친을 도모합니다. 한나라에서 사신이 오고 포로들도 희망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흉노에 온 사신은 소무의 안부부터 묻습니다. 그런데 선우는 소무가 죽었다고 오리발을 내밉니다. 그동안의 악행을 감추려는 저의였습니다. 사신이 돌아가고 다시 사신이 왔습니다. 소무의 부하 중에 상혜라는 사람이 어렵게 사신을 만나 사실을 털어놓았습니다. 북해 호숫가에 소무가 살아있다고.

그리하여 나이 60세에, 19년 만에, 소무는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건장하여 우렁차게 고국을 떠났다가, 수염과 머리털이 하얗게 센 채 조용히 돌아왔습니다.

메르스라는 전염병이 창궐했습니다. 초기 대응이 미흡해 많이 허둥댔습니다.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하여 수백 명이 감염됐습니다. 격리자는 만 명을 넘고 사망자도 27명을 넘었습니다. 유언비어가 돌고 급기야 다수의 병원들이 문을 닫았습니다.

이런 전쟁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적, 바이러스와의 전쟁입니다. 전쟁사령부도 여럿 생겼습니다. 최고 사령관은 적에 관해, 전쟁에 대해 ‘일자무식’임이 드러났습니다.

그 가운데 목숨을 걸고 전선을 지키는 이들이 있습니다. 의사와 간호사들입니다. 동료가 적에게 공격당해 쓰러지는 상황 속에서도 이들은 중무장한 채 환자를 돌보고 전선을 지키고 있습니다. 의병(義兵)같은 의병(醫兵)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습니다.

극한의 어려움 속에서, 19년이란 오랜 유배 기간을 두고, 소임(所任)을 잊지 않은 소무(蘇武). 메르스 의병들에게서 소무를 보는 듯하여, 그 편린을 보는 듯하여, 내심이 편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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