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고대죄(席藁待罪)와 황제의 과공(過恭)
석고대죄(席藁待罪)와 황제의 과공(過恭)
  • 이준후 시인/산업은행 부장
  • 승인 2015.03.31 11: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이준후 시인/산업은행 부장
주한 미국대사가 피습을 당해 크게 다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지난 3월 5일 마크 리퍼트 미국 대사가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했다가 진보성향의 김 모씨가 휘두른 흉기에 크게 다친 것입니다. 얼굴과 왼쪽 손목 부위를 공격당했는데 다행히 치명상은 아니어서 급히 수술치료를 받았으며 그 경과도 양호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당시 중동 4개국을 순방 중이던 박근혜 대통령은 피습 사건을 보고 받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며 이는 ‘한미동맹에 대한 공격’이라고 말했습니다. CNN은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속보로 이 사건을 전했습니다. 미 국무부도 사건발생 1시간 30여 분 만에 논평을 통해 피습사실을 확인하면서 ‘폭력행위를 강력히 규탄한다’는 내용을 발표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리퍼트 대사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피해상황을 묻고 쾌유를 빌었습니다.

정부는 이번 사건의 진상을 철저히 파악하는 한편 미국뿐 아니라 주한 외교사절의 시설과 요인에 대한 안전관리를 대폭 강화하기로 했습니다. 경찰청장은 11일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 피습사건에 대해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이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해 대단히 송구스럽다”고 말하면서 ‘사건 발생 직후부터 리퍼트 대사와 배우자에 대해 경호대를 투입해 24시간 근접 경호중’이라고 밝혔습니다.

반기문 UN 사무총장은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 피습사건에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이라고 우려했습니다. 여당과 야당 또한 미국 대사가 김 모 씨로부터 피습당한 사건에 대해 규탄했습니다. 여야는 이날 사건 발생 직후 각각 김 모 씨의 행위를 비난하는 동시에 리퍼트 대사의 쾌유를 기원했습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자신의 트위터에 “어떤 이유로든 테러는 용인될 수 없으며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 리퍼트 대사의 쾌유를 빕니다”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정작 ‘사건’은 사건 발생 이틀 후부터 일어났습니다.

3월 7일 서울 도심에서 대한예수교 장로회 신도들이 ‘리퍼트 대사님 사랑합니다’라고 외치며 기도회와 발레, 부채춤, 난타 공연을 열었습니다.

엄마부대와 자유청년연합, 구국채널 등 보수단체 역시 리퍼트 대사가 입원한 병원과 광화문 등 도심에서 연일 기자회견과 집회를 열었습니다. 이들 현장에는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We Love Mark’ 등이 적힌 팻말과 구호가 등장했습니다.

입원 치료를 받던 리퍼트 대사에게 개고기를 가져간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고종황제의 마지막 딸의 양아들로 확인됐습니다. 그는 개고기 선물이 경호원에게 제지당하자 병원비 명목으로 500만원의 성금을 병원에 맡겼습니다. 미 대사관측은 돌려줄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또 신동욱이라는 사람은 “리퍼트 대사와 그 가족, 미국 정부와 미국 국민에게 용서를 구한다”면서 병원 앞에 자리잡고 ‘석고대죄 단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위이자 현 대통령 여동생의 남편입니다. 석고대죄(席藁待罪)는 ‘짚 거적에 앉아 죄에 맞는 벌을 기다리다’라는 뜻입니다. 벌을 기다린다니…

이러한 상황에 110년 전에 있었던 장면이 겹쳐집니다.

1905년 가을,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 루스벨트가 조선에 옵니다. 대한제국 황제 고종은 미국 대통령의 딸이 조선에 올 것이란 얘기를 듣고는 무척이나 기뻤습니다. 청일전쟁으로 중국을 물리친 일본은 급기야 러일전쟁에서도 승리하면서 조선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고 있었습니다. 조정은 이미 일본의 고문정치가 시행되어 재정, 외교, 군사, 교육 등 모든 부문에서 매사 일본의 간섭을 받고 있었습니다.

기울어가는 나라를 힘겹게 붙들고 있던 고종은 마지막으로 미국에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 근거는 1882년에 체결했던 ‘조미수호통상조약’이었습니다. 조약 1조에 ‘제3국이 한쪽 정부에 부당하게 또는 억압적으로 행동할 때에는 다른 한쪽 정부는 원만한 타결을 위해 주선을 한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미국을 형님과 같은 나라라고 생각하오.” 고종은 미국 공사에게 이런 말을 여러 차례 했습니다.

앨리스 루스벨트는 여행을 좋아했습니다. 출중한 외모를 지닌 앨리스는 미국에서 공주대접을 받는 유명인물이었습니다. 그런 앨리스가 아버지의 외교사업을 대신해 조선을 방문한 것입니다. 당초 공주는 육군장관 태프트와 의원 수십명과 함께 일본을 방문했습니다. 태프트는 일본에서 무슨 수작을 했을까요. 그 뒤 앨리스는 일행과 별도로 필리핀과 중국을 거쳐 군함 오하이오 편으로 9월 19일 약혼자와 함께 제물포항에 도착합니다.

고종의 환대는 극진했습니다. 앨리스 일행에게 황실전용열차를 내어주었으며 서울 노량진역 도착시 황실 악단은 미국국가를 연주했습니다. 앨리스에게 황실 가마를 배정했고 다른 일행들에게도 관청의 가마를 준비했습니다. 당시 한양에 있던 모든 집들에는 미국 성조기를 내걸게했는데 줄(stripe)이 빠진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국빈에게 경의를 표하려는 마음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했습니다.

한양 도착 3일째 되는 날 고종 황제는 앨리스와 점심을 같이 했습니다. 고종은 공식적으로 외국인과 식사를 같이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루스벨트의 딸을 예우하기 위해 황제는 선례를 깼습니다. 다음 날은 황실 여성들과 식사하도록 했습니다. 이 또한 선례가 없던 것이었습니다.

말을 타고 궁궐에 흙먼지를 날려도, 승마복을 입고 명성황후의 능에 가 석마를 타고 말채찍을 휘둘러도 보아 넘겼습니다.

기록은 황제의 환대가 과공을 넘어 비굴에까지 이르렀다고 적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 소용이 없었습니다. 황제의 희망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국익과 국익이 충돌하는 국제사회입니다. 외교는 환대와 정성, 과공(過恭)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냉철한 이성이 앞서야 합니다. 따뜻한 가슴과 차가운 머리가 어우러져야 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