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경기지 장생포의 애환
포경기지 장생포의 애환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 소설가
  • 승인 2014.09.30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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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 소설가
죽은 고래와의 조우

“전 훈련생, 갑판집합!”

이른 아침, 선내에 울려 퍼진 집합구령에 해군사병 이상으로 훈련된 우리들은 한달음에 갑판으로 내달렸다. 뭔가 예사롭지 않은 일이 발생한 게 틀림없었다.

과연 갑판 분위기는 평소와 확연히 달랐다. 속력을 떨어뜨린 배는 미속(微速)으로 전진하고 있었고, 브리지 앞 상갑판에는 선장을 비롯한 항해사관들이 일제히 광활한 바다 한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무슨 일인가 하고 뱃전 너머로 상체를 꺾어 전방을 살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불과 반마일 거리의 잔잔한 수면 위로 무언가 시커먼 물체가 한 뼘 높이로 떠 있지 않은가.

“암초다!”
쌍안경에 눈을 박고 있던 박(朴) 1등항해사가 외쳤다.

그 말에 아직도 바다가 낯선 우리들은 혼비백산했다. 암초라면 주의가 소홀한 배를 얼마든지 쉽게 전복(顚覆)시킬 수 있는 고약한 장애물 아닌가. 하지만 그럴 위험은 없었다. 당직사관들이 진작 위험물을 발견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고 있었으니 말이었다. 하지만 찬란한 아침 해가 솟아 오른 때여서 대비가 가능했지, 일출(日出) 전이었다면 무슨 횡액을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해도(海圖) 어디에도 섬이나 암초가 없는데…….”
재일교포 출신 기다가와(北川) 어로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면 저 무시무시한 장애물은 과연 무어란 말인가.

“고래야! 죽은 고래야!”
그렇게 소리친 것은 눈썰미가 좋은 해군중령 출신 김(金) 선장이었다.

“엔진 스톱!”
이제 배는 문제의 고래를 우현 뱃전에다 끼고 있었다. 고래는 몇 개의 주름살이 깊이 파인 복부(腹部)를 위로 한 채 뒤집어져 있었다. 그 순간 선장은 주인도 없이 표류하는 고래로부터 약간의 살점을 채취한다면 그것으로 전 승선원의 한 끼 식단으로 충분하리라는 판단을 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상어닷!”
누군가가 소리쳤다.

고래 주위로 몇 마리 상어가 빙빙 돌고 있었고, 벌써부터 공격이 이어진 듯 고래 허구리 한쪽이 거덜 난 가운데 하얀 살점이 산호처럼 물속에서 일렁거리고 있었다.

“저 상어새끼가!”
어부들은 상어라면 본능적으로 적개심을 갖는다. 행여 조난이라도 당하면 가장 위협적인 존재가 바로 놈들이기 때문이다. 한 훈련생이 갈퀴가 달린 대나무 장대를 막 살점을 물어뜯으려는 상어 아가리 속으로 쿡 찔러 넣었다. 그러나 힘으로 치면 물속 상어가 한 수 위다. 순간 초식동물 목덜미를 문 악어처럼 상어가 한 바퀴 몸통을 굴리자 그 서슬에 갈퀴 자루를 쥔 훈련생이 물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다행히도 별탈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다음이 문제였다.

“어이쿠!”
모두들 코를 싸맸다. 상어의 몸부림으로 잔잔하던 수면이 뒤집어지면서 지금껏 물속에 잠겨있던 악취(惡臭)가 천지를 진동시킨 것이었다. 고래는 죽은 지 벌써 며칠이나 지났던 것이다.

“엔진, 풀 아헤드(전속전진)!”
우리들은 그로부터 한 시간도 더 도망치고 나서야 지옥의 악취로부터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1967년 9월 어느 날, 원양실습에 나선 훈련선 350톤급 ‘진달래’ 호가 남태평양 사모아로 향하던 적도 인근에서의 일이었다.

한 마리 밍크고래가 로또라니!

수년래 우리들은 공판장에 끌어올려진 한 마리 고래를 두고 ‘로또’ 어쩌고 하는 보도를 자주 접하고 있다. 정치망 그물에 걸려든 고래 한 마리로 어부는 엄청난 횡재(橫財)를 얻었다는 뜻이었다. 그 고래는 물론 국제포경위원회(IWC)의 규제 범위에서 벗어나 있었으므로, 아무 제재를 받지 않고 식용(食用)으로 조리되어도 문제가 없는 것이었다.

북구 아이슬란드와 이웃 일본을 비롯한 한반도 동해안 일대에서는 일찍부터 고래고기가 식용으로 활용되어 왔다. 그만큼 고래잡이는 선사시대 적부터 식량조달의 한 가지 방법이었다. 고래잡이에 관한 한 현대적 포획술을 갖지 못한 고대인들은 다만 방향감각을 잃고 연안 가까이 접근하거나 혹은 죽어 표착한 사체를 수습하는 방식으로 귀한 단백질 원(源)을 확보했던 것이다.

멜빌의 <백경>에 보면 1등항해사 스타벅이 첫 포획에 성공하자 요리사로 하여금 꼬리 쪽 살점으로 조리한 스테이크를 시식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걸 탐식(貪食)하면서 ‘이거야말로 열두 가지 맛을 내는 최고 요리’라고 극찬하고 있다. 그럼에도 당시 미국 포경선들은 식량조달이 목적이 아니라 각 가정을 밝힐 등잔불 기름의 확보였다. 아직 석유나 가스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은 때여서 고래에서 짜낸 경유(鯨油)가 유일한 기름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포경산업이야말로 초짜 선원일지라도 항해에서 살아 돌아오기만 하면 집 한 칸을 사고도 남을 만큼 많은 돈을 버는 매력적인 직업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개항(開港) 이전부터 지구 반대편의 미국 포경선들이 한반도 동해안 깊숙이까지 기웃거렸다는 기록을 우리는 본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가 그걸 증명하고 있다.

극성스러운 환경단체와 국제포경위원회(IWC)에 의해 1986년 상업포경이 금지된 지도 어언 28년이나 지났다. 멸종위기에 처한 고래보호가 그 이유였다. 그럼에도 아이슬란드는 전통적으로 식용해 왔다는 이유로, 이웃 일본은 ‘과학적 연구가 목적’이라는 해괴한 주장을 내세워 고래잡이를 계속해 왔다.

그 효과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한반도 주변에서 수시로 고래가 정치망 그물에 걸려들 만큼 개체수가 증가한 게 그 증거다. 하지만 음지가 있으면 양지도 있는 법. 고래 개체수가 증가하자 어민들의 주 어획 대상인 멸치나 정어리 내지는 오징어 떼가 몽땅 자취를 감추고 있으니 말이다.

그간 고래잡이 본거지이던 장생포 항은 때문에 고유의 기능을 잃고 당시 1만 5천 명이던 인구가 불과 1천 명으로 감소하는 직격탄을 맞았다. 어쨌건 고래잡이로 번영을 구가하던 한 포구가 한순간 쇄락한 것은 실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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