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시’에서 ‘전어’까지
‘서시’에서 ‘전어’까지
  • 김준 박사
  • 승인 2021.10.18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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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시 진월면 망덕리
섬진강변
섬진강변

[현대해양] 가을이 익어간다. 이 무렵 밥상에 가장 많이 오르는 생선은 ‘전어’다. 이번 추석명절에도 회, 구이, 무침 등 어느 것이든 맛을 보았을 것이다. 전어는 남해에서 서해에서 봄부터 가을까지 잡히는 바닷물고기이다. 남해에서는 통영, 사천, 광양, 여수에서 많이 잡힌다. 특히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는 전어잡이로 널리 알려진 어촌마을이다.

망덕리는 전라남도 광양시 진월면에 위치한 어촌이다.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데미샘에서 발원하여 순창, 남원, 곡성, 구례, 광양을 지나 닿는 곳이다. 마을 동쪽으로 망덕산이 있어 바다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조선지지자료>에는 진상면 외망리에 망덕포가 수록되어 있다. 외망리는 망덕산 동쪽 진월면 사무소와 작은 하천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마을이다. 근처에 선소가 있다. 임진왜란 당시 배를 만들었던 곳이다. <임진장초> 기록에는 1594년에는 전라좌수영 수사로 부임한 이순신이 순천도호부, 낙안군, 보성군, 광양현, 흥양현 등 다섯 고을에서 배를 지어 이곳을 지나 한산도로 향했다고 했다.

망덕산(197.3m)은 낮지만 백두대간 출발점이자 종착지이다. 망덕산은 왜적의 침입을 살피는 곳, 망을 보는 산이라는 의미이다. 주민들은 ‘망뎅이’라고 부른다. 망덕산이라는 명칭을 가진 산은 많다. 그 유래도 이곳과 비슷하다. 섬진강을 따라 구례, 곡성으로 가는 길목이며, 광양만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망덕리 앞 배알도 인근에는 전어가 많이 잡힌다. 벚굴도 유명하고, 조금만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재첩이 서식하는 곳이다. 이곳 재첩잡이는 국가중요어업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봄에는 매화꽃과 벚꽃을 찾아 많은 사람들이 방문한다. 이보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윤동주 유고시집이 숙명처럼 인연을 맺은 곳이다.

망덕리 앞 바다에서 전어를 잡는 모습
망덕리 앞 바다에서 전어를 잡는 모습

주조장 마루 바닥에 보관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작은 포구였던 어촌마을은 망덕산 아래 망덕포를 중심으로 주조장, 정미소 등 가게들이 생겨났다. 윤동주의 글벗이자 후배인 정병욱도 이곳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 선친 남파 정남섭도 1930년대 초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남파는 고향 남해에서 20세에 3·1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경상남도교원양성소를 졸업하고 거제와 하동에서 교편을 잡았지만 사직하고 외가가 있는 망덕리로 이사와 양조업과 정미업 등을 했다. 광복 후 민군정기에 진월면장을 엮임했다. 정병욱은 학도병으로 징집되자 윤동주가 맡긴 졸업작품 필사본 시집을 잘 간직해달라고 어머니에게 맡겼다. 그 시집이 1948년 1월 정지용의 서문과 함께 출간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알려진 윤동주의 유고시집이다. 윤동주가 존경했던 정지용은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청년 윤동주는 의지가 약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정시에 우수한 것이겠고, 그러나 뼈가 강하였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적(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구나!’

유고시집이 보관된 정병욱 가옥 내부(등록문화재 341호)
유고시집이 보관된 정병욱 가옥 내부(등록문화재 341호)

윤동주 필사본 시집이 어떤 연유로 망덕리까지 오게 되었을까. 그 열쇠는 윤동주와 정병욱의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정병욱(1932-1982, 연세대 국문과교수)이 윤동주를 만난 것은 연희전문학교에서다. 정교수보다 5살이 많은 상급생 윤동주는 조선일보에 실린 정병욱의 ‘뻐꾸기의 전설’이라는 시를 읽고 찾아와 친해졌다. 이후 같은 집에서 하숙하면서 문학과 민족에 깊은 공감을 했다. 그리고 졸업을 앞두고 윤동주는 19편의 시를 필사한 세 권의 시집을 만들어 한 권은 은사 이양하와 글벗 정병욱에게 주고, 남은 한 권은 자신이 가지고 일본유학을 떠난다. 윤동주는 일본에서 유학 중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로 1943년 7월 교토 시모가모 경찰서에 검거되었다. 한편 정병욱은 1944년 1월 징병으로 끌려가면서 어머니에게 시집을 소중하게 보관해달라고 맡겼다. 그리고 자신이 돌아오지 못하면 연희전문학교에 교수와 상의하라고 부탁했다. 윤동주는 1945년 2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7세로 순절했고, 정병욱은 살아 귀향했다. 그리고 마루 밑에 간직한 윤동주 유고시집을 정지용 시인에게 가지고 갔다. 여기에 윤동주 친구 강처중(경향신문 기자)이 가져온 시와 흩어져 있던 습유작품을 더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정병욱은 시조문학, 판소리, 한글 등을 연구했으며, 판소리학회를 창립하기도 했다. 정병욱가옥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연희전문 시절 윤동주와 정병욱
연희전문 시절 윤동주와 정병욱

