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양 개척사> 제1부 한국 원양어업 개척사 ③
<오대양 개척사> 제1부 한국 원양어업 개척사 ③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 승인 2009.06.03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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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작가 천금성의 기획다큐멘터리


  08 

 거대하면서 괴상하게 생긴 물고기 한 마리를 겨우겨우 갑판으로 끌어올린 지남 호 어부들은 한참 동안 어찌할 바를 몰랐다. 요새라면 촌각을 다투어 먼저 물고기 주둥이 끝에 매달린 기다란 뿔부터 톱으로 썰어낸 다음 내장을 끄집어내고 해수로 깨끗이 씻어서는 한시라도 빨리 급냉실에 안치하는 게 옳은 수순이지만, 난생 처음 보는 낯선 고기인데다 이름조차 모르니 도대체 손을 댈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기 우리가 잡으러 온 투너가 맞나요?” 

 전남 여천 출신인 해무청 어로과장 남상규 단장이 두 선장을 차례로 돌아보며 물었다. 오랫동안 어업지도선인 ‘조풍’ 호 선장을 지낸 수산시험장 소속 이제호 어로과장과 수협중앙회 소속 지도선 ‘YMS 200’ 호 선장을 거쳐 지금 이 시각에는 지남 호의 운항을 책임지고 있는 윤정구 선장이었다.

 일제 때부터 수산계 교육기관으로는 국내 최고의 권위와 전통을 자랑해 온 부산수산대 어로학과를 나온 두 선장은 지금까지 연안 고기잡이배를 대상으로 어장형성의 추이나 어로작업의 요령 등을 지도해 온 최고의 권위자들인 만큼 비록 난생 처음 보는 괴상한 물고기지만 적어도 말만은 들어보지 않았겠느냐는 게 남 단장의 기대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글쎄요.” 

 까막눈이기는 두 선장 모두 마찬가지였다. 한국 수산업사에서 새 개척의 장을 열겠다는 원대한 포부로 ‘투너 연승조업 시험조사’라는 거창한 구호를 앞세우고 부산항을 출항한 이래 그 동안 단 한 마리의 원양 회유성 물고기를 구경조차 하지 못해 무던히도 애를 태웠는데 정작 바라고 바라던 소망의 물고기가 한 마리 잡혀 올라왔는데도 그 이름조차 모르는 판이니 두 선장은 참으로 난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연근해에서는 이런 고기가 없지요?”
  남 단장이 다시 물었다.
  “한 번도 본 적 없습니다.”
  이 과장이 대답했다. 그 대목만큼은 아주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허허, 고것 참. 어쨌거나 고기는 틀림없으니 우선 어창에 집어넣도록 하십시다.”
  남 단장이 결단을 내렸다.
  “이놈의 뿔은 어떡합니까?”
  장갑 낀 손으로 한참 쓰다듬어보고 난 갑판장이 물었다. 1m 길이의 끝이 뾰족한 그 뿔은 표면으로 모래알 같은 까칠까칠한 돌기(突起)가 무수히 돋아나 있는데다가 단단하기가 이를 데 없어 마치 코끼리의 상아나 코뿔소의 뿔처럼 창날에 진배없었다. 미국인 어부들이 ‘Marline’이라 부르는 그 물고기의 주둥이뿔은 다른 물고기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윗턱이 변형된 것으로, 마알린은 그것으로 포악한 상어와도 결투를 벌일 만큼 매우 유용한 공격용 무기인 것이었다. 

  “이거 너무 단단해서 먹지는 못 하겠는데요.”
  갑판장의 말에 남 단장도 손끝으로 가만히 만져 보았다.
  “그렇군. 그렇다면 아예 잘라버리지 뭐.”
  그렇게 하여 선원들은 주둥이 뿔만 잘라낸 다음 배도 가르지 않은 채 통째 냉동실에 집어넣고 만 것이었다. 그래서 나중 경무대로 보내어져 ‘지남 호가 인도양에서 잡은 한국 최초의 원양 물고기’라는 설명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이 찍은 사진에서 그 물고기의 괴이한 주둥이뿔이 사라지고 만 것이었다(본지 4월호에 실린 연재 1회분 사진 참조). 

