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여수는 슬프다
10월 여수는 슬프다
  • 김준 박사
  • 승인 2021.11.16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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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여수시 신월동 포구
바지락밭이 좋은 갯벌
바지락밭이 좋은 갯벌

10월은 가을이 깊어가는 단풍의 계절이지만 여수사람들에게 10월은 슬픔이 깊은 계절이다. 1948년 10월에 여수와 순천 일대에서 발생한 ‘여수 순천 10·19사건’이 73년을 맞았다. 다행스럽게 금년에는 특별법이 제정되어 해원의 실마리를 찾았다. 그 중심인 신월동에서 본 가막만은 하늘과 바다를 구분하기 힘들다. 섬이 없었다면 하늘이 바다고 바다가 하늘이다. 신월동은 1948년 10월 19일 제주 4·3항쟁을 진압하라는 제주출병 명령을 거부하며 시작된 ‘여순사건’의 도화선이 되었던 14연대 병영이 있었던 곳이다.

신월동은 1940년대 총 239가구에 인구는 1,339명으로 여수에는 동정과 서정 그리고 봉산리에 이어 큰 마을이었다. 신근정, 생기미, 봉양, 넙노 등 자연마을이 있었다. 신월리라는 지명도 신근정의 ‘신’에 ‘넙노리’의 넘다는 한자 ‘월’에서 비롯했다고 한다. 지척에 새조개와 키조개와 바지락 등 패류의 집산지인 가막만이 있다. 애초에 구봉산 아래 평지에 마을이 있었는데 강제이주하면서 지금의 자리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일제강점기 이곳에 해군비행장을 만들기 위해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키면서 땅의 역사가 바뀌었다. 해방 후 해군수상비행장을 미군이 접수했고, 1948년 5월 국방경비대 광주 4연대에서 차출된 1개 대대병력 14연대를 창설하여 주둔했다. 그해 10월 19일, 제주 4.3항쟁을 진압하라는 출병명령에 지창수 상사 등이 거부하면서 신월동은 ‘여순사건’ 시발점이 되었다. 바닷가에는 일제강점기 비행장 흔적이 남아 있고, 넙너리와 비행장으로 연결하는 터널이 남아 있다.

일본 비행장이 있었던 자리
일본 비행장이 있었던 자리

 

새조개와 바지락과 피꼬막 등 패류의 집산지

처음 신월포구를 찾았던 것은 새조개 때문이었다. 잠수기 어선이 드나들며 새조개, 개조개, 피꼬막 등을 내려놓았다. 모두 가막만에서 채취한 것들이다. 가막만은 특히 새조개가 많이 서식하는 곳이다. 펄이 좋은 얕은 바다에 서식한다. 달콤하고 부드러워 초밥으로 많이 이용한다. <자산어보>에 참새가 변해 새조개가 된 것 아닐까 의심된다고 했다. 조갯살은 새 모양을 닮았고, 색깔도 비슷하다. 일제강점기에는 수탈의 대상이었다. 가막만 새조개가 오롯이 주민들의 몫이 된 것은 오래된 일이 아니다. 흔히 새조개를 두고 ‘로또 조개’라고 한다. 찾는 사람이 많고, 돈도 되다보니 힘과 돈이 있는 사람들이 어장을 차지했다. 이제 어민들이 주인노릇을 할 만하니 기후위기와 서식환경 변화로 어려움이 많다. 그래도 겨울철에는 어김없이 새조개가 뭍으로 올라온다. 그 집산지가 신월포구다. 선창에는 새조개를 수집해 유통하는 가게들이 있다. 물론 새조개 전문집들도 있다. 여수에서는 돼지고기와 키조개와 채소까지 곁들여 ‘새조개 삼합’으로 먹는다.

작은 바구니를 든 어머니가 노을이 쏟아지는 갯밭으로 내려섰다. 주섬주섬 파도에 밀려온 굴을 바구니에 담아 골목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다시 나와 집 뒤 언덕진 텃밭에서 갯바람을 피해 땅바닥에 납작 붙은 시금치 몇 뿌리와 파를 뽑아 내려왔다. 어린아이 둘이 골목길에서 나오더니 그 집으로 들어서며 ‘할머니’하고 부른다. 넙너리 노을 속 저녁풍경이다.

목섬 앞 바지락밭을 지키는 주민들
목섬 앞 바지락밭을 지키는 주민들

 

골목길을 걸었다. 아직도 옛날 흔적이 그대로 남은 좁은 골목길이다. 아침 물때에 갯밭에서 바지락을 캐다 온 어머니가 오르막길에 짐을 내려놓고 한숨을 돌린다. 여수시내에서 드물게 마을 앞이 바지락밭이다. 바닷가로 산책로가 만들어지면서 물이 많이 빠지는 날은 바지락 밭을 지키는 어머니들 모습도 볼 수 있다.

넙너리에서 호텔너머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를 ‘눈물고개’라 불렀다. 바람이 유난히 세서 고개를 넘을 때 너나 할 것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눈물고개란다. 지금도 그곳으로 넘어가는 길은 바람이 거칠다. 신월동 서쪽으로는 혼합갯벌이 발달해 바지락 밭이 좋고, 동쪽으로는 경도와 가쟁이와 불무섬을 사이에 두고 바람과 파도를 피할 수 있는 어촌이자 천혜의 어항이다.

