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국 국서 거부사건’이 있었습니다
‘일본국 국서 거부사건’이 있었습니다
  • 이준후 시인/ 산업은행 부장
  • 승인 2014.09.30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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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후 시인/ 산업은행 부장
1875년 9월 20일, 서해바다에 대형 일본 군함이 등장했습니다. 조선 개화기의 첫장 첫줄을 장식하는 소위 ‘운양호사건’입니다.

강화도 부근에 정박한 운양호(雲楊號)는 담수(淡水)를 구한다는 구실로 보트에 군인을 태워 강화도 초지진(草芝鎭) 포대까지 접근합니다. 조선의 초지진 포대에서 포격을 가하자 운양호에서도 맹포격으로 응수합니다. 포의 성능이나 포술이 우세한 일본군은 초지진을 파괴했으며 영종진(永宗鎭)에도 포격을 가한 후 섬에 상륙하여 살인ㆍ방화ㆍ약탈을 자행합니다. 조선군은 전사자 35명 포로 16명, 일본군은 단지 2명의 경상자만 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일본은 포격전의 책임을 조선에 돌리고 무력을 배경으로 개항을 강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일본 군함이 강화도에 나타나 포격을 해 댄 것이 아니었습니다.

1867년 11월, 도쿠가와 막부가 일본 천황에게 대권을 이양하여 왕정이 회복됩니다. 이른바 대정봉환(大政奉還)입니다. 이듬해 1868년 1월, 일본은 이 사실을 각국 외교 공관에 알립니다. 그런데 조선과의 외교는 종래대로 대마도 번(藩)이 관할케 합니다. 그러면서 메이지 정부는 대마도주(對馬島主)에게 황실의 권위나 국가의 위엄을 손상하는 문구를 쓰지 말 것과 조선 국왕에 대한 일본 천황의 우위를 명확히 표현할 것을 지시합니다.

1868년 6월, 대마도주는 사절단을 구성하고 12월 동래를 통하여 대정봉환에 관한 외교문서를 조선에 전달합니다. 흥선대원군 집권하의 조선은 서계(書契, 외교문서) 접수를 거절합니다. ‘황상(皇上)’과 같이 중국의 천자에게만 쓸 수 있는 용어를 일본국왕에게 사용한 점 등을 문제 삼았습니다. 이후에도 일본은 외무성의 관원을 보내 근대적 조약을 맺을 것을 요구하지만 흥선대원군은 접수조차 거절하고 쇄국정책을 강화합니다.

1872년 1월, 접수를 기다리던 일본 사절단이 3년 만에 동래에서 철수합니다. 이후 일본은 대마도 번을 통하던 조선과의 외교 관행을 폐지하고 외무성이 직접 관장하기로 합니다.

조선 개항에 실패한 일본에서 1873년, 이른바 정한론이 대두됩니다. 그러나 10월, 정한론을 주장하던 일본 관료들이 실각하고 소위 ‘내치우선파’들이 집권합니다. 때맞추어 조선에서도 12월 쇄국을 시행하던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됩니다. 조선 조정에 개화파가 등장합니다. 1873년 12월, 고종은 박정양(朴定陽)을 진상조사관으로 동래 현지로 내려 보내 일본과의 국교가 파탄에 이른 상황을 조사하도록 합니다. 그 결과 동래 부사를 비롯한 일본과의 외교 업무를 관장하던 관료를 교체합니다. 조선 조정에서는 일본과의 외교 기본방향에 대한 토론을 시작합니다. 고종이 재가한 대신회의에서 일본국이 외교 문서에서 ‘황제’를 칭해도 문제 삼지 않을 것을 결정합니다.

1873년 12월, 일본 외무성은 모리야마 시게루(森山 茂)를 일본 공관의 이사관으로 임명하고 조선국 파견을 명령합니다. 모리야마는 1875년 2월에야 부산 동래에 부임합니다. 일본군의 대만출병으로 부임이 늦어진 것입니다. 동래 부사는 외교문서에 ‘대일본’과 ‘황상’이란 표현이 있는 점 등을 확인하고 조정에 자문을 구합니다. 고종은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문서를 접수토록 지시합니다.

1875년 3월, 서계를 접수한 동래부 실무 관료는 의례 절차에 관해 구체적인 논의에 들어갑니다. 일본은 서양식 대례복(연미복)을 입고 연향에 참석하겠다고 주장하며 시간을 끕니다. 연향(宴享)이란 국빈(國賓)을 대접(待接)하는 잔치를 말합니다. 조선 조정은 그 의례만은 구식대로 할 것을 결정합니다. 1875년 4월, 모리야마는 부관을 동경에 보내어 대조선 외교에서 함포 외교가 유효한 수단임을 보고하면서 그에 대한 준비를 요청합니다.

5월, 조선 조정의 결정이 일본측에 전달됩니다. 동래 부사 또한 이번에 한해 구식대로 의례를 행하자고 종용합니다. 이에 모리야마는 조선 측이 시간을 끌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서면을 가지고 온 조선 관리를 공관에 억류합니다. 일본 공관은 조선측 요구가 일본에 대한 내정 간섭이라는 성명을 발표합니다. 동래 부사가 발끈합니다. 이어 의례를 변경하는 것은 조선의 국체를 손상시키는 행위라는 성명을 전달하자, 일본 공관은 다시 재반박을 발표합니다.

1875년 5월말, 동래 부사는 일본 공관과의 교섭을 중단하고 조정의 지휘를 구합니다. 6월 2품 이상의 대신들이 모인 대신회의에서 일본의 요구에 대한 수용론이 우세했고 고종도 정면충돌을 피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노대신(老大臣) 중심으로 강경론이 대두하여 의정부는 복식 등을 바꾸면 연향이 불가능함을 천명해 버립니다. 9월, 고종도 태도를 바꿉니다. 고종은 동래 부사를 바꾸면서 신임 부사에게 일본국 관계자들을 알아듣도록 깨우쳐 반드시 연향을 설행하라 명합니다.

1875년 9월 20일, 모리야마는 일본 정부의 명을 받아 이튿날인 21일에 일본으로 출국합니다. 같은 날, 강화도 앞에서 운양호사건(雲揚號事件)이 일어납니다.

작금의 대일관계에 대한 한 일간신문의 설문조사가 보도되었습니다. “‘한·일 관계 개선 시급’ 전문가 70%, 국민은 5%뿐“, 이것이 해당 기사의 제목입니다.

신문과 전문연구기관이 전국의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정부가 외교적으로 협력을 강화해야 할 국가’를 묻는 질문에 일본을 꼽은 응답자는 4.9%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전문가 30명 중 21명은 한·일 관계 악화가 현정부 외교의 가장 큰 실책으로 보고 개선을 촉구했습니다.

한일외교,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시간이 해결해 줄까요? 시간은 과연 우리 편일까요? 이제는 풀어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시기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아무렴요, 137년 전처럼 되지는 않겠지만. 이탈리아 역사가 크로체가 말했습니다.

“All history is contemporary.”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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