 그 날 지남 호 선원들은 모처럼 선상에서 한 바탕 자축 파티를 열었다. 아끼고 아끼던 막소주 병마개도 네댓 병이나 땄고, 안주로는 연안 상어주낙배를 탄 선원 하나가 어획물 가운데 섞여 올라온 가오리 한 마리를 정성껏 다듬어 싱싱한 회를 마련했던 것이다. 

 감격에 겨운 남 단장은 즉시 통신장에게 고국에다 다음과 같은 내용의 무전을 타전하도록 했다.
  - 본선 인도양 안다만 해에서 실시한 시험조업의 결과 도합 0.5톤의 어획을 기록하였음. 앞으로도 심기일전하여 좋은 결과를 거양토록 최선을 다하겠음.
  전문을 받아든 제동산업 심상준 사장은 실로 오랜만에 환희의 기쁨을 맛보았다. 배를 내보내고 무려 47일이나 지나, 그것도 열두 번째로 맞은 감격의 8?15 광복절에 드디어 고대하고 고대하던 희소식이 날아들었으니 말이었다. 

 옛말에도 ‘첫술에 배부르랴’라는 말이 있어 왔다. 비록 0.5톤이라는 미미한 어획량이지만, 그 고귀한 체험을 발판으로 앞으로는 얼마든지 더 좋은 성과를 올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이 심 사장에게는 싹터 올랐던 것이다. 

 다음 날부터 지남 호는 안다만 해 니코바르 섬 주변의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열심히 주낙을 깔고 또 거둬 올렸다. 그러나 어획량은 좀체로 증가하지 않았다. 하루의 조업을 끝내고 집계를 해보면 기껏 0.5톤에서 1톤이 고작이었으니 그 상황에서 뱃짐을 채우는 일은 난감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당초 지남 호는 두 달의 시험조업을 통해 모두 220톤의 어획을 올려 15만 달러의 판매고를 올리는 것으로 목표를 설정하고 있었다. 그 같은 목표치 책정은 순전히 미국 참치선에서 선장을 한 기술고문 모르건 씨의 견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는데, 그 같은 목표치는 어로방법이나 기술이 첨단화되고 과학화된 오늘 날에 와서도 쉽게 달성하기 어려운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출어기간 두 달에서 어장왕복에 소요되는 항해일수 한 달을 빼면 조업 가능한 날짜라야 겨우 30일 남짓인데, 모르건 씨가 장담한 200여 톤 이상의 어획량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매일 7톤 이상씩 고기를 잡아 올려야 한다는 계산이니 말이었다. 어로 방식만 하더라도 단 한 방에 몇 백 톤씩의 어획을 달성하는 현대식 ‘선망선(旋網船)’도 아닌, 가장 원시적인 주낙 방식으로 그 같은 목표치를 설정한 것은 아무래도 모르건 씨 혼자만의 과욕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더욱 15만 달러라는 어획고도 마찬가지여서, 가령 200톤 어획물 모두가 당시로는 가장 고가 어종인 날개다랑어(영어명 Albacore)라 쳐서, 당시 최고 판매가인 톤당 4~500달러를 적용하더라도 10만 달러에도 미치지 못 하는 전혀 성취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참으로 기가 팔 일이던 것이다. 더욱 그곳 안다만 해역이라면 날개다랑어 어종은 단 한 마리도 구경할 수 없고, 다만 방금 잡아 올린 마알린 류나 잡어가 고작이었으니 하는 모르건 씨의 장담이 얼마나 허풍이었는가를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날개다랑어는 사모아 인근 해역에서부터 인도양이나 대서양의 남위 35도 이하의 고위도 해역에만 회유한다) 그럼에도 오늘 날까지 그 누구도 모르건 씨를 나무라지 않는 것은 그의 ‘허풍’이 한국의 수산업이 있게 한 단초(端初)이자 원동력(原動力)이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심 사장은 낙담하지 않았다. 개척자는 언제나 외롭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남보다 앞선 개척자만의 자기희생이 없었다면 결코 인류의 발전이나 번영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목표는 오로지 남태평양의 사모아로 배를 출어시키는 일이었다. 그 원대한 야망과 목표 달성을 위해 지금 지남 호는 오로지 개척자적 정신과 각오로 미지의 세계인 바다로 달려 나간 게 아니던가!


