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미운 아기예수
얄미운 아기예수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 승인 2015.06.29 10: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수산대국 페루의 흉어

1985년 연초, 페루의 침보테(Chimbote) 항 어민들은 벌써 두 달째 손을 놓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입출항하는 배들로 북적이면서 가공공장으로 연결된 컨베이어로는 양륙되는 어획물이 줄을 잇고 있을 텐데, 어찌된 영문인지 모든 고깃배가 부두에서 허구리를 맞댄 채 통 기동할 생각을 않는 것이었다. 중국에 이어 세계 2위의 수산대국인 페루의 어민들이 그처럼 고기잡이를 중단한 것은 앞바다에 그 많던 물고기가 몽땅 자취를 감춰버린 때문이었다(참고로 페루의 연 어획량은 800만 톤가량이지만 이변이 발생한 그 해는 400만 톤으로 줄었다).

오래 전부터 페루 앞바다는 멸치를 비롯한 전갱이와 정어리 등으로 미어터져 물 반 고기 반이라 할 만큼 천혜의 어장을 자랑해 왔다. 따라서 페루 어민들은 그 어획물로 사료용 어분(魚粉)을 만들어 수출함으로써 경제적 윤택함을 만끽해 왔다.

15세기 적 대항해시대, 남쪽 쿠스코(Cuzco) 지방의 험준한 산중턱에 피난도시(避難都市) ‘마추피추’를 건설, 무자비한 정복자 에스파냐인들의 학살과 약탈을 가까스로 모면한 전래의 농사꾼 잉카 후예들이 세계 최고의 수산인(水産人)으로 거듭났던 것은 남극해에서 페루 해안으로 북상하는 훔볼트(Humboldt) 해류 덕분이었다. 해저로부터 용승(湧昇)한 차가운 그 바닷물에는 무기염류가 풍부하여 플랑크톤을 증식시키기 안성맞춤이었고, 따라서 그것을 노린 먹이연쇄(food chain)의 중간 어류들이 다량 서식하면서 그 같은 복덩이를 갖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도 모르게 훔볼트 해류가 기운을 잃자 그에 적응하지 못한 물고기들이 다른 곳으로 이동해 가거나 혹은 폐사하거나 하여, 종당에는 배를 뒤집어 올린 물고기들이 페루 해안을 하얗게 뒤덮는 바람에 그만 그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었다.

그 이유는 서서히 밝혀졌다. 예년에 비해 페루 앞바다 수온이 갑자기 1℃나 상승한 게 그것. 바닷물의 1℃ 상승은 지금까지 안정적이던 기상환경에 엄청난 변화를 초래했다. 과학자들 설명에 의하면, 해수온도가 1℃ 높아지면 같은 부피의 공기를 1,000℃ 이상 끌어올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페루의 그 같은 재앙은 그 해가 처음 아니었다. 9년 전인 1976년을 시작으로 그 4년 후인 1980년에도 똑같은 현상을 야기하였으며, 당시에도 그 악몽이 재현되면서 어장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만 것이었다. 그리하여 페루 어민들은 그 같은 현상이 하필이면 크리스마스를 목전에 둔 연말께를 노려 발생한다는 사실에 주목, 에스파냐어로 ‘아기예수(혹은 신의 아기)’라는 뜻의 엘니뇨(El Nino)라 부르게 된 것이었다(대항해 시절, 에스파냐인들로부터 박해를 받은 잉카족이지만, 이후 그들 언어인 케추아어와 함께 에스파냐어를 병용하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일지도 모른다).

지구종말의 전주곡인가

유사 이래 광대한 태평양에는 여러 갈래의 장대한 해류가 일정 방향으로 순환해 왔다. 가령 적도(赤道)를 중심으로 남위 10도선에서는 페루와 에콰도르 앞바다를 시발로 한 한류가 멀리 동아시아의 뉴기니와 인도네시아 등 서부태평양으로 치달으면서 점차 데워지는데, 무슨 영문인지 그게 거꾸로 흘러 페루 앞바다를 뜨뜻한 난류(暖流)로 바꾸어버렸다.