갯벌 ‘김’에서 제철산업까지

섬진강 하구갯벌은 김을 많이 생산했다. 망덕포구에서 금호도와 태인도 그리고 지심도 일대는 모두 김양식을 했던 곳이다. 특히 태인도 궁기마을은 최초 김시배지로 알려져 있다. 이를 기념하는 비가 세워져 있으며 사당도 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광양에서 진상된 김을 먹어본 임금이 맛이 좋아 이름을 물어보자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가져왔을 뿐 이름을 모른다고 하자 ‘김’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전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섬진강 하구에서 김 양식을 시험했다. 당시 사진을 보면 하구갯벌에 나무가지를 묶어 꽂았다. 이를 ‘섶’ 양식이라고 한다. 요즘 하는 김 양식법은 부류식 망홍이다. 깊은 바다에 부표를 띄우고 인공포자를 부착한 김발을 매달아 양식하는 방법이다. 섶 양식은 바다에 떠다니는 자연포자를 가지에 부착해 양식하는 방법이다. 김 유생인 포자들이 많이 있고 수심이 깊지 않는 나뭇가지를 꽂을 수 있는 갯벌이 섶 양식의 적지였다. 섬진강 하구가 그런 곳이었다.

태인도와 금호도는 일찍부터 섶 양식 이후 김 양식법인 대발김양식이 발달했다. 대나무를 젓가락 굵기로 쪼개서 엮은 발을 갯벌에 박은 기둥에 매달아 양식하는 방법이다. 그물식 김발인 망홍이 개발되기 전이다. 이후 지주식 망홍까지 광양제철 들어서기 전인 1970년대 말까지 지속되었다. 당시 사진을 보면 제철공장을 짓기 위해 매립공사를 하는 갯벌에는 김 양식을 위한 시설들로 가득했다. 광양제철은 금호도와 태인도 남쪽 갯벌에 인공섬을 만들어 건설했다. 갯벌에 기둥박아 기반을 다지고, 그 위에 인근 섬을 발파해 얻은 돌을 집어넣었다. 이때 사용한 흙과 돌의 양이 여의도 63빌딩 140동에 해당하는 물량이라고 한다. 그곳은 모두 김 양식장이거나 백합 서식지였다. 망덕리에서 태인대교를 건너면 태인도와 금호도로 이어지며, 이순신대교를 거쳐 묘도와 여수로 연결된다. 이들 섬 사이에 갯벌은 을 막아 공장을 짓고 쇠(金)를 만들고 있다. ‘김’이 ‘쇠’로 변하는 사이 섬은 뭍이 되고 갯벌은 사라졌다. 누가 저곳에 제철공장이 들어설 것이라는 것을 알았겠는가.

남해 망운산에서 본 섬진강하구
남해 망운산에서 본 섬진강하구

망덕포구 개들은 가을이 싫다

망덕포구는 어느 때보다 전어철에 활기를 띤다. 동이 트기 전에 배알도 인근 섬진대교와 태인대교 안쪽에 그물을 놓았다가 걷는다. 해가 뜰 무렵 포구로 돌아와 마을 횟집이나 활어차로 넘긴다. 비록 많은 갯벌은 없어졌지만 그나마 가을전어가 찾아와 망덕리는 포구로 손색이 없다. 전어는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 많다. 한강 하류의 소래와 강화일대, 금강하류 비응도 일대, 섬진강 하류 망덕 일대, 낙동강 하류 등이다. 이 중 오롯이 강과 바다가 통하는 곳은 섬진강과 한강뿐이다. 모두 물길이 막혔다. 영양염류가 풍부한 이곳에서 전어가 살이 통통하게 오르는 가을철에 어부들은 전어를 잡고 식객들은 포구를 찾는다. 섬진강 물고기로는 은어를 꼽지만 하구에는 은빛처럼 빛나는 전어가 있다.

망덕리 어민들은 작은 배로 전어를 잡는다. 대형 어탐기로 전어를 쫓아다니는 것이 아니다. 어둠이 물러나기도 전인 새벽에 마을 앞 배알도 인근에 나가 전어를 잡고 날이 밝으면 서둘러 돌아온다. 옛날에는 양조망이라 해서 두 척의 배로 노를 저어 전어를 에워싸서 잡았다. 망덕포구 맞은편에는 선소라는 마을이 있다. 두 마을 사이에 있는 방조제에는 당시 전어를 잡았던 작은 배가 전시되어 있다.

“제철이 들어오기 전에는 황금어장이여, 노다지가 따로 없었어.” 더위를 피해 나무 그늘 아래에 모여 있던 노인들에게 전어이야기를 꺼내자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한마디씩 했다. 이곳 사람들에게 기억의 경계는 제철이다. 광양제철이 들어오고 난 전과 후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고기잡이보다는 김양식에 매진했다. 겨울에는 김을 하고, 여름에는 장어를 잡고 가을에는 전어를 잡았지만 주업은 겨울에 하는 김 양식이었다. 이제 김 양식은 더 이상 할 수 없고, 장어는 찾기 힘들다. 부부가 전어잡이를 하는 통에 가을철이 되면 망덕포구 개들도 울고 돼지들도 운다. 때에 맞춰 밥을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망덕포구, 앞에 작은 섬이 배알도이며 뒤로 태인도로 이어진다.
망덕포구, 앞에 작은 섬이 배알도이며 뒤로 태인도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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