 

  09 

 아무런 데이터도 없이, 난생 처음 들어선 안다만 해에서 지남 호는 그로부터 8월의 마지막 날인 31일까지 꼬박 보름 동안 조업을 계속했다. 어획량은 첫날 그대로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았다. 그렇게 지남 호는 모두 20톤가량의 어획량을 달성했다. (그 어획물에서 잡어를 빼고 미국 수출이 가능한 투너와 마알린 어종은 채 5톤도 되지 않았다) 

 당초 부산을 출항할 때의 계획대로라면 그 시각 지남 호는 모항인 부산항으로 돌아와 있어야 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남 단장을 비롯한 27명으로 이루어진 시험조업단은 한사코 몇 마리의 고기라도 더 잡아 보란 듯이 귀국길에 오를 작정이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당시의 심경을 윤정구 선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참으로 외롭고 고통스러운 항해의 나날이었습니다. 당초 지남 호는 남지나해나 서부 태평양을 어장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단 한 마리의 투너도 회유하지 않아 우리는 부득이 남지나해를 거쳐 인도양 어귀인 안다만 해까지 진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바람에 부산항으로 귀국하는 날짜도 길어졌습니다. 우리들은 시험조업의 성공도 중요하지만, 한 마리의 고기라도 더 잡아 기대에 찬 국민에게 보답할 생각이었습니다.……” 

 나중 한국 수산업 역사에서 ‘최초의 원양어선 선장’으로 기록된 윤 선장의 눈물겨운 회고담이었다.
  윤 선장의 그 같은 비장한 각오였던 만큼 여건이 허락하는 한 지남 호는 얼마든지 더 인도양을 치훑으며 조업을 계속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돌발변수가 발생했다. 식수(食水)가 떨어져 당장 밥 지을 물도 모자란다는 보고가 올라온 것이었다. 요즈음 같으면 하루에 5톤가량의 청수(淸水)를 만들어내는 조수기(造水機)라는 기계가 있어서 얼마든지 오랫동안 바다에서 버텨낼 수 있지만, 당시에는 그런 기계가 없었기 때문에 부득불 다시 항구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윤 선장은 우선의 방책으로 모든 선원에게 식수를 아낄 것을 신신당부하였지만 그것으로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않았다. 

 결국 지남 호는 조업을 중단하고 싱가포르로 회항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으로 지남 호의 역사적인 시험조업은 마무리되고 말았다.
  싱가포르에서 식수와 연료유를 보충한 지남 호는 드디어 귀국 길에 올랐는데, 중도에 엔진이 말썽을 부리곤 하여 부산항 제 1부두에 닻을 내린 것은 그로부터 한 달도 더 지난 10월 3일(하필이면 그 날은 개천절이었다)의 일이었다. 6월 29일 부산을 떠났으니 지남 호는 그 동안 꼬박 97일 동안이나 남지나해에서부터 인도양 어귀인 안다만 해까지의 동남아 해역을 고립무원으로 떠돌아다녔던 것이다.
  “정말 수고들 했소.” 

 심상준 사장은 참으로 감격스러웠다. 어쨌거나 난생 처음으로 원양조업에 나선 지남 호가 그 동안 단 한 사람의 인명 손실도 없이 전원 무사 귀국한 게 너무도 고마웠던 것이다.
  이제 신 사장이 할 일이란 그 시험조업의 성과를 토대로 지남 호를 만리창파인 남태평양으로 당당하게 출어시키는 일이었다. 심 사장은 그 한 가지 목표 달성을 위해 지난 6년 동안 일편단심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었다.


 

  10 

 지남 호의 귀항은 경무대에도 전해졌다. 싱가포르에서 발간되는 영자신문(英字新聞)의 보도에 의해서였다. 식수와 연료를 보충하기 위해 기항한 지남 호의 시험조업 성과를 그 신문은 사진과 함께 아주 자세하게 보도하였고, 그 신문을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읽었던 것이다.