과학자들은 그 원인으로 우주이동설 내지는 해류의 농간 등 온갖 가설로 해석하려 하였으나 별 동의를 얻지 못한 가운데 근래에는 지구온난화에 초점이 맞추어지면서도 아직껏 정확한 진단을 내리지 못 하고 있는 상태다.

아기예수라는 이름의 해양괴변은 다만 페루의 수산업을 망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우선 동부태평양의 수온이 상승하면서 바닷물 증발을 촉진시켜 대기의 습도를 높이자 그것은 곧 폭우가 되어 페루와 에콰도르 내륙을 강타하여 홍수를 유발시킴으로써 산사태 등으로 가옥과 사람이 파묻혔는가 하면, 상대적으로 기온이 하강한 태평양 건너편의 동아시아에서는 계속된 한발로 곳곳에서 야화(野火)가 발생, 대기를 매연(煤煙)으로 가득 채워 숨쉬기조차 어려웠고, 논바닥이 쩍쩍 갈라져 농사를 망쳤다.

반면 캘리포니아에서는 때 아닌 열대성 폭우가 발생, 동쪽으로 네바다를 건넌 유타 주까지 이동하여 그곳의 오랜 적설(積雪)을 깡그리 녹임으로써 대홍수를 일으킨 사실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뿐인가. 지구를 반 바퀴나 돈 남아프리카의 짐바브웨와 모잠비크에서는 수년간 비가 내리지 않아 기근(饑饉)을 초래, 수백만 명이 굶어죽은 사례도 무관치 않았다.

그 무렵 대서양으로 출어한 한국의 어느 원양어선도 그 재앙을 비켜가지 못 했다. 가다랭이 채낚기선인 그 배는 아프리카 가나 국(國)의 테마(Tema) 항을 떠나 며칠이나 걸려 어장에 도착하였는데 막상 조업을 시작하려고 하자 미끼(어군 유인용)로 쓸 멸치가 몽땅 폐사해 있었다. 그제야 수조(水槽)를 들여다보니 바닷물이 벌건 게 적조(赤潮)가 분명했다. 기상이변으로 바닷물 온도가 상승한 탓이었는데, 그 역시 페루 앞바다와 같은 아기예수의 훼방이자 농간이 분명했던 것이다.

자연재앙은 다만 지표면에서만이 아니라 대기에도 영향을 미쳐 1만 미터 상공에 존재하는 제트류(jet stream)의 이동속도를 배가(倍加)시키기도 한다. 그 결과로 호놀룰루에서 로스앤젤레스로 가던 어느 여객기는 비행시간을 1시간이나 단축할 수 있었다는 웃지 못 할 일도 어쩌면 아기예수의 농간이 인류에게 해악만이 아닌 이득도 안겨준다는 우스개도 실은 반가워할 일만은 아니다.

우리 한반도도 이에서 비켜갈 수 없게 돼 있다. 1998년 4월, 때 아닌 우박과 함께 엄청난 폭우가 내려 서울 지하철 노선을 몽땅 물바다로 만든 일, 6월에는 모기의 극성으로 말라리아 병이 창궐한 일, 동해안 심층수 온도 상승과 서귀포 앞 산호해의 백화현상(白化現象) 등도 그 연장선상에 있었음이 분명한 담에야!
특히 호주 등 여러 나라 기상청이 앞 다투어 올해를 지목, 예전보다 더 강력한 ‘슈퍼 엘니뇨’의 발생이 우려된다는 예측을 경쟁적으로 내놓고 있다. 그것도 크리스마스가 아닌, 당장 초여름께부터 시작해서 향후 몇 달 동안 계속될 것이라고 하니 그 재앙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 한반도도 대비책 마련을 서둘러야 하지 않을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