넙너리에서 달동네로 이어지는 목섬 인근 갯가는 바지락어장으로 가난한 갯살림을 책임진 갯밭이다. ‘갯가길’이 만들어지고 산책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바지락 철이면 주민들이 돌아가며 어장을 지키는 불침번을 서고 있다. 겨울철이면 넙너리 포구 일대에 새조개가 제철이다. 국동항 잠수기조합에서 새조개 경매가 이루어지며 신월동 일대에서 도소매가 이루어진다. 인근에 새조개를 전문으로 내놓은 식당도 있다.

가막만 물바지락
가막만 물바지락
양식 시설을 갈무리하는 어민
양식 시설을 갈무리하는 어민

바닷가에 묻힌 기억과 기록

신월포구 위 구봉산 아래 아파트가 있는 곳이 14연대 병영지이며, 호텔 앞 바닷가 쪽은 해군비행장이 있던 곳이다. 그 사이에 골목과 언덕에는 철길 흔적과 터널이 남아 있다. 지난 10월 19일 여순 사건의 추모행사는 특별했다. ‘여순 10·19 사건 특별법’이 통과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반영하듯 추모식장에는 대통령의 조화가 놓였다. 공식적으로 73년 만에 추모행사가 진행되었다. 이웃 순천과 구례 지역에는 위령비가 일찌감치 세워졌지만 여수에는 제사를 지낼 곳도 없었다. 흔한 위령탑이나 추모비도 없었다. 그래서 10월이면 동가숙서가식해야 했다. 지금도 사정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가해자와 피해자, 군경과 민간인 등 유가족들이 지역사회에서 얽히고설켜 있고, 정부도 성격규명을 명확하게 하지 않는 탓이다. 여수와 제주는 근현대사에서 같은 뿌리를 가진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제주도처럼 여수도 말을 못하는 역사를 품고 있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마재터널을 지나 만성리로 가는 길에 세워진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다. 앞면에는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라고 새겼지만 뒷면에는 ‘1948년 10월 19일과 2009년 10월 19일’ 사이에 새겨진 ‘……’ 말줄임표가 전부다. 비문을 준비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그 내용을 가지고 양쪽을 오가며 조율하고 행정과 논의하다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새겨 넣은 것이 말줄임표다.

신월포구, 뒤 아파트 앞이 14연대 병영지
신월포구, 뒤 아파트 앞이 14연대 병영지

 

위령비에서 멀지 않는 곳에 ‘형제묘’가 있다. 마래봉에서 남해를 바라보며 내려온 산자락이다. 형제묘라 비석을 세운 것은 ‘시신을 찾을 길 없던 유족들이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함께 있으라’해서 붙인 이름이다. 제주 4.3유족의 ‘백조일손지묘’가 생각난다. 종산초등학교(현 중앙초등학교)에 시민들을 모아 놓고 부역자의 경중을 가렸다. 천일고무 고무신을 싣고 있는 것을 보고 반란군이 공장에서 약탈한 고무신을 신었다며 부역자로 분류되기도 했다. 그렇게 부역 혐의자를 가려 그중 125명을 마래봉으로 끌고 왔다. 그리고 5명씩 세워 총살한 후 5명씩 장작더미에 눕혀 5층으로 쌓은 5개 큰 더미에 기름을 부어 태웠다. 시신은 3일간 불에 탔고 그 냄새가 한 달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마래봉 위에서 이를 지켜본 이가 있었다. 일본유학까지 갔던 오빠를 찾아 헤매던 유족이었다. 행여 들킬세라 입을 틀어막고 오열했다. 형제묘가 알려진 배경이다. 형제묘라는 비석에 새긴 글씨도 그녀가 썼다. 더 아픈 이야기는 비석 옆면과 뒤면에 당시 희생자 명단을 새겼는데 대리석으로 덧씌워 이름을 감췄다는 것이다. 여순사건의 중심인물로 평가받아 후손들에게 피해가 미치는 것을 우려해서다. 피해자가 억울함을 감추어야 하는 우리 근현대사의 민낯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여순사건희생자 위령비
여순사건희생자 위령비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여순사건을 겪은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보고들은 노인들도 하나 둘 세상을 뜨거나 기억을 잃고 있다. 아직도 제대로 된 피해자의 기록도 없는 현실이다. 연구도 좋고, 정명도 필요하지만 기록이 없는 연구나 개념 논쟁은 모래성에 불과하다. 피해자에게는 진실을 말하는 것으로도 치유가 되기도 한다. 말줄임표로 대신한 그 말이 먼저 제대로 기록되어야 한다. 위령비 좌측에는 ‘여순사건 만성리 희생지’, 오른쪽에는 ‘만성리 학살지’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희생’과 ‘학살’의 간극이 70여 년째 평행선이다. 이번 특별법이 계기가 되어 아픔을 치유하는 해원이 시작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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