 하지만 국내의 여러 신문들은 지남 호의 출항 때와는 달리, 귀국하였을 때는 그 사실을 보도하지 못 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 대통령은 지남 호가 귀국한 이틀 후인 10월 5일, 자신이 ‘남쪽 바다로 나아가 고기를 많이 잡아오라는 뜻’에서 명명(命名)한 배가 사상 최초로 투너를 잡아왔다는 사실에 너무도 감격한 나머지 박찬일(朴贊一) 비서관에게 관계자들을 경무대로 초청하라고 지시했다. 그 지시는 곧 상공부 지철근(池鐵根) 수산국장을 거쳐 선주에게로 전해졌는데, 심 사장은 그 기회에 지남 호가 잡아온 투너 가운데 가장 큰놈 한 마리 갖고 들어가기로 작정했다. 그는 이 대통령이 미국 생활을 오래 한 만큼 진작부터 ‘바다의 닭고기(The Chicken of the Sea)’라는 별칭의 투너에 대해 익히 들었을 것으로 확신하고, 하지만 직접 ‘생고기’는 구경하지 못하였을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심 사장은 곧 부산의 윤 선장에게 전화를 걸어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윤 선장, 당신이 잡아온 투너를 대통령께 보여드리고 싶으니 그 중 큰놈 한 마리를 골라 비행기 편으로 올려 보내도록 하소.”
  “알겠습니다.”
  당시 국내에는 민간 항공사인 KNA(지금의 KAL 전신)가 서울과 부산을 왕복하는 프로펠러 단발기 몇 대를 운행하고 있었는데, 윤 선장은 그 비행기 편으로 안다만 해에서 잡은 ‘마알린’ 한 마리를 여의도 비행장으로 항송(航送)하였고, 심 사장은 그 고기를 다시 냉동차에 싣고 경무대로 들어가는 일대 릴레이 수송작업을 벌였던 것이다. 그렇게 하여 투너가 실린 냉동차가 경무대로 들어간 것은 지남 호가 귀국한 사흘 후인 10월 6일 오후의 일이었다. 

 ‘우리 한국인 어부들이 사상 최초로 잡은 투너’를 앞세워 심 사장이 경무대로 들어왔다는 말을 들은 이 대통령은 뜰로 나와 실로 감격스럽기 그지없는 그 물고기를 직접 손으로 만져보았다.
  “이거 정말 대단하구먼.”
  대통령은 연신 감탄을 쏟아낸 다음 심 사장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래, 이 투너(사실은 마알린)를 자네가 잡았단 말이지?”
  “네, 각하.”
  고기를 잡은 사람이야 남 단장과 윤 선장을 비롯한 어부들이지만, 그 배의 소유자가 심 사장인 만큼 선주가 잡았다고 해도 하나도 틀리는 말이 아니었다.
  “그래, 아주 큰일을 했구먼. 그런데 이번에 잡은 물고기를 모두 미국에 수출한다고?”
  “네, 그렇습니다, 각하!”
  “그래, 이건 너무 놀라운 일이야. 이역만리 모진 창파를 헤치며 우리 손으로 이 귀한 물고기를 잡아낸 것도 대단하지만, 이를 팔아 외화를 획득하게 된다니 그게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자네야말로 애국자일세.”
  이 대통령의 칭찬을 끝이 없었다. 해방을 맞으면서 신생국으로 거듭나자마자 6?25라는 전쟁이 터졌고, 그 전화(戰禍)로 나라꼴이 극도로 황폐해진 상황에서 애국의 길은 단 한 푼이라도 외화를 벌어들이는 게 가장 시급한 국가적 현안이던 시절의 일이었다. 당시 국민소득이 겨우 100달러 내외였다던가. 그리고 아직까지 수출이라는 명목으로 무엇 하나 외국으로 팔아본 적 없는 나라였으니, 대통령이 감격에 겨워한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아이구, 잘 했다! 너무 너무 잘 했다!”
  거듭 칭찬을 아끼지 않은 대통령은 “그런데 듣기로는 이웃 일본이 일찍부터 남태평양에서 투너를 잡아 왔다지? 왜놈들은 원래부터 시샘도 많고, 또 경쟁자가 나온다는 옹졸한 생각에서 틀림없이 훼방을 놓을 게 틀림없으니 우리 고기잡이 수준이 웬만큼 궤도에 올라설 때까지는 외부에 너무 알리지 않는 게 좋겠네. 그렇지 않은가?”라는 세심한 당부까지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각하,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통령의 분부를 들은 심 사장은 내심 놀랐다. 왜냐하면 일본을 겨냥하여 너무 소문나지 않게 하라는 대통령의 우려와 당부는 하나도 틀리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후 일본의 방해공작이 치밀하게 전개되면서 지남 호의 남태평양 입어는 다시금 큰 난관과 시련에 봉착하게 되었으니 말이었다. 개척자적인 지남 호의 귀국 동정이 보도되지 않은 것은 그 같은 이유에서였던 것이다.
  “이봐 심 사장, 내가 친구들에게 조금씩 나누어주고 싶은데 이 투너를 나에게 줄 수 없겠나? 이봐요, 바로 이 물고기가 우리 어부들 손으로 잡은 투너란 말이요, 이렇게 자랑하고 싶어서야.”
  배석한 각료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한 다음 대통령이 한 말이었다.
  “아이구, 이건 각하께 드리려고 갖고 온 것입니다.”
  “그래? 정말 고맙네.”
  대통령은 그렇게 인자하였다. 

