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해는 ‘사과 해!’ 아니라 ‘미안 해!’
새 해는 ‘사과 해!’ 아니라 ‘미안 해!’
  • 이준후 시인/산업은행 부장
  • 승인 2014.12.30 14: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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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후 산업은행 부장/시인
‘울면 지는 거야!’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사람들은 알 겁니다. 동무들과 싸우다 울면, 지는 거 말입니다. 당연히 한 쪽이 울면 싸움도 끝나지요. 우는 쪽이야 아파서 울고, 분해서 더 웁니다. 어쨌든 울면 지는 겁니다. 덩달아 울보라는 별명도 얻게 됩니다. 실은 이 별명 때문에 더 기를 쓰고 싸웠는지도 모릅니다. 싸움은 잠시지만 별명은 오래가니까요.

‘피 나면 지는 거다!’

조금 더 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골목다툼을 하게 됩니다. 그 때의 싸움규칙은 ‘피 나면 지는 것’입니다. 주먹에 힘이 실리고 보니 잘못 맞으면 코피가 나거나 입술이 터지게 됩니다. 누군가가 ‘너 피나!’ 하면 그 ‘너’는 싸움에 진 겁니다.

‘미안하면 지는 거지!’

중학교 이후로는 주먹싸움을 한 기억이 없습니다. 말싸움, 말다툼 정도입니다. 친구들끼리 잘 놀다가도 사소한 일로 말다툼하고 등 돌린 경우가 꽤나 있었습니다. 보다 못해 친구들이 권합니다. ‘야, 서로 사과해라!’, 실은 화해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먼저 미안하다고 하기는 싫었습니다. 미안하면 ‘지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대한항공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적기 항공사입니다. 그 대한항공이 ‘땅콩 회항’과 관련하여 하나의 사건을 두고 세 번씩이나 사과를 했습니다.

사건 발생 초기에 ‘사무장이 잘못해 당연한 지적을 했고 회항이 위험하지도 않았다’는 내용의 사과문을 발표했습니다. 사과문인지 설명문인지 헷갈립니다. 곧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비난여론이 폭풍우처럼 몰아쳤습니다.

이에 회사는 일주일 후 일간지 광고 형태로 다시 사과문을 발표합니다. 그런데 사과의 원칙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잘못했다’는 취지의 말만 반복했습니다. 사과의 주체나 사과 대상이 모호했고 사과 이유 또한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사건을 일으킨 부사장이 사과의 주체가 돼야 함에도 그녀는 회사 뒤에 숨었습니다. “부사장의 지적은 당연하다”고 까지 밝혀 사과의 주체를 사과의 대상으로 바꿔놓았습니다.

부사장은 회사 소유주인 회장의 장녀입니다. 급기야 소유주 회장이 ‘딸 잘못 가르친 죄’라며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사과를 하고 나섰습니다.

후진국 나라 사람들, 사회주의를 경험한 나라 사람들은 ‘미안합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크던 작던 잘못을 저지르고도 그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기분 상하게 한 것은 말할 것도 없지요. 그들에게 ‘미안합니다’는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되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라고 베트남 하노이 교민이 알려주었습니다.

선진국 사람들은 사과를 잘 합니다. 영미 사람들은 ‘I am sorry.'를 입에 달고 삽니다. ’sorry‘한 상황이 아닌데도 ’sorry', ‘sorry' 합니다. 일본 사람들도 입만 열면 ‘스미마셍’ 합니다. 우리도 전에는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잘 하지 않았습니다. 만원버스 안에서 남의 발을 밟고도 그럴 수 있다는 표정이었습니다.

허나 요즘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옷깃만 스쳐도 ‘미안합니다’를 연발합니다. ‘미안하면 진다’, ‘사과하면 패배자’라는 것은 초등학교 시절에나 통용되던 말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시절은 지났습니다. 이제 선진국이 된 것입니다.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습 과정에서 어떻게 사과를 하느냐, 즉 사과의 기술에 따라 결과에서 차이가 크게 날 수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사과를 하면서 사족을 붙이지 말라고 권합니다. ‘하지만’ ‘다만’ ‘그러나’를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해받고 있고 억울하다고 느껴도 사과를 하면서 이를 드러내선 안 된다고 조언합니다. 특히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하겠다’는 투의 조건부 사과는 사과 받는 사람의 감정을 더욱 상하게 할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과하고 난 후 오히려 상대방이 더 화를 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예를 들어 ‘미안해. 이젠 됐지?’, 또는 ‘미안하다고 했잖아? 그런데 뭐가 또 문제야?’라고 합니다. 거짓 사과, 건성 사과, 변명성 사과입니다. 진정성 있는 사과라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대한항공은 사과를 하긴 했지만 진정한 사과를 하지 않았습니다.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은 사과의 기술로 3R을 말합니다. 사과할 때 꼭 필요한 3요소인 ‘Regret(미안함, 반성의 표시), Reason(사건의 원인과 과정 설명), Remedy(향후 해결책)를 말합니다. 개인적인 사과는 물론 대중에게 공개적 사과를 할 때도 마찬가지. 먼저 사과의 주체가 전면으로 나서야 하고, 사과의 대상을 정확히 해야 합니다.

그 다음 Regret, 충분한 반성의 표시, 미안함을 절실하게 전달해야 합니다. 이어서 Reason, 즉 이번 사건이 발생한 원인은 무엇인지, 사과의 대상이 되는 행위를 분명히 지적하고 설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Remedy, 대응 상황에 대한 분석 그리고 재발 방지를 위한 해결책을 제시해야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한다. 사과의 표현에 따라 상대의 마음을 누그리기도 하고 화를 돋우기도 합니다. ‘먼저 미안하면 지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것 입니다. 용기 있는 자만이 사과할 수 있습니다.

다가오는 ‘새 해’는 누구에게 ‘사과해!’ 하는 해가 아니라 내가 먼저 ‘미안해!’하는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대통령부터 개개인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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