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와 대법관과 아이히만, ‘생각의 무능’은 죄악이다
세월호와 대법관과 아이히만, ‘생각의 무능’은 죄악이다
  • 이준후 시인/산업은행 부장
  • 승인 2015.06.01 13: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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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후 시인/산업은행 부장
독일인에게 흔한 이름이었던 아돌프(Adolf), 이 이름을 가졌던 사람들은 2차 대전 이후 아예 개명하거나 이름 일부를 바꾸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아디다스의 설립자인 아돌프 대쓸러(Adolf Dassler), 이 사람도 종전후엔 이름대신 닉네임인 Adi를 사용했습니다. 회사명 ADIDAS는 이름 Adi와 성(性)의 Das를 합친 작명입니다.

아돌프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사람이 또 있습니다.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입니다. 600만 유대인 대학살의 실무책임자였으며, 전후 15년 동안 피해 다니다가 아르헨티나에서 체포되어, 재판 과정에서 세상을 놀라게 한 답변을 한 전쟁범죄자.

아이히만은 1906년 독일의 시골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5형제가 있었지만 내성적이었고 학교성적과 생활도 신통치 않았습니다. 그의 가족이 오스트리아로 이주한 후에도 생활은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돌프는 용케 직업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 뒤 오스트리아 정유 회사의 판매원으로 취직했습니다. 26살 되던 1932년 아이히만은 국가사회주의당, 나찌당에 입당합니다.

입당 초기에 그는 정치엔 흥미가 없었습니다. 당 강령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었으며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을 읽어본 적도 없었습니다. 1933년 오스트리아가 나치당을 불법화하자 그는 독일로 들어와서 나치당의 친위대 보안국에서 경력을 쌓습니다. 당의 승인을 얻어 결혼을 하고 1935년 유대인들을 다루는 부서에 배치됩니다. 아이히만은 1938년 친위대에서 유대인 추방업무를 맡습니다. 독일 점령지역에서 유대인을 찾아 모으고 폴란드 게토로 추방, 이송하여 관리하는 것이었습니다.

“난 그때 그것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가 후일 한 말입니다. 그는 시온주의 운동의 역사적 배경을 공부했고 헤브라이어 강의를 들었습니다. 곧 그는 유대인 일에 대해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1941년 나치 지도부가 유대인 말살을 결정했을 때도 그는 그 집행을 지시받습니다. 그는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수용소와 여러 학살 지역에 나타나서 학살을 지시했습니다.

대학살을 기획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유대인을 말살하는 일을 누구보다도 더 적극적이고 효과적으로 수행했습니다. 그는 600만의 유대인 학살을 지휘하고 실행한 인물로 꼽힙니다.

아이히만은 1945년 패전 후 독일을 탈출, 이탈리아, 시리아를 전전하다가 아르헨티나로 도피,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이름으로, 가족까지 불러내 숨어 지냅니다.

정체가 드러난 계기는 1957년 아들이 유대인 여자 친구를 사귀면서부터입니다. 아들 닉의 여자 친구 실비아의 아버지인 로타르 헤르만은 나치 학살의 생존자였습니다. 헤르만은 수상쩍은 닉의 가족을 동료 유대인을 통해 이스라엘에 알립니다. 이제 모사드의 본격 추적이 시작됩니다. 1959년 모사드는 부에노스아이레 스에 있는 리카르도 클레멘트의 집을 찾아내 카메라로 얼굴을 찍는데 성공합니다. 이스라엘 법의학자들은 아이히만의 과거 사진과 클레멘트 사진에 나타난 귀의 세부적인 모습을 비교해 클레멘트가 아이히만임을 확인합니다. 1960년 5월 메르세데스 벤츠 공장에서 퇴근하던 클레멘트는 버스 정류장에서 체포됩니다. 그리고 비밀리에 이스라엘로 송환됩니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1961년 4월 11일 시작된 아이히만 재판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8개월이 걸리는 재판이었습니다. 판사는 그에게 30개의 죄목에 대하여 인정여부를 묻습니다. 그는 범죄사실을 모두 부정합니다. 자신은 오직 국가의 명령에 따라 충실히 움직인 관료였다고, 아이히만은 말합니다.

“연속과정에서 일을 접수했고 중계업무를 처리한 것입니다. 명령을 받고 명령에 따랐을 뿐입니다. 제가 한 일은 행정 절차의 작은 역할이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합니까?”
“도대체 무엇을 인정하란 말입니까? 저는 남을 해치는 것엔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제가 관심이 있는 건 맡은 일을 잘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나는 잘못이 없습니다. 단 한 사람도 내 손으로 죽이지 않았으니까요. 죽이라고 명령하지도 않았습니다. 내 권한이 아니었으니까요. 나는 시키는 것을 그대로 실천한 관리였을 뿐입니다.”
“임무와 양심 사이에서 갈등한 적은 없었습니까?”
“월급을 받으면서도 지시에 따르지 않았다면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입니다. 공직자의 용기란 조직된 위계질서입니다.”

재판을 지켜 본 여섯 명의 정신과 의사들은 아이히만에 대해 ‘그는 나보다 더 정상이며 심지어 준법정신에 투철한 국민’이라고 언급했습니다.

법정은 그 해 12월 15일 전쟁 범죄와 인도주의에 반한 죄를 적용해 교수형을 선고했고, 형은 이듬해에 집행되었습니다. 재판을 지켜본 유대인 여성 정치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한나 아렌트, 아이히만과 동갑이었습니다, 그녀는 조직에 매몰되어 근면하게 악을 실천한 그의 모습을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악이란 뿔 달린 악마처럼 별스럽고 괴이한 존재가 아니며, 사랑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우리 가운데에 있다. 그리고 파시즘의 광기든 뭐든 우리의 악을 행하도록 계기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멈추게 할 방법은 ‘생각’하는 것뿐이다.” 아렌트의 말입니다.

세월호 침몰과 관련하여 선장 등에 대한 재판이 진행중에 있습니다. 선장은 승객들을 죽이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으며, 해경이 도착했기 때문에 이제 승객을 구하는 것은 해경의 임무라고 판단해 하선했다고 항변합니다. 선원들은 선장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이렇게 아이히만의 변명과 유사할까요. ‘생각의 무능’이 304명의 희생자를 만들었습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모 대법관의 국회 인준청문회와 관련하여 아이히만이 거론되었습니다. 언론기사 일부를 인용합니다. “청문회 내내 그가 가장 많이 반복한 말은 ‘지시에 따라’였다. 범인이 2명이라고 조작한 경찰조사를 그대로 따라 4일 만에 기소한 것, 당사자 참여도 없이 현장검증을 한 것, 모두 유례없는 일이었으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만 반복했다. 수사팀 막내검사였기 때문에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최선을 다했다고 강변했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을 낳고,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아렌트의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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