 당시 투너를 앞세운 심 사장의 경무대 방문이 국가적으로도 얼마나 큰 관심사였는가 하는 것은 그 날 배석한 인사들의 면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김현철(金顯哲) 재무장관, 송인상(宋仁相) 부흥부장관 등 여러 관계 장관과 다우링 주한미국대사와 UN경제조정위원회의 워머 조정관 등 외국인사들이 두루 참석하였다고 1990년 발간된 《한국원양어업 30년사》는 기록하고 있으니 말이다.


 

  11 

  여기에서 우리는 당시 미국 통조림제조공장과 소비자들 사이에서 통용되던 ‘Tuna’라는 물고기가 어떻게 하여 오늘 날처럼 ‘참치’라는 명칭으로 통용되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그 경위를 알아보는 것도 무미한 일은 아닐 것이다. 

 지남 호가 잡아온 투너에 대해 대통령이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이 입소문으로 크게 번져나가자 관계 부처와 학계에서는 당장 이 귀한 물고기에다 그럴 듯한 우리식 명칭부터 붙여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우리 어부들이 잡아낸 물고기 모두가 그럴 듯한 이름을 갖고 있는데, 몸집 크기만큼이나 값도 비싸며 사랑스럽고 아름답기까지 한 만어지중(萬魚之中)의 최고 물고기가 우리 이름을 갖고 있지 않아서야 말이 되느냐는 게 당시의 화두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상공부 수산국 직원들이 당시 부산수산대 학장이던 정문기(鄭文基) 박사에게 그 명칭이 있는지의 여부를 물었고, 만약 없다면 이참에 아주 멋들어진 이름을 작명(作名)을 해줄 것을 의뢰했다. 일찍이 도쿄대 수산학과를 졸업하고 나중 학술원 원로회원을 역임한 정 박사는 《조선어명보(朝鮮魚名譜)》 《어류박물지(魚類博物誌)》 《한국어도보(韓國魚圖譜)》 등의 명저를 냈을 만큼 어류학(魚類學) 분야에서는 단연 최고의 권위자였는데, 모든 어류도감을 뒤져 보았으나 미국인들은 ‘투너’라 부르고, 스페인 등 라틴계에서는 ‘아뚠(Atun)’으로, 그리고 이웃 일본에서는 ‘마구로(まぐろ)’라 부르는 이외에 어디에도 한국식 명칭이 없음을 확인하고 자신이 스스로 ‘다랑어’라 이름 붙였다.

 정 박사가 다랑어라고 작명한 것은 경무대에서 찍힌 문제의 마알린 사진을 찬찬히 살펴보니 몸체 양쪽 옆구리로 몇 가닥의 가로줄 무늬가 뚜렷이 새겨져 있는지라 그 모양새가 마치 비탈진 산골짜기의 좁고 작은 논배미인 ‘다랑논’과 비슷하여 그 명칭에서 ‘논’을 빼는 대신 꽁치?갈치?멸치 등 대부분 물고기에 붙여지고 있는 접미어(接尾語)인 ‘치’를 갖다 붙여 ‘다랑치’라 불러 보았으나 아무래도 경박하게 들리기만 하여 다시금 고기 어(魚) 자로 바꾸어 ‘다랑어’로 명명한 게 오늘 날까지 학문적인 명칭으로 등재되기에 이른 것이었다. 

