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 이준후 시인/산업은행 부장
  • 승인 2014.09.01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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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臣戰船 尙有十二

▲ 이준후 시인/산업은행 부장
영화 ‘명량’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잘 만든 영화라기보다는 이순신장군의 인기에 의존하고 있다는 비평도 있습니다. 칠천량 패전 후 수군을 폐지하라는 선조의 권고에 장군은 ‘今臣戰船 尙有十二’(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라고 진언합니다. 영화의 인기몰이 후풍으로 장군의 이 명언이 패러디돼 유행하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아직 12kg의 지방이 남아있습니다.”(모 헬스클럽) 등등.

2005년 부산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공사현장에서 대규모 유골이 발견됐습니다. 조사결과 유골의 대부분이 여성과 어린아이의 것이었습니다. 원래 이곳은 동래읍성이 있던 자리였습니다. 동래성은 임진왜란 당시 첫 전투가 있었던 곳으로 동래부사 송상현은 이틀간 치열한 전투 끝에 전사하고 성은 함락됐습니다. 반나절의 전투동안 일본군의 전사자는 백여 명, 조선인 사상자는 약 5천명이라고 왜군와 함께 왔던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적고 있습니다. 당시 왜장 고니시를 따라 왔던 승려 덴게이(天荊)는 이 날의 동래성에서 ‘목을 벤 게 3천여, 포로가 5백여 명’이라고 기록했습니다.

1592년 4월 13일, 왜군은 부산에 상륙해 동래성과 부산성 전투로 이틀을 보낸 후 한양으로 진격합니다. 신립장군의 전사소식에 피난을 결정한 선조는 4월 40일 새벽 2시경 도성을 빠져나갑니다. 이틀 후인 왜군은 한양에 입성합니다. 그동안 전투다운 전투는 신립장군이 이끌었던 탄금대 전투가 유일했습니다. 부산에서 한양까지 약 450km, 무장한 병사가 보름 동안에 걸어왔으니 매일 10시간씩 전투 없이 무인지경으로 걷기만 했다고 하겠습니다.

선조는 개성·평양·영변을 거쳐 6월 22일 평안도 의주에 도착했습니다. 이미 평양에서 왕자인 광해에게 분조를 내준 뒤, 국경에 도착한 선조는 명나라로 망명을 시도했습니다.

선조의 망명의사를 접한 명나라는 난감해졌습니다. 조선의 국왕을 받아들이면 이는 명나라와 왜국과의 전쟁을 의미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망명을 거절할 수도 없습니다. 만약 조선의 국왕이 잡히거나 전사하면 왜국이 조선을 완전 점령하게 되고 왜국이 조선인을 징발해 명나라로 쳐들어 올 것이 우려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조실록>에 따르면 6월 26일 선조는 명나라에서 조선왕을 푸대접할 것으로 보인다는 소식이 전달된 뒤 망명 계획을 포기하고 맙니다. 명나라는 선조가 망명할 경우에 요동의 군사기지인 ‘관전보’에 머무르게 할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이곳은 명나라와 여진족과의 경계지역으로 매우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신하들의 만류 또한 강경하고 처절했습니다.

▲ 영화 '명량' 포스터
류성룡은 선조를 향해 말했습니다. “전하께서 이곳으로 피난 오신 것은 명의 구원병을 기다렸다가 나라를 수복하기 위함입니다. 만약 임금께서 이 땅을 버리시고 가신다면 더 이상 이 나라는 없을 것입니다.”
대형 사고에는 반드시 전조(前兆)가 있습니다. 한 번의 큰 재난이 발생하기 전에 29번의 작은 사고가 있어나고, 그에 앞서 300번의 사소한 전조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1대 29대 300으로 알려진 ‘하인리히 법칙’이 그것입니다.

사실 임진왜란을 막을 수 있던 기회는 있었습니다. 전쟁 2년전 1590년 선조는 통신사를 파견해 일본의 동태를 파악하도록 했습니다. 도요토미를 만나고 돌아온 정사(正使)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을 준비하고 있어 멀지 않아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라고 보고한 반면, 부사(副使)인 김성일은 침입할 조짐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보고했습니다. 안일한 대신들은 김성일 쪽으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일본사신이 와서 “1년 후에 조선의 길을 빌려서 명나라를 칠 것(假道入明)”이라고 말하자 놀라서 경상도·전라도 연안의 여러 성을 수축하고 각 진영의 무기를 정비하는 등 대비책을 마련하고자 했으나 곧 흐지부지 됐습니다. 율곡 이이가 10만양병설을 제안했으나 선조는 재정을 낭비할 수 없다며 구체적인 방안을 계획하지 않고 묵살했습니다. 대마도주가 와서 조총을 건네주며 일본의 전쟁준비 상황을 알려주었으나 이 또한 무시했습니다.

영화 ‘명량’은 이순신이 백의종군 중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칠천량 패전으로 조선수군은 유명무실한 상태, 초라한 ‘해군사령관’은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면서 병사를 다시 모읍니다. 처음 9명의 군관밖에 없었으나 장군이 지나가는 고을마다 군사가 늘어납니다.

백성들의 호응도 뜨거웠습니다. 이순신은 “관리와 백성이 눈물을 흘리며 인사했다. (중략) 늙은이들이 길가에 늘어서서 다투어 술병을 바치는데 받지 않으면 울면서 강제로 권했다.”고‘난중일기’에 적고 있습니다.

영화에서 보듯이 피란민들은 명량까지 따라왔습니다. 보통 피란민들이란 전쟁터에서 멀리 도망가기 마련인데 반대로 전쟁의 한가운데로 몰려든 것입니다. 이순신은 그 존재만으로 백성들의 구심점이 됐던 것입니다.

‘자공’이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가 이렇게 말합니다.‘民無信不立’(백성의 믿음이 없으면 어느 것도 바로 설 수 없다). 전시에도 신뢰야말로 가장 큰 무기인 것이겠지요. 이 무기를 가지고 싸웠으니 장군이 23전 23승을 했던 것이겠습니다.

이번 주말 벌초 길에 아산 현충사에 들렀다 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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