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엔 해운대가 어떨까요
올 여름엔 해운대가 어떨까요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 승인 2015.06.01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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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신라시대 문장가 ‘海雲(해운)’

1천년도 더 전인 신라 말기의 어느 봄날, 파도소리 들리는 해안 바위에 걸터앉은 초로의 한 과객(過客)이 땀을 훔치며 홀린 듯 사방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방금 벗어낸 괴나리봇짐 하나가 곁에 놓인 것으로 보아 필경 먼 길을 따라나선 게 분명했다.

“음, 다시없는 절경이야.”
지저귀는 새소리와 함께 울창한 소나무 틈새 여기저기로 탐스러운 동백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섬을 둘러보고 난 그의 혼잣말이었다.

절경은 그뿐 아니었다. 시야 전체로 완만하게 곡선을 그린 백옥과도 같은 백사장은 십리도 넘게 이어져 있었고, 그 바깥으로는 망망하면서도 짙푸른 남해 바다가 한없이 펼쳐져 있었다.

“저기가 해돋이 마을이라 했지.”
다시 웅얼거렸다. 백사장 저 너머로 자그만 언덕이 봉긋해 있었고, 그 자락으로 똬리를 튼 두어 채 초가 말고는 어디에도 인가라곤 보이지 않았다. 말 그대로 평화로운 한 폭 풍경이었지만, 좀 전 만난 시골노인은 아직도 마을 이름이 없다 했다.

그게 마음에 걸렸던가. 한참 풍경을 감상하던 과객은 갑자기 괴나리봇짐에서 붓을 꺼내더니 그것으로 시방 자신이 걸터앉은 벼랑 바위에다가 몇 자 글귀를 남겼다.

- 天下絶景 海雲臺(천하절경 해운대).

그런 다음 그는 다시 봇짐을 둘러메고 길을 재촉하였는데, 몇 발작마다 자주자주 뒤돌아보는 낌새가 아마도 천하절경에 대한 아쉬움 때문인 듯했다.

바로 그 과객이 경주(慶州) 최씨 시조이자 당대 문장가(文章家)인 최치원(崔致遠)이었다. 소년 시절(12세) 당나라로 유학, 그곳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얻은 그는 ‘황소(黃巢)의 난’ 등 난세에서도 살아남아 28살이던 신라 51대 진성여왕 때 귀국, 학사(學士)·시랑(侍郞)·감사(監事) 등의 벼슬을 얻었으나 당대의 병폐인 진골 등 계급 사회의 벽을 극복하지 못 하고 한계를 느낀 그는 스스로 사임, 차라리 속세를 떠나기로 하고 시방 합천 산골에 있는 가야산 해인사(海印寺)로 찾아가는 길인 것이었다.

자연과의 싸움- 해운대 백사장의 회춘

어느 기록에도 나와 있지 않지만, 불가(佛家)의 한 사람으로 깊은 산사(山寺)로 들어간 그는 틀림없이 조석으로 경(經)을 읊었을 그가 동백섬 바위자락에 남긴 글귀는 그의 호(號)였고, 그것은 곧 후대의 눈길을 끌었다. 바다에 드리운 구름자락이라는 그 말이야말로 그가 감탄해 마지않았던 이름 없던 어느 해안자락을 그대로 투영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가 남긴 글귀는 이후로 그곳 지명(해운대)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예견은 적확했다. 그곳이야말로 미구에 천하 명소가 되었으니 말이었다. 근대 들어서의 일이지만, 천혜의 백사장에다 온천이 개발되고 이어서 별 다섯 개짜리 고급호텔이 경쟁적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순식간에 세계 최고의 피서지로 부각된게 그것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지구온난화라는 요상한 마귀의 장난인가.

근래 들어 자주자주 내습하는 태풍과 해류의 농간으로 해수욕장으로서의 가장 핵심 자원(資源)인 모래가 막무가내로 쓸려나가면서 그 규모가 반 너머 졸아든 게 그것. 모래 없는 해수욕장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인가.

해방 당시는 58m의 폭에, 8만5천여㎡의 광활한 면적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근래 들어 40m 남짓으로 쪼그라들자 당국(부산해수청과 해운대구청)이 팔을 걷어붙이고 435억 원의 사업비를 투입, ‘연안정비사업’이라는 이름으로의 공사를 벌렸던 것이다. 공사는 없어진 모래를 채우는 일이 주여서 멀리 서해 대륙붕으로부터 채굴과 운반에 총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여 지난 3년 동안 15톤 화물트럭 6만 대가 60만㎡의 모래를 퍼 실어 나른 끝에 드디어 산(山)을 옮기는 이상의 대공사를 방금 마무리 짓기에 이른 것이었다.

그렇게 시간과의 끈질긴 싸움 끝에 얻어낸 결실인 만큼 이제부터는 보다 관리에 주력하여 사전 유실을 막고, 지금의 모습을 오래토록 이어나가야 하는 과제를 짊어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 방안으로 전문가들의 조언에 따라 해수욕장 왼쪽 끝자락인 미포 선착장에는 120m 길이의 돌제(突堤 ; 육지에서 강이나 바다 쪽으로 길게 쌓아 만든 일종의 둑)를, 웨스턴호텔 앞 바다에는 큰 웅덩이로 만든 다음 그 위로 45m 폭의 둑을 만든 일 말고도, 추가로 연말까지 동백섬과 미포 등 두 곳에 각각 200여m의 수중방파제를 조성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 모든 공사는 어렵게 일구어낸 ‘백사장 회춘(回春)’을 유지·보존하면서 제2 전성기를 구가하자는 간절한 염원에서 비롯된 것.

남미 브라질의 리오데자네이로에는 연중 내내 세계 도처의 피서객이 몰려드는 해수욕장 코파카바나 비치가 있다. 5㎞ 활 모양의 모래사장 뒤로는 밤낮으로 온갖 여흥을 만끽할 수 있는 환락가가 진을 치고 있는데, 몇 차례 방문한 적 있는 필자로서도 방금 면모일신한 해운대가 오히려 규모나 분위기 면에서 단연 압도적이라는 생각이다.

특히 올해는 백사장이 두 배로 확 넓어지면서 면모일신한 해운대 해수욕장 개장한 지 꼭 반세기가 되는 해다. 그래서 우리는 태종대·몰운대와 더불어 '부산팔경'의 하나로 우뚝한 명소(해운대)를 자랑하면서, 1천 년도 더 전 고적한 암자에서 조석으로 경을 외우며 못내 절경을 떠올렸을 선대에게도 보답하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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