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최환 부장검사를 기다리며
제2의 최환 부장검사를 기다리며
  • 박종면 기자
  • 승인 2014.07.29 19: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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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세월호 참사 100일이 훌쩍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실종자 수색에 진척이 없다. 유가족과 시민들은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국회, 광화문, 안산, 그리고 전국을 오가며 시위를 하고 있다. 이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진실규명이라고 한다. 사고의 진상을 밝혀내고 다시는 그런 일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다. 국정조사도, 검찰수사도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온갖 추측과 이른바 설(說)이 난무한다.

간절히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전모를 밝혔다는 최환(崔桓) 당시 서울지검 공안2부장검사다. 최 부장검사는 그 해 1월 14일 밤 8시쯤, 당직사령으로 근무 중 경찰의 방문을 받았다. 바로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소속 경위와 경사가 그들이었다. 그들은 최 부장검사에게 ‘변사자 처리에 관한 지휘 보고서’를 내밀고 결재를 요구했다. 두 경찰관은 전후 설명도 없이 사체를 처리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애타게 요청했다. 박종철이라는 대학생의 사체를 화장(火葬)하겠다는 뜻이었다.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는 데 어떻게 사인을 한단 말이오?” 최 부장검사는 한 시간여 동안 떼를 쓰던 두 경찰관을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당직검사였던 안상수(현 창원시장)을 불러 검안의와 함께 박종철의 시신이 안치돼있던 한양대병원 영안실로 보냈다. 그는 ‘자살이 아니다’라는 의견을 전달받고 국과수에 부검을 의뢰해 정확한 사인(死因)을 밝힐 것을 지시했던 것이다. 여기서부터 6월 항쟁은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검을 실시함으로써 경찰이 묻어두고 싶었던 고문 사실을 밝혀낼 수 있었던 것이다.

진보 논객으로 대표되는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교수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밝힌 주역은 안상수가 아닌 최환”이라며 “경찰의 사건은폐를 막은 주역은 최환 검사다”라고 밝힌 적이 있다. 조 교수는 “80년대 학생시절 나는 공안검사 최환을 ‘나쁜 놈’이라고 생각했다. 최환은 수많은 공안사건을 수사 기소한 골수 공안검사로, 나는 그 사건을 잊지도 용납하지도 않고 있다. 다만 최환은 다른 공안검사와 달리 박종철의 죽음을 은폐하려고 하지 않고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만약 그날 그 시각 최 부장검사가 ‘원칙대로’ 처리하지 않고 대공요원들의 요구에 응했다면 물고문으로 억울한 죽임을 당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세상에 드러나지도, 6월 항쟁이라는 민주화 불씨도 타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군사독재시대에 크나큰 내외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양심과 소신을 지킨 공안검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는 뒤에 5·18 특별수사 본부장을 맡아서 전두환, 노태우 전직 대통령 뇌물사건 수사를 지휘하기도 했다.

세월호 침몰사고의 전모를 속 시원히 밝혀줄 제2의 최환 부장검사가 나오길 학수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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