 하지만 학문적이나 사전적 명칭은 그렇다 치더라도 업계(業界)에서는 다랑어라는 명칭이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렇게 하여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이름을 찾아 나섰는데, 어느 누구가 ‘이 고기야말로 가장 고귀하고 값비싼 진짜 물고기에 틀림없다’는 확신 아래 ‘진짜 물고기’에서 ‘진(眞)’ 자를 취해 ‘진치’라 불러보았으나 그 역시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아 그렇다면 ‘진’의 뜻글자인 ‘참’으로 바꾸어 보았더니 발음(發音)이나 어감(語感) 상으로 더할 나위 없었으므로 그 이후부터 정 박사의 다랑어를 젖혀내고 ‘참치’로 통일되어 오늘 보는 것처럼 만인통용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명칭으로 굳어지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참치’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나선 사람은 허다한 반면 정작 어느 분이 작명하였는지가 미궁(迷宮)으로 빠져 있어 아쉽기 그지없다.


 

  12 

 다시 심 사장의 고군분투가 시작되었다. 당초 미국 통조림회사 반 캠프가 요구한 대로 제동산업이 실제로 ‘참치’를 잡았고, 이제는 이 어획물을 미국으로 수출하는 실적(實績)만 내보이면 모든 게 다 해결되게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10월 중순 총 20여 톤 가운데 잡어를 뺀 5톤 가량의 통조림 원료인 참치 류만 골라내어 노스웨스트 화물기 편으로 미국으로 보냈다. 그게 비로소 한국 수산계가 손수 잡은 물고기를 외국으로 수출한 사상 최초의 기록인 것이었다.

 같은 비행기 편으로 미국으로 날아간 심 사장은 캘리포니아 주 롱비치에 있는 반 캠프 본사를 방문, 엘링턴 부사장을 만났다.
  “어서 오십시오.”
  고마운 엘링턴 부사장은 심 사장을 반갑게 맞았다. 그리고 항공편으로 운송되어 온 어획물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지난 30여 년 동안 일선 참치선에서 선장을 역임한 엘링턴 부사장은 첫눈에도 어획물의 선도(鮮度)가 통조림 원료로 적합하지 않음을 알았다. 냉동처리도 시원치 않은데다가 비행기로 운송되는 동안 적정온도가 유지되지 않아 육질이 많이 상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엘링턴 부사장은 아무런 이의를 달지 않고(어획물은 나중에 파기되었다) 구매를 승인하여 확인서를 떼어줌으로써 제동산업의 첫 대미수출 실적을 성사시켜 주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심 사장은 몇 번이나 감사를 표시했다. 심 사장이 그처럼 고마워 한 것은 그것으로 평생토록 소망하던 남태평양 진출이 이루어진 것은 물론, 제동산업은 단순히 배와 선원만을 투입하는 반면 어구나 연료유 구입 등의 출어자금은 나중 고기를 잡아 상계(相計)하는 조건으로 반 캠프 사가 전액 지원한다는 계약상의 이점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여 양사 사이에 입어계약(入漁契約)이 체결되었는데, 제동산업은 향후 2년 이내에 어선을 모두 11척으로 증강 투입시켜 연간 9,000M/T의 어획물을 판매한다는 게 그 핵심 내용이었다. 그 총 판매액은 얼마인가. 톤당 500달러로 치더라도 4백50만 달러에 이르는 엄청난 돈이 아닌가. 그 엄청난 돈이 매년 한국은행으로 꼬박꼬박 입금된다는 이야기 아닌가. 계약서를 받아든 신 사장의 손이 떨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으로 한국 수산업은 비로소 원양어업 개척이라는 역사적 거보를 내딛게 되었다. 하지만 그 앞길에는 허다한 장애와 시련이 가로놓여 있었으니 반세기도 더 지난 오늘 날 우리들이 어떻게 그 눈물겨운 역사적 아픔을 간과할 수 있으랴.           <다음호에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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